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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만리(千萬里 1543~ ? ) 천만리는 1543년에 태어나서 13세에 어린나이로 경과시에 합격하여 황제의 후한상을 하사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더니 1571년의 무과시 에서도 또한 장원급제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1575년에 충절사의 임명을 받고 복로에 승진하여 큰공을 세우자 이듬해인 1576년에 황제의 명으로 내의 전부사에 보임되어 궁궐 정비의 중책을 발았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이여송장군을 따라 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정유재란(1597년)때에도 울산(蔚山)싸움에 공을 세우고 싸움이 끝난 뒤에도 조선에 영주하기를 희망하여 조선에 귀하하니 조정에서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또한 훗일에 충장공(忠壯公)이라 시호(諡號)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했으며 30결(結)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下賜)하고, 맏아들 상(祥)은 한성부 좌윤 ( 漢城府左尹) 에, 차남 희(禧)는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 )에 각각 임명 하였다.
그후 숙종(肅宗) 때 왜란 평정의 은혜(恩惠)를 잊지 못하여 명(明)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도 함께 향사(享祀)하도록 했으며 순종(純宗) 때는 가헌(家憲)의 뜻이 담긴 충장(忠壯)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순조때는 고성군 호암서원에 봉안하고 헌종때에는 청도군의 황강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고종때에는 문경군의 노양각, 진주의 만첨각, 안동의 동산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고종 33년 (1896)에는 이곳 금지면에 환봉사를 세웠다. 풍수지리에 능한 이여송 장군이 이곳 고리봉 기슭에 명당을 잡아 안장했는데 이 무덤자리를 풍수지리학에서는 무자 천손지지(無子 千孫之地) 라고 했는데 '아들은 없는데 많은 자손들이 태어나는 묘자리'가 된다. 2) 천상(千祥) 천만리의 아들 천상은 아호를 오헌(吾軒)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아버지 화산군(花山君)을 따라 우리나라에 건너와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냈고 벼슬이 오위 도총관(五衛 都總管)에 이르렀다. 3) 천희(千禧) 천만리의 아들로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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