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서원 중수기
청주경씨의 시조는 평장공 휘 진(珍)이요, 그 아들은 대장군 대승(大升)이다. 일세조(一世祖)가 휘 번(蕃)이며, 그 증손 휘 복흥(復興)은 고려조 벼슬이 문화시중에 이르렀고, 봉호는 청원부원군이며, 시호는 정렬이시다.
그 아들 휘 의(儀)는 조선초 청백리로 서북면 병마도절제사 겸 평양윤을 지냈고, 시호는 순절이며, 대대로 명공거경이라. 본 덕천서원은 위 두 분(청원부원군 정렬공과 그의 아들 순절공)의 빼어난 충절과 학덕을 기려, 영남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순조 11년 신미년(서기1811년)에 창건하여 배향하여 오다가, 순조 32년(서기 1832년)에 강당을 세워 면모를 일신하니 윤환증색이라. 사림(士林)들이 모여 시문(詩文)을 강학(講學)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오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은 훼철되고, 위패는 매안(埋安)하였으며,
강당만 외롭게 남아 자손들이 모여 매년 향화승전하여 왔으나 세구연심으로 풍마우세하여 남은 건물마져 심한 퇴락으로 도괴지경에 이르매 거창지역의 뜻있는 사림들과 문중 종친(거창지회장 경정호, 종원 경춘석)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전국 중앙종친회(회장 경호현,총무 경지호)에 건의하여 대종회의 지원을 받아 임오년(서기2002년)에 중수하니 영수무궁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임오년 (서기 2002년) 12월 20일
청주경씨 중앙종친회 회장 경호현
안의 덕천서원 강당 상량문
계림(桂林)에 염옹(溓翁)의 묘(廟)를 세워 많은 선비들이 감추어 닦는데 떳떳함이 있었고,
무안(婺安)에 정씨(程氏)의 사당을 세워서 여러 생도들이 강(講)하고 익히는 자리를 얻었으니
동서(東西)에 재사(齋舍)가 있어서 겨울과 여름에 시서(詩書)를 가르쳤다.
엎드려 생각건대 덕천사(德泉祠, 則德泉書院)는 우리 선조인 정렬공(貞烈公)과 순절공(順節公)의 영혼을 편안히 모시었으므로
우리 선비들과 그의 후손들은 천년 뒤라도 백대 후에라도 묘우(廟宇)를 바로 의논하여 엄숙하게 정제하여야 할 것이다.
향기롭고 꽃다운 향을 피워 올리는 데는 차례로 인연되는 일이 매우 힘겹고 외로웠다.
그리하여 원(院)의 모양을 너그럽고 넓게 이루지 못하고, 띠 풀과 가시 풀도 깍지 못하였다.
두어 칸 집을 처음 지을 적에는 활처럼 휘어진 땅을 겨우 잡아 담장을 높이 쌓았으며,
제기(祭器)를 갖추어 밝게 제사(祭祀)지냈으니 쟁쟁한 선비로서 믿고 우러러 볼만한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서이다.
때로는 거문고와 노래를 익히는 듯 하였으나 옥을 차고 옷깃을 펼 수는 없었으니 이는 처음에 협소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마침내는 반드시 규모를 크게 하여 선철(先哲)의 법도를 우러러 보고 모두 다 자랑스러운 격식의 길을 지키며, 후학(後學)이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강당(講堂)을 열기로 하였다.
옛 부터 경영하여 얼마의 세월이 지나 지금까지 처음 집짓기에 알맞은 운이 모인 터를 잡았다. 그리하여 이곳 원악(猿嶽)의 가장 이름난 구역에다가 거의 녹동(鹿洞)의 남긴 제도를 본받아서 산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로 경치 좋게 하고 운수는 별과 같이 하였으며, 번개같이 이곳 저곳 달려 재목을 나르고, 도끼와 자로 옥과 같이 갈고 쇠를 불리듯 깎고 다듬었으며, 곧고 굽은 것은 좋고 나뿐 재목으로 쓰고, 들보의 채색은 대개 여러 예(禮)를 취하였으며, 문지방과 빗장은 정성껏 하고, 기둥과 사당집은 한가롭고 조신하게 모퉁이를 구부려 휘게 하였다.
