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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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산서원(道山書院)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220-2
   권득기(權得己) 권 시(權 諰)
   1693년(숙종 19)
   1711년(숙종 37)
   음력 3월, 9월 중정(中丁)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3호(1989.03.18지정)
도산서원은 옛날에 ‘숯뱅이’라고 불려지던 탄방동(炭坊洞) 도산(道山) 기슭에 세워진 서원이다. 숯뱅이는 안동권씨의 집성마을이다.탄옹 권시(炭翁 權諰)는 선대의 땅을 상속받아 23세(1627)가 되던 때에 탄방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이곳은 권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권시가 공주(탄방동)으로 옮겨 살면서 공주를 가향으로 하고, 대전지방의 명현인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유계(兪棨),이유태(李惟泰) 등 호서의 사림과 교유하여 호서지방에 이름이 났다. 그러나 그는 예송문제로 서인과 대립하여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고, 공주의 옛집으로 돌아와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권시가 작고한 후 사림과 문인들이 그를 서원에 배향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유성 지방의 자제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충현서원에 추배하고자 2번에 걸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사림들은 그가 살면서 후학에게 강학하던 향리에 서원을 세우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1690년 충청도 도내의 선비들이 서원설립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나, 해당관청으로부터 아무런 답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해인1691년(숙종 17) 10월 27일 서당계(書堂契)에서 서원의 건립에 관한 ‘통문(通文)’을 작성하여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에게 돌렸다. 권시가 작고한 후 이곳의 사림들은 그를 서원에 향사하고자 20여 년간의 노력 끝에 결국 그가 향리에서 강학하던 서당자리에 1693년(숙종19)에 서원을 창건하고 서원의 명칭을 ‘도산서원(道山書院)’이라 하고 권시와 그의 아버지 권득기(權得己)를 배향하였다. 1711년(숙종37) 사액(賜額)을 받았다.
도산서원은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서원이 훼철된 후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보낸 편지에서 도산서원은 훼철대상에서 빠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1921년 장판소(埋版所)에 설단하고 춘추향례(春秋享禮)를 봉행(奉行)하다가 1968년에 사당인 함덕사(涵德祠)를 세웠고, 1974년에는 옛 서원이 있던 동쪽 언덕에 문공부 협조를 얻어 안동권씨 가문에서 자력으로 도산서원을 복원하였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두 번째 정일(丁日)에 유림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1)주벽-권득기(權得己, 1570∼16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悔). 박(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령 덕유(德裕)이고,아버지는 예조판서 극례(克禮)이며, 어머니는 윤천석(尹天錫)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선공감역 극관(克寬)에게 입양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였다. 1618년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죽은 뒤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대전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만회집≫·≪연송잡기 然松雜記≫ 등이 있다.

2)권시(權諰, 1604∼167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아버지는 좌랑 득기(得己)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도정(都正) 첨(瞻)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행(志行)이 절이(絶異)하여 사람들이 안자(顔子)에 비유하였다. 9세 때 이미 훌륭한 시를 지었으며, 15세에 이기지설과 사칠지변(四七之辨)에 정통하였다. 1636년(인조 14)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세자시강원자의 등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경상도사 등을 역임하고, 그 뒤 집의·진선(進善) 등을 거쳐1658년(효종 9) 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찬선(贊善)에 오르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한 뒤에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예송문제가 있을 때,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립하여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어 낙향하던 중 광주(廣州)의 선영에 머물러 살았다.
1668년 송준길이 임금에게 “시는 애군우국(愛君憂國)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니 버릴 수 없다.”고 주청하여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듬해 공주(公主 : 현재 大田)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다. 그가 죽자 좌참찬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대전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탄옹집≫ 7책이 있다.

1)함덕사(涵德祠)
함덕사(涵德祠)는 도산서원의 사당으로 권득기와 권시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엄숙한 공간이다. 도산서원의 윗 구역에 ‘유정문(由正門)’ 현판을 건 묘문(廟文)과 ‘함덕사’ 현판을 단 묘우(廟宇)에 세웠다. 평지일 경우에는 강당 앞에 사당을 배치하지만, 산이나 언덕을 낀 지역은 평지의 강당보다 한층 높은 산 쪽의 뒤편에 사당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를 높이는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함덕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전면 1칸 열은 퇴칸으로 하고, 뒷면 2칸 열은 통칸으로 하여 내부에 우물마루를 깔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위패는 왼쪽이 권득기, 오른쪽이 권시를 봉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함덕사에서는 반대로 왼쪽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나온다. 상량문에는 함덕사가 1968년에 지어졌음을 알리고 있다.
 
2)명교당(明敎堂)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가운데 3칸에는 우물마루를 깔은 넓은 대청을 들이고 좌우의 측면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강당에는 ‘도산서원(道山書院)’ 편액(扁額)을 걸었고, 대청인 강당 내부에는 정면에 ‘명교당(明敎堂)’ 현판, 좌우 측면에 각각 방을 가리키는 ‘구인재(求仁齋)’와 ‘귀본재(貴本齋)’란 현판을 걸어 놓았다. 1974년에 지어졌다.
강당의 좌우 측벽에는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전서체(篆書體) 글씨를 나무판에 새긴 십자훈(十字訓)이 걸려있다. ‘每事必求是 毋落第二義(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의롭지 않은 일에 빠지지 말라)’는 내용으로 권득기가 후손들에게 학문의 과업에 두지 말 것을 당부하며 남긴 유훈이다.
 
3)동·서재(시습재, 지선재)
명교당(明敎堂) 앞에는 잔디마당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시습재(時習齋)와 지선재(止善齋)라는 동서양재를 두었다. 대칭으로 배치된 양재는 구조도 동일하여 전면3칸, 측면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전면 1칸은 열은 퇴칸으로 마루를 깔았고, 뒷면2칸 열은 온돌방이다. 시습재와 명교당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함덕사가 있는 담장 가까이에 정면2칸, 측면1칸 규모의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1)도산서원사적비(道山書院事蹟碑)
건 립 : 1804년(순조4년)
찬 자 :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지평 정종로 찬
서 자 : 통훈대부 행 홍문과 교리 지제교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동학교수 실록기주관강준흠 서
 
2)원규(院規) 및 ≪독서잠의 讀書潛疑≫ 10권과 문집 1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