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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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옥계서원(玉溪書院)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이 이(李 珥) 윤봉구(尹鳳九) 최두남(崔斗南) 위백규(魏伯珪) 박준흠(朴俊欽) 최유윤(崔惟允)
   1725년(영조 3)
   
   7월 하정(下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60호(1983.07.20지정)
이 서원은 본래 1725년(영조 3)에 이곡에서 4Km 떨어진 향옥동에 이이(李珥)가 손수 쓴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해동연원록(海東淵源錄) 등을 보관하고자 세워졌던 것이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것을 1867년에 지금의 장소로 건물을 옮겨 다시 지었다. 그러나 그 곳이 다시 수몰지역으로 됨으로써 1986년에 지금의 장소로 건물을 옮겨 복원하였다. 이 서원은 이이(李珥)를 비롯하여 윤봉구(尹鳳九), 최두남(崔斗南), 위백규(魏伯珪), 박준흠(朴俊欽), 최유윤(崔惟允) 등 여러 인물들을 배향해 왔다.

1)주벽-이이(李珥, 1536~158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부친은 찰방(察訪)을 지낸 원수(元秀)이고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이다.
강릉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에 전심하여 23세때 이황을 찾아가 만났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 식년 문과에 모두 장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호조 좌랑에 초임, 예조 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청주 목사로 복직, 다음해 다시 사직하고 해주에 낙향했으며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했다. 그 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하직,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 연구에 전심하다가 1581년 다시 불려 대사헌·예문관 제학을 겸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 우참찬을 역임하였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으며 같은 해 판독령부사에 등용, 이조 판서에 이르러 동서 분당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조선 유학계에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으며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설보다는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을 학문 연구의 태도로 여겼다. 또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근본 사상으로 여겨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사후 문묘에 종사되었고 선조의 묘정에 배향하였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귀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황주의 백록동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2)윤봉구(尹鳳九, 1683~176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 (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우참찬 봉오(鳳五)의 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 1) 청도군수가 되었다. 1733년 사헌부지평,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고, 1739년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1741년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 1743년 사과, 1749년 진선, 1754년 서연관(書筵官), 이듬 해 찬선을 거쳐 1760년 대사헌에 특별 임명되었으며, 1763년 지돈녕(知敦寧)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현상벽(玄尙璧)·채지홍(蔡之洪)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 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李縡)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사회적·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저서로 ≪병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3)최두남(崔斗南)
자는 추지(樞之). 1581년(선조14)생으로 12세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버지 참봉공을 모시고 피난하면서 왜적을 만났으나 굽히지 않고 지성으로 받으러 왜적을 감복시켰으며 효행(孝行)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정직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가증(加贈)되었다.
 
4)위백규(魏伯珪, 1727~1798)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계항(桂巷)·계항거사(桂巷居士). 장흥 출신. 아버지는 진사 문덕(文德)이다.
처음에 증조부에게 수학했으나 유년기를 지난 뒤에는 자수면업(自修勉業)하였다. 어려서부터 제가서(諸家書)를 탐독해 학문적 자세를 굳힌 그는 향리의 장천재(長川齋 : 장흥의 관산면 방촌리)에 기거하면서 면학과 교화의 일익을 담당했고, 1750년(영조 26) 학행으로 향천(鄕薦)을 받기도 하였다.
1751년 스승 윤봉구(尹鳳九)를 만나 그 뒤 1766년까지 경서·의례·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관한 논의를 통해 학문적 계도를 받았다. 과거에 계속 응시했으나 떨어졌고, 그 뒤 1794년(정조 18) 68세 때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저술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져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 기장(機張)·태인·옥과현감,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경기전령(慶基殿令) 등을 차례로 지냈다.
학통은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론계이나, 향촌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강한 현실 비판 의식이 저술에 나타나고 있어 학문적 성격은 경세적 실학의 색채가 짙다. 경전의 이해나 심성론·이기론에서는 전통 성리학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정현신보 政鉉新譜≫나 봉사류(奉事類)에서 당시의 현실을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어 실학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촌사회 개선론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지방 교육 개선을 통해 향촌 질서의 유지와 교화뿐만 아니라 관리 선발, 지방 관리의 경제 기능까지도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정치 기강의 해이와 이에 따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관제 축소, 향촌의 자율적 공평 부세론, 지방 관리 선도책 등을 구상하고, 셋째 견실한 향촌 방위 체제를 주장한 점이다.
이 향촌사회 개선론을 일관하는 기본 구상은 향촌의 자율성 모색과 공의(公議)의 구현으로 집약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향촌 사회의 지식인들이 자율성과 공의 창달의 주도자나 중간 계층으로서, 사회의 견제 및 비판과 민중 옹호라는 양면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세론 외에도 경학·지리·역사·의학 등에 관한 저술이 문집 ≪존재집 存齋集≫ 22권 안에 망라되어 있어 학문 폭이 매우 넓고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에 대한 후인의 인물평이나 저술과는 달리 교우 관계나 후학은 매우 소략하고 묘연해 밝히기가 힘들다. 이것은 그가 호남의 벽지에서 무명의 선비로 거의 전생애를 보냈기 때문이다.
1805년(순조 5) 향리 유생들의 발의로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존재집≫·≪정현신보≫·≪사서차의 四書箚義≫·≪환영지 環瀛誌≫·≪본초강목 本草綱目≫·≪고금 古琴≫·≪격물설 格物說≫·≪원류 原類≫·≪연어 然語≫ 등이 있다.
 
5)박준흠(朴俊欽)
본관은 음성으로 자는 덕여(德汝)이며 호는 입암(立菴)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였고 특히, 그가 남긴 <木圖書說>은 세상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만년에는 안성의 덕유산에 우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합천의 옥계서원에 배향되었다.
6)최유윤(1809~1877)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성진(誠進)이며 호는 몽관(夢關)이다. 최경태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과거를 응시하고자 준비했으나, 30세가 지나면서 이에 뜻을 버리고 10여년간 성리학을 독학하였다. 그 뒤 송래희·송달수·기정진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중년에 덕유산에 들어갔다가 만년에 임곡에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항상 무본실천(無本之本)을 강조했으며 일상생활에 정규(定規)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 기울어져 가는 유교의 풍토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배불(排佛)에도 힘써 이단을 배척하였다. 저서에 ≪몽관집(夢關集)≫이 있다.

경내에는 강당과 소원사,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등이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소원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주최씨화수계안(慶州崔氏花樹契案) 등을 소장하고 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