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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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기천서원(箕川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2리 246
   안 준(安 俊) 이문흥(李文興) 문 근(文 瑾) 문 관(文 瓘) 이 구(李 構)
   1665년(현종 6)
   
   음력 9월 20일
   
1665년(현종 6)에 고려조의 인물인 안준(安俊)을 비롯하여 이문흥(李文興), 문근(文瑾), 문관(文瓘), 이구(李構) 등 5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당초 기천정사(箕川精舍)를 세웠다. 1692년(숙종 18)에는 용궁 월오리로 1차 이건하였으며, 1703년(숙종 29)에는 향내 유림들의 합의에 의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12년(숙종 38) 현 위치인 용궁면 월오리 오룡곡으로 옮겨 재건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훼철되었으며, 1928년 설단하고 제향하였다. 1928년 상절사(尙節祠)를 복원하였다. 춘추로 향사를 지내다가 현재는 음력 9월 20일 한번 향사한다.

1)안준(安俊, 생몰년 미상)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노포(蘆浦).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남양부사와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거쳐 1385년(우왕 11) 전라·충청·경상 삼도체찰사가 되었다.
고려멸망과 조선건국기의 정치상황은 최영(崔瑩)과 이색(李穡)의 집정세력을 차례로 제거한 이성계계(李成桂系)·정몽주계(鄭夢周系)·조준계(趙浚系)의 협력정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성계의 즉위에 앞서 정몽주계열의 숙청이 있었다.
이에 1392년(공양왕 4)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우현보(禹玄寶)·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의령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조선이 개국되자,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긴 태조에 의하여 배소를 예천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배향되었다.
 
2)이문흥(李文興, 1423~150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질보(質甫), 호는 나암(羅菴). 증조는 극명(克明)이고, 할아버지는 인봉(漏鳳)이며, 아버지는 국(菊)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에 합격, 1469년(예종 1) 교수로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2년(성종 3)에 ≪예종실록≫을 수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1482년 사옹원첨정에서 성균관사성으로 전임되어 유생교육에 몰두하였다. 그간 타직으로 전임한다는 말이 있을 때마다 여러 관아에서 유생교육에 최적임자라며 전임을 반대하여 20년 간 그 자리를 지켰다.
1493년 성균관유생 박광영(朴光榮) 등이 유생의 스승으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며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으니, 그 문하에서 조정의 대부(大夫)들과 임금께 경서(經書)을 가르치는 경연관이 많이 있음을 들어 포상할 것을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왕의 특명으로 한 품계 올려 포상을 받았다. 79세에 유해라도 고향에 묻히기를 빌어서 조정을 떠났다. 벼슬이 성균관대사성에 이르고,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3)문근(文瑾, 1471~? )
조선 전기의 문신. 영남 출신의 사림파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감천(甘泉). 자는 사휘(士輝), 호는 쌍괴(雙槐). 손무(孫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숭질(崇質)이고, 아버지는 부사 걸(傑)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이문흥(李文興)의 딸이다. 관(瓘)의 형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6년(연산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승정원주서, 예조·병조·이조의 좌랑, 헌납을 역임했고, 김해부사·수원부사·금산군수 등의 외직을 지냈다.
1514년(중종 9)부터 사간·대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노산군·연산군의 입후(立後) 문제, 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의 혁파와 같은 개혁을 주청하는 등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훈구파와 맞서서 적극적인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516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고, 중종의 총애를 받아 형조참판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무고로 경상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처형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1521년 다시 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도의(道義)를 가장하여 이름을 도둑질했다는 죄목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용궁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는 같은 영남 출신인 권발(權橃) 등과 함께 조광조 등 기호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제(調劑)하는 완충 작용을 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향인 용궁의 기천정사(箕川精舍)에 제향되었다.
 
4)문관(文瓘, 1475~1519)
1475(성종 6)~1519(중종 14) 〚조선〛문신.
자는 백옥(白玉),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감천(甘泉), 부사(府使) 걸(傑)의 아들, 참판(參判) 근(瑾)의 동생.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어 1507년(중종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부임하여 전임(前任)인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전정(前鄭)‧후문(後文)이라고 찬양했다. 지평(持平)을 거쳐 1518년 주청사(奏請使)의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령(掌令)‧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지냈다.
 
5)이구(李構, 1484~153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성지(成之), 호는 연경당(燕敬堂). 용궁(龍宮) 출신. 국(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흥(文興)이며, 아버지는 세준(世俊)이다.
1510년(중종 5) 진사가 되고,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 검열이 되었으나 기묘사화로 투옥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되었다.
향약(鄕約)을 시행하면 도둑이 없어질 것이라고 건의하여 실시하였으나 도둑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하여 1521년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용궁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제향되었다.
 

1868년 훼철되었던 것을 1928년에 복설하였고, 계속적으로 중수가 이루어지고 최근에는 2006년에 담장을 보수하였다.
서원의 경내에는 명교당(明敎堂)이 좌측에 자리하고 우측에 강당과 사당영역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인 상절사(尙節祠)는 강당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구조이다. 명교당의 우측에 위치한 강당은 정면3칸, 측면 1칸반의 맞배기와집이다. ‘기천서원(箕川書院)’ 현판 이외에 마루의 뒤쪽 상부 벽에 ‘풍원루(風遠樓)’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명교당은 강당과는 별도로 세워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건물의 형식으로 보아서는 강당보다 먼저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천서원에서 소장하던 고문서 13점(소지 4점, 단자 3점, 통문 4점, 제문2점)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보관 중이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