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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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학림서원(鶴林書院)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239번지
   삼괴당 권시민(三槐堂權時敏) 죽헌 조숙(竹軒曺淑) 박약재 강위용(博約齋姜渭龍) 금천 류세홍(金川柳世泓) 원암 곽인(猿岩郭訒) 난곡 우석일(蘭谷禹錫一)
   1780년(정조 4)
   
   매년 음력 4월13일
   
 위천면 황산리 239번지 황산마을 뒤 정안동 어귀에 있다. 서기 1780년에 세워 삼괴당 권시민(三槐堂權時敏) 죽헌 조숙(竹軒曺淑) 박약재 강위용(博約齋姜渭龍) 금천 류세홍(金川柳世泓) 원암 곽인(猿岩郭訒) 난곡 우석일(蘭谷禹錫一)등 육 선생을 병향하였다.
1868년 국령에 의하여 훼철됨에 본당과 사우 등은 파옥되고 전사청만 남아 있다가 뒤에 문간채를 새로 세워 현존한다.
훼철과 동시 향사는 드리지 아니하고 매년 음력 4월13일에 후손들이 모여 회집을 한다.

 
1) 삼괴당 권시민(三槐堂權時敏)
안동 인으로 자는 달이 호가 삼괴 당이라. 서기1464년에 삼가에서 성균 생원 전옥서봉사를 지낸 금석의 아들로 태어나 한 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 서기1483년에 사마시에 등과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행의가 돈독하여 제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또한 서기1498년 무오사화에 괴란이 지나갈 때까지 질서를 견수하였다. 조정에서 세마벼슬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은둔하였다.
선생은 목사 초계인 정종아의 여서로 처향인 사마리로 내려와 그곳에 집을 짓고 뜰에 괴목 세 그루를 심어 삼괴당이라 이름 하였다. 임천에서 요산요수하였으며 강금재 정확계 등과 더불어 강마도의 하다가 서기1523년에 세상을 떠났다. 서기1780년에 사림들이 추증하여 학림서원에 향사하였다.
 
