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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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천서원(龜川書院)-함양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693
   박맹지(朴孟智) 표연말(表沿沫) 양 관(梁 灌) 강 한(姜 漢) 양 희(梁 喜) 하맹보(河孟寶)
   1701년(숙종 27)
   
   불향
   
1701년(숙종 27)에 창건하여 박맹지(朴孟智), 표연말(表沿沫), 양관(梁灌), 강한(姜漢), 양희(梁喜), 하맹보(河孟寶)를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지금은 그 후손들이 수계(修契)하여 齋와 碑를 유허에 세우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며 계명을 不忘이라 하고 재명은 구천(龜川)이라 한다. 광복 후 1984년에 복원하고 양홍주(梁弘澍)를 추가배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주벽-박맹지(朴孟智,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춘당(春塘). 아버지는 안경(安敬)이다. 일찍이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454년(단종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권지학유(權知學諭)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어 1자급이 더하여졌다. 그 뒤 세조가 여러 차례 영직으로 탁용하려 하였으나 관계를 떠나 함양(咸陽)에 은거하여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세조가 죽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1474년(성종 5) 평사(評事)가 되었다. 이 때 북변(北邊)의 병마사인 어유소(魚有沼)의 명으로 왕에게 대전(大箭)과 매와 사냥개를 바쳤다. 이어 왕에게 육진(六鎭)개척 이후 야인(野人)들의 내조(來朝)가 무질서함에 따라 조선이 입는 피해가 큼을 건의하였다. 즉, 야인들이 내조할 때 운(運 : 군대 대오의 단위나 화물 운송 때의 한 묶음)의 일 년의 횟수와 한 번의 운이 이동할 때의 운의 숫자를 정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그 뒤 훈도(訓導)·교리·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함양의 구천향현사(龜川鄕賢祠)에 배향되었다.
 
2)표연말(表沿沫, 1449~149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평석(平石). 함양 출신. 할아버지는 을충(乙忠)이고, 아버지는 감찰 계(繼)이며, 어머니는 정랑 안홍기(安鴻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약관에 문행(文行)이 세상에 알려지고 당대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다. 같은 문하의 조위(曺偉)·김일손(金馹孫)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1469년(예종 1)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85년 사의(司議)로서 ≪동국통감≫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0년에는 이조참의·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벼슬 첫길인 예문관 시절에 한림의 여러 선생들이 관례로 신관(新官)들을 침포(侵暴)하여 금육(禁肉)과 여악(女樂)으로 주연(酒宴)을 베푼 사실이 성종에게 알려져 징계가 내렸는데, 그도 이 자리에 들었다가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가 지내게 되었다.
이후로 향회(鄕會)에서 금육을 차린 것을 보면 결코 성법(聖法)을 다시 어길 수 없다 하고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상을 주자의 ≪가례≫에 따라 치른 일로써, 스승인 선산부사 김종직의 추천을 받아 자급(資級)이 하나 높여졌다. 그 뒤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무오사화 때 경원으로 유배가던 중 객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서거정(徐居正)의 문생이 된 인연으로 ≪필원잡기 筆苑雜記≫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논학 論學>이라는 글에서 김종직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사림파의 학문관과 정치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1507년(중종 2)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1517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54년(철종 5)에 후손 석준(奭峻)이 간행한 ≪남계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3)양관(梁灌, 1437~150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옥지(沃之), 호는 일로당(逸老堂). 본래 학문에 뜻을 두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통달했으나 과거에 세 번 실패하자 단념, 1460년(세조 6) 무과에 합격해 중앙과 지방 여러 벼슬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고 청렴한 관리로서 청백리로 기록되었다.
1486년(성종 17)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성준(成俊)이 사마동만호(斜麻洞萬戶)인 그가 군졸과 침식을 같이하고 국가 방위에 전력하고 있으니 사용(司勇 : 五衛의 軍職)으로 승진시킬 것을 왕에게 아뢰어 후한 녹봉을 받았다. 또한 1493년 덕천군수로 있을 때 평안도관찰사 이clr(李則)의 상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의주목사 때에는 이민(吏民)이 그의 선정을 구가하였다. 어사 이천영(李天英)이 청렴을 아뢰어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1487년에 왕의 특명으로 갑산부사에서 경직(京職)으로 옮겨졌다.
그 뒤 장흥부사를 사임하고 돌아올 때 소지품이 단지 ≪소학≫, 이백(李白)·두보(杜甫)의 시집과 금(琴)·적(笛)뿐이었다 한다. 마침 어사가 동행하게 되어 이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성종이 가상히 여겨 청백리에 기록하고, 관직을 사임하고 돌아올 때의 행색을 그림으로 그려 벽에 붙이고 수령들에게 보이게 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국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이를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말년에는 ‘일로당’이라는 정사(精舍)를 짓고 꽃과 대나무를 벗삼아 보냈다. 그가 살던 옛 터인 함양 구천(龜川)에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천성이 청근(淸謹)하고 박학호도(博學好道)해 삼조(三朝)에 벼슬하면서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4)강한(姜漢, 1454~?)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종지(宗之) 이며, 호는 금재(琴齋)이다. 아버지는 군위현감 강리공(姜利敬)이다. 학행과 예모가 뛰어나고 필법(筆法)이 정묘하여 성종 대 포의(布衣)로서 사신 접반사에 종사했다. 43세로 연산군 2년(1496) 사마시 증광 진사 3등에 합격했다. 중종 13년(1518) 1월에 사헌부 감찰(監察), 3월에 군자감 주부(主簿),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산청군 필봉산 아래 금탄에서 호를 청감(聽琴)이라 하고 모재 김안국과 교우하며 후학에 힘써 세인이 강고산(姜高山)이라고 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확계 정옥련, 수헌 권오복, 호음 정사룡 등이 배출되었으며, 글씨를 잘 썼다. 함양 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童蒙須知≫가 있다.
 