집과 방이 또한 넓어져서 넓게, 그리고 편안하게 거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오륜(五倫)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 가르침을 세워 이미 어진 선비를 기르는 것은 이에 군자로서 크게 되게 하는 바이다.
여러 공원들이 말하기를, <이미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꾀하고 생각하고, 때를 맞추었으며, 여러 무리들이 힘써 일에 나아갔으므로 신(神)의 도움과 공경과 축하함을 얻은 것 같으니 몇일 안가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푸른 기와가 올망졸망하고, 달무리처럼 날으듯 들보를 채색하였으니, 물을 떠난 하늘이 무지개 뻗치듯 늘어지게 거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은밀하고 가깝게 오르고 내리는 뜰에서는 시를 읊고 노래하며 도의(道義)의 학문을 고기 굽듯 맛있게 배우고, 그 옛날 신돈(辛旽)을 물리친 옛 역사를 상고하여 행한다면 그 누가 도를 지키지 않고 간사함을 열겠는가?
이는 조촐하고 가난함에 섰기 때문에 하루걸러 마다 돌아가면서 탄식하는 것을 미워하게 한다.
봄바람이 화창할 때에는 의젓하게 앉고 거닐면서 멀리 구경하고, 또 계곡과 산의 경치 좋은 데가 많으니 놀고 헤엄치며, 사색에 잠겨서 성현과 더불어 같이 돌아가기를 기약하노라.
<이제 길한 날과, 좋은 날에 삼가 고기와 술로서 깨끗이 고하고, 우뚝 서서 들보를 올리고 첨하를 내리니 신인(神人)은 함께 기뻐하고 모두 흠향하소서. 늘어지게 들어 올려 대들보를 닦으니 우러러 짧은 창(唱)을 도우소서.>
사내아이가 대들보 동쪽에 크게 던지며 말하기를,
<바야흐로 도(道)가 오르고 기(氣)가 화하여 넓고 넓게 천고(千古)에 있게 하고, 아울러 자연을 화육(化育)하는 공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리고 사내아이가 대들보 서쪽에 크게 던지며 말하기를,
<달이 반 바퀴 밝고 낮게 떠서 잠잠하게 서로 마음을 맺고 전하며 한 조각 얼음병과 같이 맑고 엷은 그림자가 찬 시내를 비추게 하소서.>
또 사내아이가 대들보 남쪽에 크게 던지며
<남쪽 가까운 하늘빛이 푸르기 쪽빛 같고, 넓기는 저 명나라 서울 같이 다 우리를 활달하게 하며, 신기(神氣)와도 같이 뜻이 허(虛)하여 오래 즐기도록 하소서.>
그리고 사내아이가 대들보 북쪽으로 크게 던지며,
<별이 총총하게 헤아릴 수 없이 사방에 떠 있도다. 길게 뻗치듯 별과 해와 달을 배우지 않음이 없게 하소서.>
또 사내아이가 대들보를 크게 위로 크게 던지며,
그리고 사내아이가 대들보 북쪽으로 크게 던지며,
<별이 총총하게 헤아릴 수 없이 사방에 떠 있도다. 길게 뻗치듯 별과 해와 달을 배우지 않음이 없게 하소서.>
또 사내아이가 대들보를 크게 위로 크게 던지며,
<창창한 원기(元氣)를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하고, 아울러 높고 밝은 내 심성(心性)으로 항상 있게 하고, 또 기르도록 하소서.>
또 사내아이가 대들보를 아래로 크게 던지며
<우리 어리석은 무리를 열어 착하게 하기를 멀리서 가깝게, 얕은 데서 높은 데로 배우는 계급을 큰 집과 같이 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上樑)한 뒤에는 우리 글방을 도와서 이 터전을 굳게 다지고,
봄에는 석채(釋菜)와 가을에는 석전(釋奠)의 제사를 정결하게 해마다 항상 변함없이 지내고, 밤낮으로 더욱 공부를 잘하여 날마다 나아가게 하며, 그리하여 예를 이룩하고 시를 세우고 흥을 일으켜서 대대로의 유풍을 다시 떨치게 하여 집집마다 거문고며, 호호마다 글을 읽어서 이 글의 아름다운 운수를 창성하게 할지로다.
숭정(崇禎)넷째임진년(서기1832년)3월상한(上澣)
정렬공(貞烈公) 16대손 한성(翰星) 삼가 짓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