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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죽재(竹齋) 이겸수(李謙受, 1555~1598)
竹齋 李先生은 壬辰倭亂때 四溟大師와 함께 국난의 극복에 赫赫한 공을 세우신 분이다.
貫鄕은 鶴城, 諱는 謙受이고 字는 子虛, 號는 潛窩, 陞賜號가 竹齋이시다. 世宗朝 資憲大夫知中樞院事 世子左賓客 忠肅公 諱 藝의 7世孫으로 乙卯年(1555) 3月 22日 辰時에 府西 熊上面 大周里 현周南에서 태어나셨다. 나면서부터 資質이 남보다 뛰어나 性稟과 度量이 嚴正하고 威儀와 容貌가 의젓하여 두려워할만하고 남을 대함에는 恭遜하고 忠誠스러워 信實한데다 또 孝誠과 友愛가 돈독했다. 38세에 壬辰倭亂을 만나, 國家危亡之日을 當하였으니 義로써 功名을 세우라는 母親의 말씀을 받고 西面 防倭軍에 나아가 많은 戰果를 獲得하였으며 四溟大師와 함께 加藤淸正, 小西行長 등 일본 장수들과의 교섭으로 횡포와 약탈을 중지케 하고 평온을 찾게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많은 남쪽백성들이 목숨을 保存하게 되었으니 公의 功德이 아님이 없다. 上께서 가상히 여겨 장차 크게 쓰고자 하시어 丙申年(1596) 7月 公의 나이 42세에 通訓大夫 機張縣監에 제수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定州判官을 제수하니 장차 赴任하려 하며 詩 한 수 를 남기고 中途에 戊戌年(1598) 4月 15日 月城府에서 病으로 돌아가시니 享年이 44세였다. 애석하고 원통하도다! 하늘이 壽를 주지 않아 雄志를 다하지 못했다. 집에서 孝道하고 나라에 忠誠하여 8年 전쟁에 기여한 功이 많았으며 또한 公의 충성과 용맹이 天性에 부여된 것이고 평소에 기른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亂을 당하여 慷慨했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일의 大綱이 朝鮮王朝實錄 宣祖條 및 奮忠紓難錄, 龍蛇雜錄등에 기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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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서원은 부지 517평에 충열사(사당), 명지문(내삼문), 선인당(강당), 분의재(동재), 돈예재(서재), 성신문(외삼문), 동서협문 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묘정비, 복원기념비, 헌성비, 간판석, 서원안내판, 조경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음.
1)충열사(사당)
익공소로수장집, 맞배형지붕, 상부흘림기둥, 전면3간 측면2간 9평
2)선인당(강당)
2익공화반팔작집, 겹처마, 상부흘림기둥, 전면5간 측면3간 25평
3)분의재(동재)
소고수장팔작집, 상부흘림기둥, 전면4간 측면2간 ㄱ자형 13평
4)돈예재(서재)
철근콘크리트 슬러브집, 27평
5)성신문(외삼문)
솟을대문, 익공소로맞배형, 상부흘림, 전면3간 측면2간 7평
6)명지문(내삼문)
익공소로맞배형, 상부흘림기둥, 전면3간 측면1간 5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