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 김자수(金自粹)
자(字) 순중(純衆) 호는 상촌(桑村) 본관 경주(慶州)
고려충정왕(高麗忠定王) 3년(1351) 신묘생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19세에 생원합격 11월경 성균관에 입사(入舍)
20년(1371) 어머님 병환으로 귀향(歸鄕) 병구환을 지극히 함
동년. 어머님 별세후 24삭간(朔間) 시묘(侍墓)
동년(1374) 문과장원
동년(1374) 12월 문과급제 윤허를 받고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
우왕(隅王) 원년(1375)에 정언(正言)
동년(1375) 11월 정언사건으로 유배
2년(1376) 복귀되어 전부사령
4년(1378)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동년(1378) 좨주(祭酒)
14년(1388) 충청도도관찰사
공양왕(恭讓王) 원년(1390) 대사성겸 세자, 좌보덕 대상소
2년(1391) 사임상소(辭任上疏)
동년(1391)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3년(1392) 좌상시(左常侍)
4년(1393) 상소(上疏)
동년(1393) 7월에 고려가 망한 후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셨다가 나와 광주추령(廣州秋嶺)으로 거처를 옮기셨다가 다시 고향인 안동에 은거(隱居)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王位)에 있을 때 공을 헌장(憲長)으로 불렀으나 불청(不聽)
태조(太祖) 11년(1411) 9월에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역시 불취(不就)
태종(太宗) 13년(1413) 엄지(嚴旨)로 형조판서에 불렀으나, 광주추령(廣州秋嶺)에서 유시(遺詩)를 남기고 자결(自決)하심.
[절명사](絶命詞) :平生忠孝意今日誰有知
▷한평생충효의 뜻을 오늘날에 누가 알리있으리오 一死吾休恨九原誰有知
▷이한몸 죽어 쉬운한은 황천에서 응당 알바있으리
2)연향 - 김영유(金永濡)
자(字) 택부(澤夫) 호는 퇴재(退齋) 시 공평(諡 恭平) 관(貫) 경주(慶州) 이는 상촌선생의 손자이다.
세종(世宗) 29년 정묘(丁卯)에 별시(別試) 문과에 올라 대사성, 대사헌, 이조참판, 삼남해, 사도방백, 개성유수(開城留守),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신묘 기록에 좌리원종일등공신(佐理原從一等功臣)으로 기로사(耆老社)에 드셨다.
3)배향 - 김상례(金商禮)
자(字) 희윤(熙潤) 호는 삼묵재(三黙齋)
순조(純祖)때 시관(始冠)하여 은거하면서 자신을 지키며 한언(罕言)과 근신예도(謹身禮度)는 언제나 군자(君子)의 정의로운 교화를 초지일관(初志一貫)타가 생애(生涯)를 다한 현사(賢士)이다. 이 셋 어진이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함이요. 특히 조선 말기로부터 서구문화의 새로운 교육제도가 생겨나면서부터 서원의 기능이 약화되고 향사만 드리는 곳으로 변해 가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 나머지 경상대학한문과교수(慶尙大學漢文科敎授)들의 더할 수 없는 협조로 전국 한문학과 수재(秀才)들을 선발(選拔)하여 약 5년간 동하기(冬夏期) 방학을 이용하여 훈도(訓導)에 매진타가 운영사정에 의해 중단하고, 그 뒤를 이어 한국고전번역원(韓國古典飜譯院)에서 한해 2회에 방학기를 정하여 후학육성에 총력(總力)을 하는 바 옛 서원의 구실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