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벽-김수남(金秀南, 1576~1636)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여일(汝一)이고,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1576년 은진 금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했을 때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사사하였으며 1610(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은거하고 있다가 1624년(인조 2)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피난했으나 적군이 침입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상용과 더불어 남루에서 분사하였다. 후에 승지(承旨)로 추증되었고 본 서원 외에 강화도의 충열사(忠烈祠)에도 제향되어 있다.
2)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성삼문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이 신숙주·박팽년·최항·이개·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집현전학사로서 동참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약하여 1년도 못되어 승하하자, 세종의 손자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의 찬탈을 음모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문종의 고명대신인 황보인·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공신의 호를 내렸으나 성삼문은 기뻐하지 않았다.
1455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강제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며 이 때 예방승지로 있던 성삼문은 국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에도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은 끈질기게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456년 명나라의 사신을 초청하는 환영식의 날을 기하여 상왕(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수립했으나 거사 며칠 앞두고 김질의 변절로 탄로 나고 말았다. 성삼문은 박팽년·이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받았으니 이들이 곧 사육신이다. 이어 아버지 승(勝)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삼고·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맹년·맹종 및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758년(영조 34) 성삼문을 이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하였다.
3)조계명(曺繼明, 1568~1641)
자는 희백(熙伯)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12세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과 더불어 향인(鄕人)들을 거느리고 의병장 곽재우 휘하에 투신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수사(水使) 박엽, 첨지(僉知) 정진철 등과 의병을 조직해 왜병을 누차 격파하여 ‘삼장군’의 칭호를 들었고 나중에는 왜군이 두려워하여 접근을 꺼릴 정도였으며 난이 끝난 후 창의공신(倡義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593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5년에 은진현감을 거쳐 1597년에는 삼척영장(三陟營將)을 지내고 1610년에 김해부사, 양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7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임종 전 자기 가문이 조상 대대로 문명을 떨쳤는데 자기만 무부(武夫)가 되었음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계명은 무예 뿐 아니라 문장에도 조예가 깊어 시문이 출중한 문무겸전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사후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등을 추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