2)죽헌 조숙(竹軒曺淑) 1504년(연산군 10)-1582년(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선경(善卿)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아버지는 조승로(曺承老)는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지냈으며, 문행(文行)으로 천거(薦擧)되어 훈도(訓導)가 된 인물이다. 어머니는 강양이씨 이계보(李季寶)의 딸이다.
어려서 완산(完山) 이연(李蓮)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석천(石泉) 임득번(林得蕃)에게 수학하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문하(門下)에 들어가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김인후는 그에게 《소학(小學)》을 학문의 근본으로 할 것을 일러주었다.
1531년(중종 2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40년(중종 3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후, 저작 박사(著作博士),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전적(典籍) 등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이 되었으며, 1543년(중종 38)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강론(講論)하였다. 이후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지내고,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어 향읍을 교도하는데 치적을 남겼다.
이후 호조정랑(戶曹正郞), 응교(應敎)를 거쳐 흥양(興陽), 영암(靈巖), 광주(光州)의 수령(守令)을 거쳤다. 선조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가, 임천(林泉)에 은퇴하여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퇴계 외에도 노수신(盧守愼), 이윤경(李潤慶), 소세양(蘇世讓), 정유길(鄭惟吉)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3) 박약재 강위용(博約齋姜渭龍)
박약재 강위용은 진양인으로 1558년에 성균관진사를 하였고 학문이 깊었으며 도덕이 장한 유현이다.
박약재 선생 유허비명 병서
오직 이 안음의 사마리는 즉 옛적 박약재 선생 강공의 처음 터로 한바라 선생의 휘는 위용이요 자는 문망이니 강씨는 진양의 거벌이 되어 진사 동와공 삼은 그 아버지시며 개암선생 익과 죽헌공 진은 그의 숙부와 계부이라 선생이 중종 병신년에 났으되 전광을 배태하여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순순히 이어 어긋남이 없으니 개암선생이 항상 가성이 떨어지지 않았더라. 어버이 명으로써 치공 거업을 겸하고 모든 체대를 갖추어 장성하여 사원에 입사된지라. 나이 23세에 무오의 사마(진사)안에 드시고 거의 현책(나라에 올리는 계책)이 실효되지 않은즉 문득 뜻을 돌리어 세상관작에 뜻을 끊으시고 오직 마음과 몸을 위하는 학문인 중용 대학 근사록 등 서적을 갖추어서 생각하고 되새겨 거듭 토론하여 성리의 근원을 정밀히 연구하여 몸과 마음의 사이에 체험하며 또 송나라 어진 이와 우리 동국 선생의 유적에 나아가서 참여 고정하여 마음가짐과 몸의 행함에 요긴함을 구하여 보고 스승의 법도를 나타내었더라. 손으로 기록하고 입으로 외우며 오직 날마다 부지런이하며 힘써 행함을 알며 그 공을 이름을 새기며 일찍 천군전이란 기살ㄹ 지으시어 마음의 묘한 법도를 발휘하니 모두가 깊이 체험하고 묵묵히 근실하여 고인들의 뜻을 얻게 됨이라 임갈천 첨모당 두 현인을 찾아 놀며 또 정역양 성석곡 여러 현인과 도의로 삼을 만한 기록의 자료됨이 많았더라. 그전에 개암공이 남계서원을 창건하던 것을 공이 뒤이어 그 마치지 못하였던 일을 마쳐서 조두의 의례에 성의를 나타내어서 그 현을 높이고 도를 옹위하는 뜻을 이루었다. 사마리에 처음 거함은 석대 아래 학담 위에 재실 짓고 현판을 박약재라 함은 대개 학문은 넓게 하고 예의를 약속함이여 그대의 이름을 불고라 함은 대개 의를 공경하고 덕을 쌓으면 외롭지 않다는 뜻으로 이것을 취함이라 대저 박약의 공부와 경의의 학이 성문의 전해오는 지결이 되어서 선생의 이름과 그 재실과 대 이름이 이에 벗어나지 않은 즉 그 배움의 깊은 점이 진실로 갖춘 바로 생각된다. 선생이 날마다 어진 벗과 오는 제자와 학문을 상고하고 도를 강론하는 것도 여기서 함께하며 벽에 10도를 걸고 8경을 읊음이 수신해서 나가는 뜻이 환하여 스스로 즐거움을 충분하게 얻었더니 아깝다. 천명을 넉넉히 못 빌려 선조 을해에 졸하니 겨우 40이더라. 이때를 당하여 네 아들 면 함 윤 찬이 어리고 여러 조카가 각기 흩어져 있어 남기신 문적을 간수치 못하고 이곳저곳 흩어져 타다가 남은 영사정운이 있으니 『지난날의 전설을 들으면 영계(유영계)가 이 정자를 지었더라 골바람 불어 나무베개 서늘하고 언덕에선 버드나무 못에 들어 푸르구나 춘산에 고운 경치 글로써 잡아보니 밤하늘 밝은 달은 술잔에 가득하다. 오늘의 깊은 정과 즐거운 이 광경을 선현님이 즐겼으니 어찌타 감할쏘냐.』그 나머지는 있을 것이 거의 없으므로 그 고상하신 은표를 고증할 수 없어 말하느니 원통할지라. 그 후에 고을 사람들이 학림원을 세우고 고을의 6현을 모실제 선생도 향사에 강신하시게 함은 가히 덕 있음을 누구나 확신할 수 있고 선생의 의론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세대가 아득히 멀어지고 서원을 나라에서 금항 거둔지 또 오래되어 유풍이 장차 잊으려져도 오직 옛 마을의 석대와 시냇물은 옛 과 같이 그 당시 노시던 발자취를 나타내어 추모케 하고 고을 사람들이 지적하게 되어 후손이 이 대면에 각했으되 오히려 사실의 기록이 없어 그 자취를 표하지 않으면 멀리 오래도록 표시하기 어려움이라 다시 의론하여 그 아래 한 비석을 세워 알리고자 할새 후손이 선생의 조카 도승지 봉람의 지은 행장문을 품고와서 나에게 증하고 말하거늘 내가 선생의 행풍을 일찍 들은지라 능히 사양하지 못하여 이에 감히 지음을 추렸으며 이어 새겨 말하되 선비의 귀함이여 오직 배움에 있도다. 약을 넓히고 의를 공경함이여 이가 적실됨이로다. 선생의 뜻이 이에 있음이여 가르친 바로 가니 자나 깨나 구함이여 이름 이에 있도다. 도가 유유함이여 수레 주축 부러지도다. 뜻은 어찌 길게 함이여 명은 어찌 요사런고 안자의 즐기던 골목이여 오히려 이 땅에 있으니 남기신 자취를 만져 누가 슬퍼않으리오 돌도 넓고 우뚝함이여 같아도 이지러지지 않고 물 많게 쏟아짐이여 흐름도 쉬지 않음이라. 방불하게 나타남이여 선생 뜻과 기질이니 사람에 받춤이 능함이여 들보 쌓아 세우시다. 내가 사연 돌에 새겨 오는 이여 공경할지어다. 무신(1968) 월 일 화산 권용현 삼가지음 연안 이영달 공경히 씀

