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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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치동서원(淄東書院)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오곡리
   전 횡(田 橫)
   1926년 둔율리에 건립
   
   三月 季丁日
   비지정문화재
치동서원은 중국의 제나라 국왕전횡(田橫) 고려말 문장과 절의) 중신으로 담양 전씨(田氏) 중시조)이신 삼은선생(三隱先生) 봉안되어 있고 해마다 춘추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전횡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 국왕이었는데 ()에게 패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자 신하 오백명을 거느리고 동해로 건너와 고동(孤島), 지금의 어청도(於靑島 은거 피신하였다.이때 한나라 유방이 중국천하를 통일하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뿌리치고 스스로 자결)하니 부하 오백명도 따라 자살하였다.그후 고도(孤島) 사람들이 전횡왕의 숭고한 절의를 숭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드리고 있다.지금도 어청도에 있는 사당에는 자손을 원하거나 길운을 바라는 사람들이 기원을 하고 있다.그후 고도(孤島) 사람들이 전횡왕의 숭고한 절의를 숭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드리고 있다.지금도 어청도에 있는 사당에는 자손을 원하거나 길운을 바라는 사람들이 기원을 하고 있다.

1926
丙寅(병인) 群山市(군산시) 沃淸郡(옥청군) 潭陽田氏(담양전씨) 宗中(종중) 決議(결의) ()하여 다음해 丁卯(정묘) 群山市(군산시) 西興洞(서흥동) 淄東廟(치동묘) 창건하고 田橫王(전횡왕) 影幀(영정) 位牌(위패) 奉安(봉안)하고 매년 九月 季丁(계정)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후 1951 辛卯(신묘) 高麗末(고려말) 文章(문장) 節義(절의) 道學(도학) 崇高(숭고) 明賢(명현) 隱(전야은) 隱(전뢰은) 田耕隱(전경은) 三先生(삼선생) 追配(추배)하여 儒林(유림) 의하여 제사 지내게 되었다.
그후 1951 辛卯(신묘) 高麗末(고려말) 文章(문장) 節義(절의) 道學(도학) 崇高(숭고) 明賢(명현) 隱(전야은) 隱(전뢰은) 田耕隱(전경은) 三先生(삼선생) 追配(추배)하여 儒林(유림) 의하여 제사 지내게 되었다.
1984 甲子(갑자) 치동묘가 도시계획에 저촉되어 沃淸郡(옥청군) 沃淸邑(옥청읍) 五谷里(오곡리) 移建(이건)하면서 왕을 모시는 淄東廟(치동묘) 三隱先生(삼은선생) 모시는 淄東書院(치동서원) 구별하여 講堂(강당) 三門(삼문) 東西齊(동서제) 따로 대규모로 넓혀 새로 건립했다.
건립비는 도시계획에 따른 보상금과 종원들의 협찬금으로 했다.
享祀日(향사일) 九月 季丁日(계정일) 三月 季丁日 改正(개정) 享祀(향사)하고 있다.
 
 

1926
丙寅(병인) 群山市(군산시) 沃淸郡(옥청군) 潭陽田氏(담양전씨) 宗中(종중) 決議(결의) ()하여 다음해 丁卯(정묘) 群山市(군산시) 西興洞(서흥동) 淄東廟(치동묘) 창건하고 田橫王(전횡왕) 影幀(영정) 位牌(위패) 奉安(봉안)하고 매년 九月 季丁(계정)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후 1951 辛卯(신묘) 高麗末(고려말) 文章(문장) 節義(절의) 道學(도학) 崇高(숭고) 明賢(명현) 隱(전야은) 隱(전뢰은) 田耕隱(전경은) 三先生(삼선생) 追配(추배)하여 儒林(유림) 의하여 제사 지내게 되었다.
그후 1951 辛卯(신묘) 高麗末(고려말) 文章(문장) 節義(절의) 道學(도학) 崇高(숭고) 明賢(명현) 隱(전야은) 隱(전뢰은) 田耕隱(전경은) 三先生(삼선생) 追配(추배)하여 儒林(유림) 의하여 제사 지내게 되었다.
1984 甲子(갑자) 치동묘가 도시계획에 저촉되어 沃淸郡(옥청군) 沃淸邑(옥청읍) 五谷里(오곡리) 移建(이건)하면서 왕을 모시는 淄東廟(치동묘) 三隱先生(삼은선생) 모시는 淄東書院(치동서원)

