1)주벽-박익(朴翊, 1332~139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판서(版圖判書) 영균(永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주구씨(綾州具氏)로 좌정승(左政丞) 위(褘)의 딸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郎)·중서령(中書令)·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집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 집을 송암(松庵)이라 한 것은 모두 송경(松京)의 ‘송(松)자’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별세 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밀양의 덕남서원(德南書院)과 신계서원(新溪書院),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이 있다.
2)박융(朴融, ?~142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명(惟明 : 國朝榜目에는 惟仁), 호는 우당(憂堂). 할아버지는 영균(永均)이고, 아버지는 익(翊)이며, 어머니는 박충민(朴忠敏)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도 사간 정준(鄭悛), 헌납(獻納) 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재서용(再敍用)되어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에는 윤림(尹臨)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재서용 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강원·황해·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 : 빈민이나 이재민의 구제) 상황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그도 이조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그 뒤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이 있다.
3)박소(朴紹, 1347~?)
호(號)는 인당(忍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태종(太宗)때 생원(生員). 안음현감을 지내면서 청백(淸白)한 치적(治積)이 있었다. 안음에 공(公)의 청백선정비가 세워졌다. 문집(文集)이 있다.
4)박조(朴調, 1350~1431)
자(字)는 신옹(愼翁), 호(號)는 아당(啞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관(官)은 정랑(正郞)을 지냈다. 박익의 제3자이다.
정몽주의 문하에서 배워 크게 성취하니 세인의 칭송이 많았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예조정랑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부(父)의 유언과 왕조교체의 시기를 당하여 칭병(稱病)하여 사직하고 관직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였다.
만년에 두 형이 세상을 뜨자 아우인 박총과 더불어 경상우도에 복거(卜居)하였다.
5)박총(朴聰, 1352~?)
자(字)는 명옹(暝翁), 호(號)는 졸당(拙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효행(孝行)으로 이조(吏曹)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박익의 제4자이다.
형제가 서로 스승과 벗의 구실을 하여 안으로 지덕이 충적함에 착한 이름이 사방에 드러났다. 도의지교인 길재가 말하기를, “벗이란 그 덕(德)을 벗하는 것이니 박총은 나의 스승이요, 나의 벗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칭송이 많았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호조정랑에 있을 때 소장(疏狀)을 올려 직언하다가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도의를 강명(講明)하고 경사(經史)를 연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년에 형과 더불어 낙동강 우편 송지촌(松旨村)에 복거하였다. 사후 세종이 호조참의를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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