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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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금곡서원(金谷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86번지
   김수남(金秀南) 성삼문(成三問) 조계명(曺繼明)
   1687년(숙종 13)
   
   음력 3월 3일, 9월 9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78호(1984.05.17지정)
금곡서원은 김수남(金秀南)을 주향으로 하고 성삼문(成三問)과 조계명(曺繼明)을 병향한 서원이다. 김수남은 김장생의 족친이자 제자이다. 처음에는 김수남만 독향하다가 후에 성삼문 등을 추향하였다. 본 서원은 처음부터 서원은 아니었고 애당초는 사우로 창건되었다가 나중에 복설(復設)하면서 서원으로 바뀐 듯하다.
처음 서원 건립이 발의된 때는 1682년(숙종 8)이다. 당시 기호사림의 종사이던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이 서원 건립을 발의하였고 노론 거두인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俊吉) 등이 추진하였다. 서원 건립을 주도한 인물들의 면면으로 볼 때 금곡서원의 건립은 기호사림 내지 노론의 강력한 지지 속에 이루어졌으며 내적으로는 광산김씨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지방에는 돈암서원, 노강서원, 죽림서원 등이 있었으나 돈암서원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노론계 서원이 없는 편이었다. 이때는 노론뿐 아니라 소론의 협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을 지을 때 상량문을 지은이는 윤증이었다. 윤증은 소론의 영수였으며 특히 권상하와 더불어 당대의 산림으로 존경받았던 인물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687년(숙종 13)에 은진현 가야곡 조정리에 금곡사가 세워졌다. 그리고 3년 후인 1690년(숙종 16) 김수남의 유풍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781년(정조 5) 성삼문과 조계명을 추배하였다. 이때 성삼문 등을 추배하면서 위차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상적으로 위차를 배치한다면 생존연대로 보나 지명도로 보나 역사적 행적으로 보나 결코 김수남이 성삼문 등을 앞설 수 없다. 아마도 광산김씨의 영향력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686년(고종 5)에 이르러 일시 철폐되었다가 1901년에 단소를 복설하였고 1974년 서원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1)주벽-김수남(金秀南, 1576~1636)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여일(汝一)이고, 호는 만치당(萬癡堂)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1576년 은진 금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했을 때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사사하였으며 1610(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은거하고 있다가 1624년(인조 2)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피난했으나 적군이 침입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상용과 더불어 남루에서 분사하였다. 후에 승지(承旨)로 추증되었고 본 서원 외에 강화도의 충열사(忠烈祠)에도 제향되어 있다.
 
2)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성삼문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이 신숙주·박팽년·최항·이개·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집현전학사로서 동참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약하여 1년도 못되어 승하하자, 세종의 손자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의 찬탈을 음모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문종의 고명대신인 황보인·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공신의 호를 내렸으나 성삼문은 기뻐하지 않았다.
1455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강제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며 이 때 예방승지로 있던 성삼문은 국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에도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은 끈질기게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456년 명나라의 사신을 초청하는 환영식의 날을 기하여 상왕(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수립했으나 거사 며칠 앞두고 김질의 변절로 탄로 나고 말았다. 성삼문은 박팽년·이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받았으니 이들이 곧 사육신이다. 이어 아버지 승(勝)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삼고·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맹년·맹종 및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758년(영조 34) 성삼문을 이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하였다.
 
3)조계명(曺繼明, 1568~1641)
자는 희백(熙伯)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12세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과 더불어 향인(鄕人)들을 거느리고 의병장 곽재우 휘하에 투신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수사(水使) 박엽, 첨지(僉知) 정진철 등과 의병을 조직해 왜병을 누차 격파하여 ‘삼장군’의 칭호를 들었고 나중에는 왜군이 두려워하여 접근을 꺼릴 정도였으며 난이 끝난 후 창의공신(倡義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593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5년에 은진현감을 거쳐 1597년에는 삼척영장(三陟營將)을 지내고 1610년에 김해부사, 양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7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임종 전 자기 가문이 조상 대대로 문명을 떨쳤는데 자기만 무부(武夫)가 되었음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계명은 무예 뿐 아니라 문장에도 조예가 깊어 시문이 출중한 문무겸전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사후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등을 추증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사우가 10평 규모이고 동재인 경모재(敬慕齋)는 15평이며 서재자리에는 10평짜리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내삼문과 외삼문은 각 3평이며 사우 앞에는 단소(壇所)의 흔적이 남아있다.

충노(忠奴) 무작김(無作金)의 불망비(不忘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