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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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양서원(德陽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대사리 617
   김문기(金文起)
   1625년(인조 3)
   
    봄가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47호(1991.09.06지정)
덕양서원은 김문기(金文起)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625년(인조 3)에 세웠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48년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원래 덕양서원은 충청남도 공주에 위치하던 요당서원(蓼塘書院)이었다. 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공주지방 유림과 본향 사림들이 협조하여 1948년에 현재의 김녕김씨 문중 종가(宗家) 곁으로 이건 복원하게 되었다. 지금도 김문기를 독향하는 서원으로 매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김문기(金文起, 1399~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 출신.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관(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 : 閔伸·趙克寬·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 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그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벌어져 신문 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탕건봉을 배산하고 남서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동․서제와 외삼문 및 강당이 중정을 에워싸고 동․서․남․북에 배치되었다. 강당의 뒤쪽 탕건봉의 경사면에 높직하게 터들 닦아 내삼문과 토석담으로 방형의 곽을 두루고 김문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상충사(尙忠祠)를 배치하였다. 1948년에 이건된 건물이지만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을 동일축선상(同一軸線上)에 두고 강당의 전면에 동․서재(東·西齋)를 둔 일반적이고 정연(整然)한 배치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1)사당
사당인 상충사(尙忠祠)는 앞면 3칸, 옆면 1칸 반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상충사에는 김문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2)강당
강당인 경의당은 자연석 축대를 1.5m가량 높게 쌓았고 양 측면에 건물에 오르는 자연석 계단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외주는 원주를 사용하였고 내부는 방주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중앙 앞쪽에 마루를 깔고 기둥 앞으로 헌함을 내고 계자각의 난간을 돌렸다. 후열 4칸은 좌우 양쪽으로 온돌방을 각 1칸씩 두고 중앙부도 앞쪽과 달아 장마루를 깔았다. 온돌방은 중앙 마루 쪽으로 사분합 들장지를 달았고 앞면과 옆면에는 머름중방위에 쌍여닫이 살창문을 내었다. 온돌방 주위와 뒷쪽에도 쪽마루를 돌렸으며 마루 뒷벽에는 머름 중방위에 올거미 널쌀창을 달았다. 원주 상부에는 말기양식의 이익공이 있고 창방과 굴도리 장혀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다. 상부구조는 5량 가로 종보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혔다. 처마는 세겹처마로 하였는데 부연은 두층 모두 각재이다.
 
3)동․서재
숙소로 사용되던 동재는 일자형 온돌 3칸인데 좌측의 1칸과 우측의 통간방 사이에 네 짝 미서기 장지문을 달았다. 서재는 평면구성이 동재와 같고 각 칸 사이에는 네짝 미서기 장지문을 달아 구획하였다.
 
4)기타
이 외에도 제관이 출입하는 신문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 관리인이 생활하는 주소(廚所) 등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