 
3) 금천 류세홍(金川柳世泓)
1536~1597
자는 심원이고 호는 금천이다. 판관 희필(希畢)의 아들로 중종31년에 함양 안의에서 태어났다. 장성하자 문장이 뛰어나 향시에는 합격하였으나 끝내 경시(京試)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벼슬에 대한 희망을 끝고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였다.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고을을 함락하자 당시 늙은 나이로 안의현감 곽준(郭逡)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로 더불어 굳게 방어하할 것을 기약하고 두 아들을 거느리고 황석산성(黃石山城)에 들어가 적과 맞서 싸우는데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출전대장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코자 밤중에 적병을 끌여들어 온 성중을 유린하니 도저히 막을 계책이 없었다. 적군이 칼을 들어 공을 치자 장자 강(橿)이 몸으로 덮치다가 드디어 부자가 한 칼 아래 죽고 찾자 하는 이에 앞서 어머니를 등에 업고 성을 나가 피하니 동년 8월 18일로 공의 나이 62세 였다. 동계 정온이 고의 전을 지었다.묘소는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석반동에 있다.
 
4) 원암 곽인(猿岩郭訒)
관향이 청주로 그의 호가 원암이다. 서기1563년에 삼가에서 출생하여 15세 때 종숙인 곽회성의 양자로 안음 원학동에 왔다. 천품이 준수하였고, 효성이 남달랐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늙은 양친을 보살피고 봉양하는 그의 효행에 감복함을 금치 못하였다. 특히 양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여러 해를 앓아눕자 주야를 불문하고 그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으며 하늘에 대신하기를 빌었고 상분(변을 맛보아)으로 치료에 정성을 다 하였다. 급기야 상을 당하자 3년간을 피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민(景敏)·경숙(景俶), 호는 원암(猿巖). 문량공(文良公) 곽추(郭樞)의 7세손으로, 15세에 당숙 곽회성(郭懷誠)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부인은 신복기(愼復起)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어질고 순하며 효성스럽고 자애로워 후부모(后父母)를 낳아준 부모처럼 섬겨 임진왜란 중인데도 상례(喪禮)를 충실히 지켰다. 동계(桐溪) 정온(鄭蘊)과 교유하였다.
 
5) 난곡 우석일(蘭谷禹錫一)
(1612[광해군 4]-1666[현종 7])는 조선 중기의 학자. 아버지는 하동군수(河東郡守)를 지낸 汝楙할아버지이며 어머니는 고령 김씨(高靈金氏) 부장(部長) 하(河)의 딸이다. 조부인 형(형)할아버지에게 <<소학 小學>> 등을 배 운 후 17세 되던 해에 정온(鄭蘊)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50[효종 1]년에 어머니의 병환을 효행으로 낫게 하여 정려(旌閭: 정문을 세워 표창함)가 내려졌다. 일찍이 과거 시험장에 갔다가 동료들이 부귀와 명예에 급급하여 급제에 혈안이 돼 경박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들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돌아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전력하였다.
1649[인조 27]년 음공(蔭功)으로 장사랑(將士郞: 종9품 하의 문산계(文散階))에 오르고 영조(英祖) 때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난곡유고 蘭谷遺稿>> 3권 1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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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재 유허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