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오건(吳健, 1521~157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종은(從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식(軾)이고, 아버지는 세기(世紀)이며,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훈도 영강(永康)의 딸이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효성으로 소문이 났으며, 모친상 때에는 더욱 예의에 힘써 1549년(명종 4) 예조의 포상과 함께 왕으로부터 복호(復戶 : 조세나 역을 면제함)를 받았다. 14세 때부터 경(經)·자(子)·사(史)에 몰두했으나 집이 가난해 선생을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홀로 ≪중용≫을 수백 번 반복 연마해 통달하고 ≪대학≫·≪논어≫·≪맹자≫ 등도 연구하였다. 조식(曺植)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인으로 수학했으며, 김인후(金麟厚)·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황도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함을 칭찬하였다.
155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7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된 뒤 이듬해 정언(正言)·헌납(獻納)·지평(持平)·교리(校理)·직강(直講)·사성(司成) 및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좌랑,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경연(經筵)에서 학문의 길은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에 있다고 논했으며, 소를 올려 학문을 진흥시키고 간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분위기가 직언을 싫어하고 사류(士類)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자 1572년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사(書史)를 섭렵하면서 시작(詩作)과 강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문인들이 ‘덕계선생(德溪先生)’이라 불렀으며, 산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하였다. 저서로는 ≪덕계문집≫·≪정묘일기 丁卯日記≫ 등이 있다.
2)오한(吳僩, 1546~1589)
자는 의숙(毅叔), 호는 수오당(守吾堂)이다. 조식의 문인이며 ≪수오당실기≫가 전한다.
3)오장(吳長, ?~16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익승(翼承), 호는 사호(思湖). 할아버지는 세기(世紀)이고, 아버지는 전한(典翰) 건(健)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우옹(金宇顒)의 천거로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발탁되었으나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1595년 진안현감이 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언(正言)을 거쳐, 경성판관을 지냈으며, 1613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와 폐모론을 둘러싸고 대북세력과 각축을 벌이다가 삭직당한 뒤 고향인 영남으로 퇴거하였다.
1614년 영창대군의 처형을 공격하던 정온(鄭蘊)이 제주로 유배당하자 영남의 유생들을 이끌고 반대상소를 하였다가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사 토산(兎山)으로 유배당하였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사호집≫을 남겼다. 인조반정 후 승지를 추증 받았고, 산청의 서호사(西湖祠)에 제향되었다.
4)박문영(朴文暹, 1570~1623)
자는 군수(君秀), 호는 용호(龍湖)이다. 맹지(孟智)의 5세손이다. 생원에 입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정인홍과 정구의 문인이며 문집 ≪龍湖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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