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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연사종(延嗣宗, 1366~1434)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자(字)는 불비(不非)이고,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함흥출신이다. 1388년(고려 우왕14) 요동정벌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를 따라 종군했고, 조선이 건국되자 원종공신(原從功臣)과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록되었으며1401년(조선 태종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이 됐다. 이후 상장군(上將軍), 호조전서(戶曹典書: 정3품. 1405년 판서로 고침) 등을 지내고 곡성군(谷城君)에 봉해졌다. 2)연충수(延忠秀) 임진왜란 시 신경행(辛景行)과 함께 고향인 청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으며, 1593년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 1603년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냈으며 사후 묘소로부터 남쪽으로 10m떨어진 곳에 대사헌 겸 세자 찬선(贊善)을 지낸 민우수(閔遇洙)가 1755년(영조31)에 짓고 정산현감(定山縣監) 채복휴(蔡復休)가 쓴 묘갈명이 세워졌다. 3)연최적(延最績, 1663∼169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 청주 출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택로(宅老)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배속되었다. 그 뒤 감찰에 올랐으나 시사(時事)의 급변으로 사직하고, 권상하(權尙夏)를 따라 학문을 닦았다. 그 뒤 다시 기용되었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었다. 1693년 숙종이 구언교(求言敎:국정에 대하여 신하나 士林들의 직언을 구하는 교시)를 내리자 이에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 입은 자들의 용서를 상소하여,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였다. 다음해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충신문이 세워지고 그 뒤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4)연세홍(延世鴻) 연안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를 역임한 연정열(延井冽)의 7世孫으로 효종(孝宗) 23년(1661년)에 출생하였으며 자(字)는 중진(仲進), 호(號)는 춘하당(春賀堂)이다. 관품(官品)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이다. 이인좌(李麟佐)의 반란(叛亂) 때 창의장군(倡義將軍)으로 관군(官軍)의 도순무사 오명한(都巡撫使 吳命漢)과 함께 반군진압(叛軍鎭壓)에 혁혁(赫赫)한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퇴임후에는 기민구휼(饑民救恤)에 힘써서 향민(鄕民)들의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문중(門中)에서는 금당서원(金塘書院)에 배향(配享)하고 문중4현조(門中四賢祖)로 추앙(推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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