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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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갈천서원(葛川書院)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갈천리 1146
   이 암(李 嵒) 이 교(李 嶠) 노 필(盧 㻶) 어득강(魚得江)
   1712년(숙종 38)
   
   3월 상정(上丁)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호(1983.07.20지정)
고려시대 문신인 이암(李嵒)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갈천서원은 고려 공민왕 때 회화면에 ‘금봉서원’으로 세웠는데, 1712년(숙종 38)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고 ‘갈천서원’이라 하였다. 1869년(고종 6)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고, 광복 후 유림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이암(李嵒, 1297~136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侅).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監察大夫世子元賓)인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이다.
1313년(충선왕 5)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충선왕이 그의 재주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서성교감(祕書省校勘)에 임명된 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올랐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해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섬으로 유배되었다.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知申事)·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충혜왕이 전교부령(典校副令)에 무인 한용규(韓用規)를 임명하자 이를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로 제수되어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지만,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공평하지 않게 처리한다고 왕에게 진언했으나 이로 인해 밀성(密城 : 밀양)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서자 저(邈 : 뒤의 충정왕)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정방의 제조에 임명되는 한편,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으며, 그 뒤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 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 겁이 많아 도원수로서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으로 교체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에 쳐들어오자 왕을 따라 남행(南行)했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 필법은 조맹부(趙孟頫)와 대적할 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우왕 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이교(李嶠, ?~136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모지(慕之), 호는 도촌(桃村). 판밀직사사감찰대부(判密直司事監察大夫) 존비(尊庇)의 손자다. 원나라의 금부(金符)를 받고 만부장(萬府將)이 된 판삼사사(判三司事) 박지량(朴之亮)의 외손이고,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이며, 충혜왕의 배향공신인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의 사위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1357년 형부상서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0년 어사대부로서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그의 가문은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문벌세가)일 뿐 아니라 조선건국과 함께 중추적 세력으로 영입된 세력가로서 조선의 명족이 되었다.
 
3)노필(盧㻶, 1464~15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초명은 조동(祖同), 자는 공서(公瑞), 호는 묵재(墨齋). 고성(固城) 출신. 아버지는 사간(司諫) 선경(善卿)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성봉조(成奉祖)의 손녀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당초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학문에만 전념하며 안우(安遇)·유호인(兪好仁)·강흔(姜訢) 등과 교유하였다. 중종이 거듭되는 천재(天災)로 일사(逸士)를 천거하도록 각 도관찰사에게 명하자 학행이 뛰어나 1508년(중종 3), 1510년 두 차례에 걸쳐 천거되기도 하였다.
1518년(중종 13)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은 우의가 돈독하고 불순함이 없으며 고인(古人)의 법에 따라 행동, 유림들의 추앙을 받음 등을 들어 그를 천거하매 6품직에 특채되었다. 그리하여 내섬시주부·장흥고령(長興庫令)·지평을 거쳐, 1519년 공조좌랑을 역임한 뒤, 경상도도사로 재직 중 기묘사화 때 김안국의 일파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고향인 고성에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538년(중종 33)에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가 풀림)되어 직첩을 환급받았다.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 고성의 갈천서원(葛川書院)에 제향되었다.
 
4)어득강(魚得江, 1470~155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순(子舜). 호는 자유(子游)·관포당(灌圃堂)·혼돈산인(渾沌山人). 할아버지는 효원(孝源)이며, 아버지는 문손(文孫)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가 되고 1496년(연산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곡강군수(曲江郡守) 등 외관직을 거쳐 1510년(중종 5)에 장령(掌令), 1518년 헌납(獻納), 1521년 교리(校理), 1529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1549년(명종 4)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상호군을 사직한 뒤 벼슬을 하지 않고 경상남도 진주에 물러나 살았다. 문명(文名)이 있고, 특히 농담을 잘하였다. 저서로는 ≪동주집 東洲集≫이 있다. 고성의 갈천서원(葛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우, 강당, 내삼문과 정문인 불사문이 있다. 강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불사문은 앞면 5칸·옆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고성군지, 1995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