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백수회(白受繪, 1574~164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경상남도 양산 출생. 부여 백씨(扶餘白氏)지만, 그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고, 또한 병화(兵火)로 그의 보첩(譜牒)을 잃었기 때문에 가계(家系)가 분명하지 못하며, 언제 양산에 옮겨 정착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가 일본에서 풀려나 돌아와 증조대(曾祖代)로부터 중시조(中始祖)를 잡아 새로 가첩(家牒)을 이룬 것 같다.
10대 초반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장했으나 학행(學行)에 힘썼고, 어렸을 때부터 지기(志氣)가 남들에 비해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68년에 걸친 생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국내 정세의 불안으로 평탄하지 못하였다.
19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발발해 왜군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거기서 9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지만 고국에 대한 지절(志節)을 굽히지 않아 오히려 왜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포로 생활의 고독한 심사를 시편이나 가사로 짓다가 27세 되던 해 석방되어 환국하였다. 당시 세인들은 그의 지조를 기려 그가 머물던 가자방리를 가리켜 백의사리(白義士里)라고도 했다.
그 뒤 약 14년 동안은 외부와 단절하고 아무런 교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40세 되던 해 조정에서는 광해군의 폐모 사건으로 의론이 분분할 때 그에 분연히 반대하는 등,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여러 번 상소해 맹렬히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점차 명사들과 교유의 길이 트이고 잠시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후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그러나 1628년(인조 6) 상소를 한 것이 각하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 후, 후학의 교육에 힘썼으며 둔세절교(遁世絶交)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현종이 호조참의에 추증하고, 옛 집에 충렬사(忠烈祠)를 지었으며, 숙종이 편액을 하사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왜군에 포로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지은 5편의 한시와 가사를 남기고 있다. 가사 4수는 <도대마도가 到對馬島歌>·<재일본장가 在日本長歌>·<단가 短歌>·<화경도인안인수가 和京都人安仁壽歌>로서 우국충정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박인로(朴仁老)의 가사들과 함께 임진왜란기의 가사 문학 공백기의 맥을 이어주었다는 국문학사적 의의와, 적지에서 불굴의 우국충정을 노래했다는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