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이정(李楨, 1512~157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맹주(孟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번(以蕃)이고,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담(湛)이며, 어머니는 진주 정씨(晉州鄭氏)이다.
1536년(중종 31)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을 거친 뒤 연로한 부모 봉양을 위해 경상도 선산부사로 나갔다가 1552년(명종 7) 사성, 이듬 해 청주목사를 지냈다. 이 때 선정을 베풀고 효행이 뛰어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었다.
1555년 왜구가 호남성에 침입하자 군기를 엄정히 해 구원하러 가자 그 위엄에 눌려 왜구들이 도망하였다. 1559년 우부승지·형조참의·좌부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의·대사간·호조참의·예조참의를 지내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옛 신라의 열왕묘(列王墓)를 보수하고, 서악정사(西嶽精舍)를 세워 후진 교육에 힘썼다.
1563년 중앙의 요직에 잠시 있은 뒤 다시 전라도 순천부사로 나가 갑자사화 때 사사된 김굉필(金宏弼)을 위해 경현당(景賢堂)을 건립, 그를 제사하게 하였다. 1568년(선조 1)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지어 동쪽에는 거경재(居敬齋), 서쪽에는 명의재(明義齋)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어릴 때 송인수(宋麟壽)로부터 배우고 성장한 뒤에는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성리학에 밝았다 한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구암문집≫을 비롯해 ≪성리유편 性理遺編≫·≪경현록 景賢錄≫·≪논상례 論喪禮≫·≪한훤보록 寒暄譜錄≫·≪열성어제 列聖御製≫ 등이 있다.
2)김덕함(金德諴, 1562~16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 형(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장수(長琇)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홍(洪)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었으나 스스로 문예에 힘써 1587년(선조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다시 진사가 되었으며, 158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이항복(李恒福)의 후원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延安)에서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듬 해 행재소인 정주까지 왕을 호종, 그 공으로 공조좌랑이 되었다. 1594년 임시로 군공청(軍功廳)을 세워 전쟁의 공과를 실시할 때 비변사낭청을 제수받았다. 이 밖에 예조와 공조의 좌랑과 비변사낭청·호조정랑·직강·사예 등의 중앙관직과 선천·청풍·단천·성천·장단·안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597년 일본의 재침으로 분조(分曹)가 세워지자 호조정랑으로서 분호조정랑(分戶曹正郞)을 겸임해 군량 조달에 힘썼다.
광해군 때 군기시정에 이르렀으나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정홍익(鄭弘翼)의 의견을 좇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으며, 명천·온성·사천 등지에 이배되었다.
1622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집의와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의와 승지·부제학·대사성·대사간·여주목사·춘천부사를 거쳐 1636년 대사헌에 올랐다. 이 때 왕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김공량(金公諒)의 신원을 반대해 인조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號召使)로 활약했으며 청나라에 대한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청백리로 뽑혔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성옹유고≫가 전한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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