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연(鄭珚)
자는 맹순(孟淳)이며 관향은 초계(草溪)로 예부상서광유후홍문공(禮部尙書光儒侯弘文公) 정배걸(鄭倍傑)이 선생의 9대조이다. 증조는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정신(鄭愼)이요,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낸 정언이 조부이며 보승별장(保勝別將) 벼슬을 한 정광조(鄭光祖)가 아버지이시다. 선생은 음률에 정통하시고 예문(禮文)에도 밝으셔서 몸소 예를 실천하여 후학이 입문했다고 한다.
1343년(충혜왕 5)에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대호군(大護軍)을 삼아서 강독을 하시고 1347년(충목왕 3)에 겸안렴존무사유도평양민전(兼安廉存撫使遺度平壤民田)을 역임하시고 1356년(공민왕 5)에 강릉교주도도지휘사(江陵交州道都指揮使)를 하시고 수사공우복야(守司空右僕射)를 지내시다가 모함으로 청주목사(淸州牧使)로 강등되었다. 이듬해인 1357년(공민왕 6)에 경산에 유배되었다가 눌러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외삼촌 채상국하중(蔡相國河中)이 모함으로 원통하게 투옥되자 선생도 이에 연루되었다고 한다. 이내 풀려서 이전의 밀직제학(密直提學)에 복직되었으나 경산 동산하(東山下) 상방리(上方里)에 정착하여 문밖에 작은 다리를 놓아 이름을 이엄교(耳掩橋)라 하고 귀(耳)를 막고(掩) 살며 그 다리를 넘지 않았으며 손수 매화와 버들을 심어 자연을 즐기며 향중(鄕中)의 자제들을 교육하다 공민왕 7년 무술(戊戌)년에 돌아가자 나라에서 양헌(良獻)이란 시호를 내리셨다. 생전의 거소(居所)는 여러번의 병란으로 인하여 실전(失傳)되어 알길이 없고 묘소는 경산현 동쪽 백양동 능곡으로 되어 있으나 지석(誌石)과 명문(銘文)을 찾지 못하여 단비(檀碑)를 세우기로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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