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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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염의서원(廉義書院)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723
   최치원(崔致遠), 고 경(高 慶), 고용현(高用賢)
   1665년(명종 을축년)
   1804년(순조 4)
   음력 9월 중정(中丁)
   군산시향토문화유산 제5호
염의서원은 조선 1665년(명종 을축년)에 창건되어 1804년(순조 4)에 사액된 서원으로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최치원(崔致遠, 857∼? )
신라 하대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또는 本彼部)출신.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또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 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다.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이 있었다.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과 ≪석이정전≫·≪석순응전≫·≪사산비명 四山碑銘≫ 등이 있었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상비명≫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원문(願文)·찬(讚) 등 그 편린만이 전한다.
글씨도 잘 썼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그리고 전해오는 많은 설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집 愼獨齋全集≫에 실린 <최문헌전 崔文獻傳>이 있다.
 
2)고경(高慶, 1276~1342)
고경은 1276년(충렬왕 2)에 이 고장에서 태어나 1324년(충혜왕 3) 이 고장에 묻혔다. 그는 다섯 살에 능히 시부(詩賦)를 지었고,열두 살에 논어를 외우니 당시에 옥산의 신동이라 하였다.
그 경력을 살피면 1292년(충렬왕 18) 16세에 친명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니 원나라 군사에 쫓기어 강화도로 옮기었던 정부가 겨우 환도한 터이라 인재를 등용하는 정식 과거시험을 치를 형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1297년(충렬왕 23) 21세 여름에 문하성사, 1299년에 강원감사, 다음해 가을에는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1304년 28세에는 집현전 태학사, 문하시중을 두루 겪었고, 1309년(충선왕 1) 33세에 익대원훈(翊戴原勳)이 되었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 대단히 화려한 일생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원나라의 침공 이후 백성의 경제생활은 말이 아니었고, 충령·충혜·충목·충정·공민왕은 원나라의 공주를 정비로 삼아야 했다. 몽고류의 직제·직명이 생기고 몽고풍의 생활양식으로 변발호복으로 바뀌어 나라꼴이 변태스러움은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나라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었던 고경은 1320년(충숙왕 7) 44세에 고향인 옥산에 돌아와 낮에는 이웃과 더불어 논밭을 갈아 경제생활에 주력하도록 하고 밤에는 틈을 내어 국가 경륜의 도리와 성현의 학을 닦았다. 23년이 지나 67세로(1342년) 세상을 뜨니, 이웃을 물론 각지에서 그의 덕행과 학문을 추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3)고용현(高用賢, 1302~1368)
고려 후기의 문신. 충숙왕 때 총신 김지경(金之鏡)과 함께 전주(銓注)를 맡기도 하였으나 왕을 배반하고 충혜왕의 즉위에 공을 세워 대사성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충숙왕이 복위하자 배반한 죄로 투옥,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뒤 1357년(공민왕 6) 개성윤(開城尹)으로 복관되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손등(孫登)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전라도진변사(全羅道鎭邊使)로 나가 당시 한주(韓州)와 진성창(鎭城倉)에 침구해온 왜구의 약탈에 대비하였다.

이 서원의 본전인 한림사는 정면 3칸, 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이 지역에 연고를 가지고 있는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과 문충공 고경(文忠公 高慶), 문영공 고용현(文英公 高用賢) 등 세 사람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거인문(居仁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내삼문의 왼편이 있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경부당(敬敷堂)의 사각기둥에는 오륜을 판각한 편액을 걸어 놓고 있으며, 문 위에는 각종 중수기현판이 걸려있다.
한림사 왼편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된 유허비각이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래는 이곳에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 비각에 세워진 비는 방형좌대 위에 사면 비신을 세우고 거개형(居蓋形)의 이수(螭首)를 갖춘 비로서 상단에 「文忠公文英公兩世高先生遺墟碑」「朝鮮開國五百四十年乙卯季春下澣」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15년 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사당 오른편의 어필각은 1915년 순종황제가 내린 친필의 어필을 새겨 안치하고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