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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안성(安省, ?∼142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소목(少目). 자는 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 아버지는 기(器)이다, 고려 우왕 초 진사에 합격하고, 1380년 (우왕 6)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松京留後)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니,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 하고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냈다 한다. 1396년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으로서 현비(顯妃)의 시호를 잘못 지어 축산(丑山)에 유배되고, 1400년(정종 2) 중승(中丞)을 거쳐 지보주사(知甫州事)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강원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뒤에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2)양석하(梁碩廈) 조선전기 학자이다. 자는 지효(支孝), 호는 계은(溪隱), 본관은 남원이다. 성질이 순후하고 지조(志操)가 청결(淸潔)하여1510년(중종 5) 사서역의(四書譯義)로 등제하고 1519년(중종 14)까지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며 세류에 영합하지 않아 배척당하자 성균관에서 나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장응두 등과 유유자적하였다. 남원에 머물다가 장수 계남으로 옮겨 물가에 정자를 짓고 육영(育英)이라 이름 지어 걸고 사람들을 모아 경전을 강론하고 학문에 힘쓰다가 여생을 마쳤다. 3)양성린(梁聖麟) 조선후기의 유학자, 자는 시징(時徵), 호는 양심헌(養心軒), 본관은 남원, 명우(命宇)의 아들이다. 어려서 일찍 학업이 대진(大進)하였고 특히 역학에 밝았다. 1725년(영조 1) 진사에 합격하여 벼슬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마재와 양사재를 창설하여 유학진흥에 힘썼으며 성리학 연구에 전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흠앙(欽仰)하였다. 4)김영갑(金永甲) 조선 후기 서예가, 자는 여수(汝壽), 호는 화음(華陰), 본관은 영산, 석보(碩輔)의 아들이다. 15세에 이미 서예로 널리 알려져 정릉군 이만원이 칭송할 정도였다. 1750년(숙종 31)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는데 태학 유생들이 흠복(欽服)하고 따랐다. 효성도 또한 지극하였다. 5)한인기(韓仁箕) 조선 후기의 효자이다. 자는 덕중(德重), 호는 수우당(守愚堂), 본관은 청주, 태일(台一)의 아들이다. 자질이 영민하고 기품이 단정하였다. 7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상장제례를 예에 어긋남이 없이 하니 보는 이들이 감탄하였다. 묘소가 멀리 떨어진 무주의 태산에 있어 성묘하는데 늘 두 마리의 호랑이가 보호해 주었다 한다. 문장이 뛰어났지만 벼슬에 뜻이 없었고 학문에 전심하였다. 특히 근사록에 심취하여 도학에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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