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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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물계서원(勿溪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185-1
   김방경(金方慶) 김구용(金九容) 김응조(金應祖)
   1661년(현종 2)
   
    춘추제향
   
1661년(현종 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방경(金方慶), 김구용(金九容), 김응조(金應祖)를 향사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던 것을 지역유림에서 서당을 세워 물계서원의 맥을 이어왔다. 1917년 권영달(權寧達)이 서당을 우학정(友鶴亭)으로 건립하였다가 후에 물계서원(勿溪書院)이 훼철된 것을 애석하게 여긴 이곳 유림들이 1962년 이 건물을 중건하여 물계서당이라 하였다.
 

1)김방경(金方慶, 1212~1300)
고려 후기의 무장(武將)·정치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본연(本然).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이 양육했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
1229년(고종 16)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했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자 위도(葦島)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상장군에 올라 반주(班主) 전분(田份)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서 얼마 뒤에 형부상서·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새 난국의 담당자로 등장하였다.
당시 강도(江都)에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였던 고려는 일단 강화를 한 다음 원나라와 개경 환도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임연(林衍)은 1269년 왕을 퇴위시키고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즉위시킴으로써, 반원(反元)의 입장을 굳히면서 환도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강한 반대와 위협에 부딪쳐 원종이 복위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이장용(李藏用)의 천거를 받으면서 고려와 원나라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진력하였다.
1270년 6월에 이르러 개경 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그 토벌 임무를 맡아 삼별초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힘쓰게 되었는데,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로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忻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을 평정하라는 책임을 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공격하여, 마침내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 해 가을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의 세조(世祖)에게 환대를 받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는 데 도독사(都督使)로서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도원수 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도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심한 풍랑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공로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가직(加職)되었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어 원나라의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 그 후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고, 1281년의 제2차 일본 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했으나 또다시 실패하였다.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김구용(金九容, 1338~138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해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을 때,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해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다.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우왕 7)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다.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갈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大理)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해,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 周官六翼≫을 찬했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의 용장서원(龍章書院)에 배향되었다.
 
3)김응조(金應祖, 1587~166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 안동 출신. 할아버지는 장례원사의 농(農)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 대현(大賢)이며, 어머니는 수의부위(守義副尉) 찬금(纘金)의 딸이다.
17세 때 유성룡(柳成龍)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형제 9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1634년(인조 12)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다시 지평(持平)·장령(掌令)·헌납(獻納)·수찬(修撰)·교리(校理)·부수찬·집의(執義)·사간·응교(應敎)·승지·호군·공조참의·대사간·한성부우윤 등의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1637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해 이를 시행하게 하고, 그 뒤 필요없게 되자 1658년(효종 9)에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대학연의 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고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에는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마음을 닦아 본성을 기를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할 것, 문(文)을 숭상해 학문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고, 1659년(현종 즉위년)에는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에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의 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로 나이 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해 사면하였다.
문장에 능했으며,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사례문답 四禮問答≫·≪산중록 山中錄≫·≪변무록 辨誣錄≫ 등이 있다.
 

뒤에 얕은 산을 등지고 앉아 있는 서원은 현재 강당건물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서원의 영역안에 있던 관련건물들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으며 주변에는 가옥과 비닐하우스 등이 들어서있어 그 경계가 어디였음을 추적해 볼 수도 없는 형편이다. 창건 당시엔는 사당, 강당, 동서재, 전사청, 내삼문, 외삼문, 고직사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강당건물만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강당에는 ‘물계서당(勿溪書堂)’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이 건물은 물계서원(勿溪書院)이 훼철된 것을 애석하게 여긴 이곳 유림들이 1962년 이 건물을 중건하여 물계서당이라 하였다. 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경사진 대지 위에 건립한 까닭에 전면에는 하층주(下層柱)를 세워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