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이견간(李堅幹, ?~1330)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직향(直鄕), 호는 국헌(菊軒)이다. 벽진장군 총언의 둘째 아들인 영(永)의 9대손으로 고려 24대 원종 때(1259~1274)에 나서 1330년(충숙왕 17년)에 돌아갔다. 선생은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굉박(宏博)하여 중국의 주(周)나라 예악(禮樂)에 밝고 당(唐)나라 풍조의 문장에 능하여 그 당시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명(詞命 : 왕의 말과 명령)을 맡아보기 20년에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문장이나 풍채를 모두 우러러 보았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나라의 태학사(太學士) 주방(周肪)과 같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할 때, 주방이 자리에서 내려가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의 큰 선비로 삼한(三韓)의 문화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하고 , 선생을 극구 칭찬하며 종이 상전을 대하듯 하였다.
고려의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忠肅) 3조에 벼슬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문관사(弘文館事)에 이르렀다. 원나라 황제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선생이 살고 있는 곳을 물음에 호음실(好音谷)이라 하며 그 그림을 그려 바치니 이것을 황제가 보고 명(椧)자를 새로 만들어 내리니 이로 인하여 호음실이 지금의 성주 초전면 홈실(椧谷)이 되었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 : 고려말 두문동 의사로 학자)이 “고려 중엽에 많은 선비중 유학자(儒學者)의 도를 실천한 이는 유독 좨주 우탁(祭酒 禹倬), 문안 이견간(文安 李堅幹), 문충 이제현(文忠 李齊賢) 등 몇 사람 뿐이다. 우탁의 주역(周易)과 이견간의 춘추(春秋)는 비록 옛날 중국의 한(漢)나라, 진(晋)나라의 전문가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며, 이견간, 이제현은 그 인품이 매우 고결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이 가히 육선공(陸宣公 : 8세기 후반 당나라의 한림학사) 육지(陸贄)와 짝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성주의 문곡서원(汶谷書院)과 밀양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무덤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청계산(靑溪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실전(失傳)되고 후손이 성주 초전 홈실에 단(壇)을 모으고 문곡서당(汶谷書堂)을 세워 매년 한식(寒食)날 제사를 받든다. 또 홈실에는 선생이 살던 옛 집터가 있어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세워졌다.
2)이사지(李思之)
고려(高麗)의 충신(忠臣)으로 호(號)는 여은정(麗隱亭), 견간(堅幹)의 현손(玄孫). 공양왕(恭讓王) 때에 중랑장(中郞將)의 벼슬을 지내고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을 소탕하는데 공(功)을 세웠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지니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72현(賢)과 함께 송도(松都) 동남현(東南峴)에 올라가서 조천관(朝天冠)을 걸고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모두가 절의를 지키며 수차에 걸친 조선조(朝鮮朝)의 벼슬을 거절하였다. 말년을 관악산중(冠岳山中)에서 보냈다.
3)이중림(李仲林)
이사지의 아들로서 세종 조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그 아버지가 두문동에 자취를 감추면서, “나의 뜻은 이미 정해졌거니와, 너는 배움을 넉넉히 하여 본조에 벼슬하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하였는데, 그는 이 말을 따라 학문을 하고 벼슬을 하였다.
4)이식(李軾)
조선의 무장이다. 자(字)는 자첨(子瞻), 호(號)는 동파(東坡), 성산군(星山君) 사지(思之)의 증손(曾孫), 천자(天資)가 청분(淸芬)하고 일찍이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훈련부장(訓鍊副正)에 이르고 1504년 (연산군 10) 갑자(甲子) ‧ 을축(乙丑) 양년간에 연산군의 학정(虐政)이 극에 달함을 보고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뜻을 받들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대왕(中宗大王)을 세웠다. 신부인(愼夫人)을 왕비(王妃)로 책봉하고(중종 1) 9월 2일 정국훈(靖國勳) 107인중 자첨(子瞻)은 26차(次)로 성산군(星山君)에 훈봉(勳封)되었다. 1520년 신진사류(新進士類)가 남곤(南袞)등에 의해 화(禍)를 당하자 통정가선대부(通政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놓고 물러나 밀양(密陽)에서 우거하다가 낙동강변에 고강정(高江亭)을 세우고 편안함을 즐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