1)전횡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 주민들에게는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에 대해 전횡장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원래 역사적으로 전횡은 적현(狄縣, 지금의 山東 高青) 출신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칠웅(七雄) 가운데 하나였던 제(齊)의 종실(宗室)인 전씨(田氏)의 일족(一族)이다. 진(秦) 말기인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BC 208)과 오광(吳廣, ?~BC 208)이 반란을 일으켜 장초(張楚)를 세우자, 형인 전담(田儋), 전영(田榮)과 함께 진(秦)에 반기를 들고 제(齊)를 다시 일으켰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 BC 247?~BC195)이 천하를 평정하자 빈객(賓客) 5백여 명과 함께 지금의 산동성 청도의 전횡도(田横島)에 숨어 살았지만, 한(漢) 조정(朝廷)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가던 중에 포로가 되어 한왕(漢王)을 섬겨야 한다는 부끄러움에 자결하였다. 그의 죽음을 들은 빈객(賓客) 5백여 명도 자결을 하였고, 그들은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라 하여 후대(後代)에 그 의기(義氣)가 높이 숭앙(崇仰)되었다. 
그러나 어청도에는 전횡 장군이 500명의 빈객들과 숨어산 곳이 중국의 산동성 옆에 있는 전횡도가 아니고, 바로 이 섬 어청도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고대 중국의 제왕 계씨인 전횡(田橫)이라는 장군이 재상에서 오르자 한고조(漢高祖)가 초항우(楚項羽)를 치고 천하를 통일하자 (BC.202)패왕 항우가 자결하는 것을 보고 전횡이 망명길을 올랐다.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돛단배를 타고 서해로 목적지 없이 떠난 전횡은 중국을 떠난지 3개월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발견한 날은 쾌청한 날씨였으나 바다 위에 안개가 약간 끼어 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나자 전횡을 비롯한 군사들이 큰 함성을 내며 기쁨에 어쩔 줄 모르는 순간 전횡이 이곳에 배를 멈추도록 명령을 하고 푸른'靑' 자를 따서 於靑島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전설처럼 내려져 오고 있다.
그 후 전횡은 싣고 온 식량이 모두 떨어지자 어청도 앞 바다를 오가는 군량미를 운반하는 선박을 보면 군사성이라는 산 위에 올라가 쇠로 만든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수송선박이 어청도로 대피하도록 하여 군량미를 탈취. 식량을 이어나가기를 몇 년 동안 계속하자 중국의 왕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전횡을 불러 들였으나 전횡이 명을 거역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살게 된 사람들이 백제시대 우루왕 13년에 치동묘라 이름하여 마을뒤쪽에 사당을 짓고 주민들이 당산이라 부르며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이면 부락주민이 온갖 정성을 모아 1년 간 재앙을 몰아내고 안위와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는 미신타파를 외치는 신세대에 밀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 
또한, 충청남도(忠淸南道) 보령시(保寧市)의 외연열도(外煙列島)에서도 이와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외연열도에서는 전공사(田公祠)에 전횡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청도와 다르게 아직도 당제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외연도 전횡 장군제 (田橫 將軍祭)
보령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외연도에서 400년을 이어온 '풍어당제'가 열렸다. 외연도(外煙島)는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중국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떨어져 있으며, 해무가 섬을 감쌀 대가 많아 연기에 가린 것처럼 보여 이름 붙여졌다. (일각에서는 섬의 왼편이 높은 지형이어서 왼편도라 불리다 외연도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외연도에는 기원전 200년경 제나라 전횡장군이 한나라가 들어서자 당시 반야도(외연도의 옛 지명)로 부하 500여명과 함께 망명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중기 이후 약 400여년동안 이 전횡장군을 기리는 '외연도 풍어당제' 이어져 오고 있다.
외연도 풍어당제는 당초 해초 채취 등으로 수입이 좋은 음력 4월, 햇곡식과 햇과일이 나는 8월, 한해를 마무리하는 동지 등에 전횡장군에게 제를 지내며 풍어를 기원했던 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음력 정월 보름으로 바뀌었다가 지난해부터는 육지 등에 나가 있던 주민들이 많이 들어와 있고 일기도 좋은 음력 2월 보름을 기준으로 당제를 지내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시작된 외연도 풍어당제는 산신에게 드리는 산신제, 전횡장군 사당에 올리는 당제, 바다로 나가 제를 올리는 풍어제, 용왕제, 농악놀이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당제의 신인 전횡장군은 외연도를 비롯한 인근 섬에서 어업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외연도 일대에 전해오는 전설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00년경 중국 제나라 왕의 아우였던 전횡장군은 한나라에 대항하다 패해 부하 수백 명과 함께 당시 반야도 피신했는데 한나라 고조가 "투항하지 않으면 섬 전체를 토벌하겠다"고 협박하자 부하들과 함께 자결했다고 한다.
전횡장군에 대한 기록은 안대진이 1598년에 세운 유격장군 계공청덕비, 1619년 한여현이 지은 호산록(서산읍지), 1936년에 세워진 전공사당기 등에 남아있다.
당제에 바쳐지는 제물 중 특이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위패에 걸치는 한복 3벌로서, 남자 한복 1벌은 전횡장군에게, 여자한복 2벌을 그의 아내와 딸을 위한 것이라 한다.
또따른 하나는 '지태'라 불리는 소다. 소는 육지에서 장배로 싣고와 사당에서 제사 직전에 도살해서 올린다. 제물 중 가장 귀한 것이다. 소가 쓰러지면 소의 생피부터 받는데 이 피는 바다에서 지낼 용왕제와 마을 안땅 고사에 제물로 쓰인다.
당제에 이어 진행되는 풍어제는 오색기가 펄럭이는 선착장에서 진행된다. 제를 올리고 나서 풍어와 어선의 안전을 기원하며 소의 피에 제물을 섞어 바다에 뿌린다. 가장 귀한 제물인 소의 피로 소원성취를 비는 것.
용왕제는 풍악이 신명나게 울리는 가운데 당주인 최돈영씨(75)와 마을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나가 다시 상을 차리고 제를 올린다. 제를 올린 후에는 제사에 사용한 길지에 제물을 싸서 바다에 던지며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퇴송배(띠배)에 음식을 실어 바다에 띠워 보낸다. 이로써 마을의 온갖 액과 귀신들을 바다 멀리 내쫓으며 풍어제의 정점을 이룬다.
한편, 외연도는 지난 2007년 가고싶은 섬으로 선정돼 오는 2010년까지 국비 등 131억원이 투입돼 생태문화체험시설, 정주환경 개선, 해양레저 휴양시설이 들어서는 테마관광지로 조성될 예정이다.
천연기념물 제1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외연도 상록수림에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후박
동백보리밥
팽나무 등 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두개의 동백나무가지가 하나로 이어진 '연리지 사랑나무'는 연인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