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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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암서원(雲巖書院)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42
   공 자(孔 子) 김 제(金 濟) 손순효(孫舜孝)
   1826년(순조 26)
   
   춘향
   
운암서원은 1826년(순조 26)에 기성면 노은동(魯隱洞)에 건립되어 김제(金濟), 손순효(孫舜孝)를 봉안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다. 그 후 1964년에는 서원 유생들의 주창으로 구인리(邱仁里)에 이건하여 현재의 위치에 신축하고 강당은 네 차례의 보수를 하였다. 1995년 10월에 서원의 보수와 평삼문 개축이 이루어지고 2004년 담장을 설치하는 등 전체적인 보수가 있었다.

1)공자(孔子, 기원전 552년~기원전 479년)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시조.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仁)에 대한 공자의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孝悌)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본명 구(丘)이며, 자 중니(仲尼)이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송의 귀족이었으나 노(魯)로 망명하였다. <맹자>에는 공자가 상(商) 왕가의 후손이라는 서술 있어 때로는 공자를 상왕족의 혈통으로 여기기도 하였으나, <사기>에는 이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단지 “그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그를 송(宋)의 후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버지의 자는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다.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나는 십오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이 되어 뜻을 세웠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하였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공자는 19세 때인 BC 533년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직이 되었다. BC 517년 삼환씨의 제가에 실패한 소공(昭公)과 함께 제(齊)로 갔다. 제에서 관직 등용에 실패한 뒤 노로 되돌아왔다. 공자는 51세 때인 BC 501년 노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었고, 56세 때 대사구(大司寇)로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노의 정치에 실망하고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주유 천하의 길을 나서 위, 조, 송, 정, 진, 채, 초를 방문하였다. 그 후 공자는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한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가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공자는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다. 이는 그의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김제(金濟)
고려 말기의 인물로 호는 백암(白巖),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평해군수 재직시 고려가 망하자 배를 타고 해도(海島)로 들어가 시와 물새를 벗하며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쳐, 조선 정종 때 바닷가에 단(檀)을 모으고 그의 충절을 기리며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였다.
 
3)손순효(孫舜孝, 1427~149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칠휴거사(七休居士). 영(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례(有禮)이고, 아버지는 군수 밀(密)이다. 어머니는 정선군사(旌善郡事) 조온보(趙溫寶)의 딸이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또, 1457년(세조 3)에는 감찰로 문과중시에 정과로 각각 급제하였다. 이어 경창부승에 발탁되고, 병조좌랑·형조정랑·집의·전한 등을 역임하였다.
1471년(성종 2) 17조의 시무책을 올려 채택되어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가 있다 하여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그 뒤 장례원판결사가 되어 소송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였다. 1475년 부제학을 거쳐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1478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왕비 윤씨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1480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판서·경기도관찰사·대사헌·한성부판윤·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두둔하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가 연해안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이어 우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고령으로 사퇴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중용≫·≪대학≫·≪역경≫ 등에 정통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대나무 그림에 능하였다.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찬서(撰書)로 ≪식료찬요 食療撰要≫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현재 운암서원 내에는 평삼문·강당·사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동서재는 따로 건축하지 않았다. 사당 옆에는 비각이 있다.
강당은 ‘수일당(隨日堂)’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평면은 중당협실형으로 앞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당은 충절사(忠節祠)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맞배지붕을 이었다. 평면은 내부를 통칸(通間)으로 처리하였다. 내부의 구조재 중 종도리 아래 1999년에 보수한 상량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 사당 영역 안의 충절사 우측에 자리한 비각은 해단(海檀)이라는 현판을 달고 서 있다. 외삼문은 평대문으로 3칸 규모에 단청을 했고, 내삼문은 1칸짜리 사주문으로 단청을 하였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