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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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안곡서원(安谷書院)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585
   박세희(朴世熹) 박세훈(朴世勳) 홍 섬(洪 暹)
   1666년(현종 7)
   1721년(경종 1)
   9월 5일
   화성시향토유적 제1호(1986.05.20지정)
안곡서원은 1666년(현종 7)에 남양현감 민시중(閔蓍重)이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박세희(朴世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안곡사(安谷祠)를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2년 뒤에 박세훈(朴世勳)을 배향한 데 이어 1679년(숙종 5)에는 홍섬(洪暹)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처럼 선현의 향사 기능만 담당하던 안곡사는 1721년(경종 1)에 안곡서원으로 사액됨으로써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능도 병행하게 되었다. 이어 1729년(영조 5)에는 숙종대 이래 남설 되거나 중첩된 서원에 대한 통제로 훼철되었다.
1740년(영조 16)에 한덕봉(韓德鳳) 등 남양 유생들이 안곡서원은 첩설서원이 아니라고 상소한 끝에 복구되었다. 그러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다시 훼철되었고, 1976년 지역 유림과 문중의 노력으로 사우를 복원하게 되었다. 서원에서는 9월 5일을 기하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박세희(朴世熹, 149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 안의(安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미창(美昌)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화(士華)이며,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515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같은 해에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1517년에 정언에 임명된 후 이조좌랑·충청도도사·장령·홍문관응교를 역임하고, 1519년에 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처음에는 상주로 유배되었으나 다시 강계에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젊어서부터 조광조와 종유(從遊)하였으며, 김식(金湜)·김정(金淨)·김구(金絿) 등과 늘 교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2)박세훈(朴世勳, 1488∼1553)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훈지(勳之), 호는 송촌(松村). 아버지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화(士華)이며, 어머니는 현감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주동의 효아(鑄洞孝兒)’라는 칭송을 받았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부모를 정성껏 받들어 봉양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아버지가 죽자, 남양(南陽)에 있는 무덤 밑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를 하면서 3년 동안 죽만 먹고 애통하게 지내니 고을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을 하였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해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을 하고는 그대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19년(중종 14)에 그의 문명이 널리 알려지자 조광조(趙光祖) 등이 별과(別科)에 천거하였는데,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조정에서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에 임용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홍섬(洪暹, 1504∼158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귀해(貴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泂)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언필(彦弼)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송일(宋軼)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을 지낸 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3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수찬·부제학·경기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552년(명종 7)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듬해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 당하였고,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67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연로한 정승)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으나 남곤(南袞)의 죄상을 탄핵하다 또다시 파직되었다. 1571년(선조 4) 좌의정이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 번이나 중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
흥양으로 유배당하였을 때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 寃憤歌>가 있으며, 저서로 ≪인재집≫과 ≪인재잡록≫이 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서원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근에는 소수의 민가가 위치하여 작은 마을을 이룬다. 건물의 좌향은 서향을 취하고 있고, 건물로는 사당·내삼문·강당·외삼문·홍살문 등이 있다. 사당에는 박세희를 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박세훈과 홍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외삼문을 등진 채 사당을 바라보고 있는데,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협실을 두었다. 내부에는 「안곡서원중건기」와 「안곡서원중건상량문」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서원 옆의 야산에는 상주박씨의 묘역이 있는데, 박세훈의 父인 박사화(朴士華)와 박세훈, 박세희 등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