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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전팽령(全彭齡, 1480∼156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숙로(叔老), 호는 송정(松亭). 오례(五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순(孝順)이고, 아버지는 참판 응경(應卿)이며, 어머니는 좌사간 김사렴(金士廉)의 손녀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24년(중종 19)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조와 공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한 뒤, 이어서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성균관사성·통례원우통례·평안평사·단천군수, 삼척과 밀양의 부사를 역임하였다. 1550년(명종 5)에 상주목사로 나가 청렴한 치정을 하여 청백리의 별칭인 염근(廉謹)에 선발되어 통정(通政)에 특승되었다. 1559년에 가선(嘉善)에 승직, 부호군이 되었다. 2)전식(全湜, 1563∼164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팽조(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혼(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여림(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참봉 신(信)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3)전유(全侑) 옥천전씨 시조 환성군 전섭(全聶:전씨의 도시조)의 27세손으로 고려 충숙왕 때 밀직부사, 판도판서, 상호군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관성(옥천)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적하여 옥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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