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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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산서원(道山書院)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711
   김려석(金礪石) 박희권(朴希權)
   1813년(순조 13)
   
   3월 27일
   
이 서원은 1813년(순조 13) 당초 백운암(白雲庵) 건물을 이건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하는데 고종 5년(1868) 훼철되었던 것을 순종2년(1908) 도산여학당(道山輿學堂)으로 개칭하고 사립학교를 설립, 사용하여 오다가 1942년 안성공립학교가 개설되면서 다시 서원으로 환원하였다. 그 후 사당을 1970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에는 충목공 김려석(忠穆公 金礪石)과 임회당 박희권(臨淮堂 朴希權)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주벽-김려석(金礪石, 1445∼149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은경(殷卿). 할아버지는 원손(遠孫)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수(洙)이며, 어머니는 권항(權恒)의 딸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 겸 예문관검열(成均館學諭兼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으며, 뒤에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재행겸비자(才行兼備者)를 선발할 때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뽑혔으며, 1472년 병조정랑이 된 뒤 검상(檢詳)·사인(舍人)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1479년 성균관의 사예(司藝)로서 원수(元帥)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1481년 사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도승지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참의로 재직 중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탄핵되어, 1487년 충청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판결사(判決事)를 겸한 뒤 경상도·강원도의 관찰사, 호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91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예조참판을 거쳐 1493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관리가 되어서는 사람의 뜻을 살피기에 힘써 특별히 마을을 써서 대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사관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2)박희권(朴希權)
세조의 탈권(奪權)에 반항하고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은둔자정(隱遯自靖)한 의율제 박린(擬栗齊 朴麟)의 아들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1448년(세종 30) 동몽교관, 1453년(단종 1)에 사헌부감찰에 증직되었다. 단종이 손위(遜位)할 때 아버지 린은 진산군수(珍山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부자가 서로 울며 말하되 ‘영월로 가서 목숨을 바쳐 충성함이 의리에 당연하다’고 말하고 출발하려 했는데 직전에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 후원에 壇을 쌓고 매년 제향을 올려 절의를 지켰다. 그 고조부 힐(詰)도 함께 절의를 지켜 三世忠義라 칭송하였다.

이 서원의 건물 중 도산재는 본래 덕유산에 있었던 백운암 건물이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하는데 조선 말기의 순종 2년1908년 도산여학당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1942년 안성공립학교가 개설될 때 까지 그 전신으로써 소임을 다해 왔다.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인 도산사가 있으며 충목공 김여석과 임회당 박희권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 밖에 외삼문 1동이 있다.

참고-무주군지
전라북도지
전북향교원우대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