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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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노강서원(鷺江書院)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산146-1
   박태보(朴泰輔)
   1695년(숙종 21)
   1697년(숙종 23)
   매년 2월 8월 중정일
   경기도기념물 제41호(1977.10.13지정)
노강서원은 숙종 때의 문신 박태보(朴泰輔)를 모신 사당으로, 1695년(숙종 21) 박태보가 죽은 노량진 사육신묘 서쪽 산기슭에 창건되었다. 2년 뒤 조윤벽(趙潤壁) 등의 상소로 ‘노강(鷺江)’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754년(영조 30)에 중건되었다. 1759년에 채경침(蔡景沈)·곽지후(郭之垕) 등 경상도 유생들이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는 도중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는 보살핌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1871년에 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 경기도에서는 12개의 서원·사우가 훼철되지 않았는데, 노강서원도 그 중 하나이다. 이후 1925년 한강 대홍수로 침수 훼손되었으나 그해 중건되었고,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8년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인 장암동 수락산자락에 옮겨 복원하였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5월 5일 기제사(忌祭祀)가 거행되고 있다.

1)주벽-박태보(朴泰輔, 1654∼168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할아버지는 참판 정(炡)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당(世堂)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당숙인 세후(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에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수찬·부교리(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묘 승출(陞黜 : 위패를 새로이 모시거나 있던 위패를 출향시킴.)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 그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
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가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해 주동적으로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를 맺었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조지겸(趙持謙)·임영(林泳)·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해 여러 차례의 상소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했고,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을 세웠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淵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는 ≪주서국편 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사당과 동·서재 외삼문, 고직사 등이 있고 교육장소인 강당은 없다. 건물은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의 구분 없이 외삼문과 맞배지붕의 사당, 동·서재가 좌우 마주보며 같은 영역에 배치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앞에 툇칸을 둔 정면 3칸의 건물이다. 서재에는 박태보를 추모하는 글인 제영(題詠)이 걸려있다. 사당에는 ‘鷺江書院’ 현판이 걸려 있으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익공의 박공집중 건물이며 전면 동측에는 생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