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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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금곡서원(金谷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656
   박충좌(朴忠佐) 박 눌(朴 訥) 박손경(朴孫慶)
   1568년(선조 1)
   
   3월, 9월 중정(中丁)
   
금곡서원은 1568년(선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치암(恥菴) 박충좌(朴忠佐) 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박눌(朴訥)과 박손경(朴孫慶)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되었다가 1984년 유림에 의해 회산사(晦山祠) 터에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9월의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박충좌(朴忠佐, 1287~134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 지빈(之彬)의 손자이며, 군부총랑(軍薄摠郎)을 지낸 장(莊)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련(朴連)이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막다가 그의 참소로 무고를 당하여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제수되어 경상도 염세(鹽稅)를 감독하게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내서사인(內書舍人)·밀직제학(密直提學)·개성부윤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피봉되었다. 1344년(충혜왕 복위 5)에는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이천(李蒨)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왕에게 ≪정관정요 貞觀政要≫를 시강하여 상을 받았다.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할 때 찬성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일생 동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예안의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2)박눌(朴訥, 1448~1528)
본관은 함양이며 자는 여우(如愚)이고 호는 杏亭(행정)이다. 상서공(尙書公)의 15세손으로 2파 박충좌(朴忠佐)의 7대손이다. 찰방(察訪)으로 학행이 높아 추앙을 받았으며, 경북 함창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고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에게도 증 정부인(贈 貞夫人)이 내려졌다. 또한 중종이 사제문(賜祭文 :일종의 추모사)과 사자(使者)를 보내어 참배하고 그 산도(山圖:산의지도)를 그려 올리라 명하였으니 특이한 은전(恩典)이었다. 다섯 아들은 모두 문과에 등과(登科) 하여 소위 향오린(鄕五麟) 이라 불렸다.
 
3)박손경(朴孫慶, 1713~1782)
자는 효유(孝有), 호는 남야(南野), 본관은 함양, 성옥(成玉)의 아들이다. 박손경은 학문이 정통하고, 행실이 덕성스러워 1777년(정조 1)에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의 추천으로 영릉(英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오르기를 사양하였고, 1779년(정조 3)에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이, 그의 학문이 선비들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임금께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임명받았으나 역시 오르지 않았다.
당시 예천 군수가 박손경의 높은 학문과 효행을 전해 듣고 찾아왔는데,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은 박손경은 평소에 부모님께 드리던 소박한 음식으로 정성껏 대접하였다. “어떻게 음식을 마련하였기에 이렇게 맛이 좋습니까?”라고 묻기에, “가난하여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책감으로 매년 이른봄에 논에 있는 우렁이를 주워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음식을 마련하는 것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예천 군수는 부모를 위하는 그 정성에 감탄하여 박손경을 돕고자 관리들에게 우렁이 가루를 빨리 구해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우렁이 가루는 빠른 시일에 마련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다만 박손경의 집에서 조금 구해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군수가 감사의 뜻으로 금일봉을 박손경에게 보냈으나, 박손경은 그 돈을 사양하였다.
이처럼! 박손경은 효행과 덕행이 뛰어날 뿐 아니라, 많은 제자를 길렀고,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무덤은 지내동 매봉산(梅峰山)에 있고, 문집 10권을 남겼다. 상금곡리의 회산사(晦山祠, 1802)와 금곡서원(金谷書院, 1984)에 제향되었다.

얕은 산을 등지고 정남향으로 앉은 서원의 영역은 동서축이 긴 편으로 좌측에서부터 강당영역, 사당영역, 고직사로 이어진다.
이 서원의 건물로는 정문인 진도문(進道門), 상교당(尙敎堂), 독역재(讀易齋), 격치재(格致齋), 동무, 전사청, 장판각 등의 건물과 배향인물 세분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이 있다.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는 향사(享祀)를 지내는 3칸 규모의 건물이며, 박충좌·박눌·박손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 회합 및 학문 토론 장소인 강당인 상교당(尙敎堂)은 8칸 규모로서 중앙은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측은 협실(夾室)로 되어 있다.
동·서재는 독역재(讀易齋)·격치재(格致齋)로서 각 3칸 규모로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이다. 장판각은 서적을 보관하는 곳이고, 전사청은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이며, 주소는 고지기가 거처하는 곳이다.
 
몇 권의 문집이 유물로 남아있고, 배향인물 3인의 신도비가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8천평·대지 1천 2백평 등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