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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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문암서원(文岩書院)-미복설
   강원 춘천시 신북면 용산리
   농암 김주, 퇴계 이황, 지퇴당 이정형, 용주 조경
   1612년(광해군 4)
   1648년(인조 26)
   
   
서기1612년(광해군4년)에 춘천부 관아 북쪽 30리 지점인 가락리(嘉樂里=서원리)에 설립되고 문순공 이황(李滉=퇴계)과 참판 이정형(李廷馨) 참판 조경을 봉안하고 1871년 철폐될 때까지 약 260년간 사액서원으로 선현선사를 존숭하는 춘천지역의 정신적인 중심의 전당으로, 교육기관으로 교육에 크게 이바지한 서원이었다.
지중추 신식(申湜)이 1610년 겨울에 관동을 순찰하는 길에 춘천에 들렀을 때 춘천 지방 유생들이 “춘천지방은 퇴계선생의 외관(춘천박씨)이므로 그의 학문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서원을 건립하고 강(講)하겠습니다.”라고 청하였다. 신식은 그 뜻을 받아들여 당시 춘천부사 유희담과 상의하여 서원을 설치토록 허락하고 노비 약간명을 주어 서원 건립에 대한 일을 보도록 하였다. 2년 후에 이숭양, 이주 등과 상의하여 가락리 문암 위에 터를 결정하고 서원을 건립하여 명칭은 ‘문암서원’으로 하고 규모는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같은 크기이며 성균관과 같이 선현선사를 봉안하는 사묘(祠廟), 학동이 공부하는 명륜당(明倫堂), 학생들이 거처하는 제(齊)로 구성되었었다.
문암서원에 관한 기록은 1648년(인조26)에 사액(賜額)을 받았다는 기록과 1731년에 수리하였다는 것 외에는 별로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액서원이었던 강릉의 송담서원과 원주의 칠봉서원과 같은 수준의 서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암서원의 배향 인물은 김주(고려말 인물 호는 농암, 본관은 선산 시호는 충정)와 이황(1501~1570)과 이정형(1549~1607),  조경(1586~1669))이었다.
조선시대 춘천지방 거주자로 생원 진사에 합격한 자는 217명이고 그 중 춘천향교 출신 합격자는 41명 뿐이며 나머지 176명은 주로 서원출신인데 비사액서원인 도포서원보다는 사액서원인 문암서원 출신이 더 많은 합격자를 냈을 것으로 본다.(원영환,강원지방의 서원연구 논문.1998)
현재 문암서원지는 신북읍 용산리 한국전력공사 춘천수력발전소 운동장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촌로들은 서원이 헐린 다음에도 사당은 남아있었다고 말한다.

 
 
1) 김주(金澍)
고려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일선(一善). 호는 농암(籠巖). 아버지는 김원로(金元老)이며, 형은 백암(白巖) 김제(金濟)이다.
김주(金澍)1392(공양왕 4)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며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망국의 소식을 듣고 명나라로 다시 돌아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정벌하고 고려를 다시 건국해줄 것을 주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망국의 신하된 도리로 고국에 돌아갈 수 없어 명나라에 있을 것을 청하니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여 고려를 사모하며 충절을 지켜 상서록(尙書祿)이 내려졌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1796(정조 20) 정조가 직접 제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안동의 고죽서원(孤竹書院), 구미의 월암서원(月巖書院), 고창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양주의 송산서원(松山書院), 곡성의 동진사(東津祠), 춘천의 문암서원(文岩書院), 장성의 경현사(景賢祠), 장흥의 도산사(度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궁기리에 부조묘(不祧廟)와 제청(祭廳)인 충렬당(忠烈堂)과 신도비·유허비가 있다.
 
2)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25~ 1570년 음력 128)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화가, 시인이다.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화가, 대성리학자였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한다.
1528(중종 23)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1534년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의 관직을 거쳐 풍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45년 형 온계 이해가 을사사화로 희생된 뒤, 여러 번 관작이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직제자 김효원(金孝元)이 동인의 당수가 된 이후 동인으로 전달되었으며, 남인으로 이어졌고, 북인 일부에게도 계승된다. 소고 박승임,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퇴도(退陶퇴도만은·도수(陶叟), 본관은 진보(眞寶)혹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문하생이다.
 
3) 이정형(李廷馨)
1549(명종 4)~ 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동각(東閣). 아버지는 사직서령(社稷署令) ()이다. 정윤희(丁胤禧)의 문인이다. 1568(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형조좌랑·사간원정언·예조정랑·사헌부장령·홍문관부수찬·대사성·형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扈從), 개성부유수로 특진되었다. 이때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개성이 함락되자 형 정암(廷馣)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을 격파했다. 장단(長端삭녕(朔寧) 등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활동으로 기호·호남의 길을 행재소(行在所)로 통하게 했는데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장례원판결사로서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 탈환전에 참가하고, 1594년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왔다. 이후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비변사당상·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95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어 군권을 담당했다.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말년 북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이 밀려나자 병을 핑계로 양주로 퇴거했다. 대사성·호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606년 삼척부사로 부임,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평소 이황(李滉)을 흠모하여 호를 지퇴당(知退堂)이라 지을 정도였던 그는 남인인 이원익·이수광(李睟光) 등과 가까이 지내며 학문을 연마했다<span style="letter-

4) 조경(趙絅)
1586(선조 19)~ 1669(현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아버지는 봉사(奉事) 익남(翼男)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김상헌(金尙憲이정구(李廷龜) 등과 교유했다. 1612(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대북정권하에서 과거를 포기, 거창에 물러가 살았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고, 1626(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교리·헌납 등을 역임했다. 이무렵 서인계 공신(功臣)이 조정의 여론을 무시하며 정국을 좌우하자,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함께 맞서며 남인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지평으로 있으면서 같이 공부했던 김상헌과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탄핵하여 조야(朝野)의 지원을 받았다. 1630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사간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할 때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다. 이듬해 집의로서 일본에 군사를 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자고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뒤 응교·집의 등을 거쳐 1643년 왜란 후 재개된 5번째의 일본사행(日本使行)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서 다녀왔다. 이때의 일을 동사록 東槎錄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이어 형조참의·김제군수·전주부윤·대제학 및 각 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50(효종 1) 예조판서로 재직중, 효종의 북벌계획을 눈치챈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를 보내어 추궁하고 죄를 주고자 하는 등 위기에 처하자,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책임을 떠맡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낸 후 은퇴했다. 이후 포천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살던 중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허목(許穆윤휴(尹鑴홍우원(洪宇遠) 등과 함께 서인의 의견을 반박하고 3년설을 적극 주장했다. 이 일 때문에 서인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뒤 행부호군(行副護軍)에 서용되었다. 주자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문사(文史)에도 박학하여 진한(秦漢) 이후의 글을 모두 섭렵했다. 저서로 동사록·용주집이 있다. 1676(숙종 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1681년 출향되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