5)양희(梁喜, 1515~158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구이(懼而), 호는 구졸암(九拙菴).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관(灌)이고, 아버지는 첨정(僉正) 응곤(應鵾)이며, 어머니는 검열(檢閱) 강문회(姜文會)의 딸이다.
노정(盧禎)·이후백(李後白)과 함께 도의와 학문을 닦아 영남의 삼걸(三傑)이라 일컬어졌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 등을 지내고, 1568년(선조 1)에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벼슬은 파주목사·사간·의주목사·승지를 거쳐, 1580년에는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158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옥하의 객관에서 병사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양의 구천사(龜川祠)에 제향되었다.
 
6)하맹보(河孟寶, 1531~1573)
본관은 진주, 자는 대재(大哉)이며, 호는 우계(愚溪)이고, 아버지는 활(活)이다. 노진(盧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의리에 참신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상중에 시묘하며 죽만 먹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피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독자독손(獨子獨孫)을 보내어 호종하게 하였다.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광해군 8년(1616)에 효자로 정려되었고, 숙종 27년(1701)에 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7)양홍주(梁弘澍, 1550~1610)
그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대림(大霖)이며 호는 서계(西溪)이다. 아버지는 참판 희(喜)이다. 학문이 높고 행의가 독실하였다. 젊어서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만년에는 성혼, 김장생과 도의(道義)로써 교분을 맺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성일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아들 황(榥)의 건의로 가재를 팔아 많은 화살을 배에 싣고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왕에게 바쳐 이듬해의 평양 탈환전에 사용했다. 선조 28년(1595)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경기전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어 잠시 근무하다가 곧 사임했다. 선조 36년(1603)에 권간(權奸)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 대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숙종 대에 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복원된 현재의 서원 건물은 서원의 일반적인 공간 구성에는 미흡하다. 정문인 청순문(淸純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ㄷ’자 형으로 된 강당건물이 있고, 그 밖에 다른 건물은 없다.

1794년(정조 18)에 정진승(鄭鎭昇)이 쓴 <구천서원기>가 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