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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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임고서원(臨皐書院)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
   정몽주(鄭夢周) 황보인(皇甫仁) 장현광(張顯光)
   1553년(명종 8)
   1554년(명종 9)
   2월, 8월 중정(中丁)
   경상북도기념물 제62호(1985.10.15지정) 임고서원소장전적(臨皐書院所藏典籍) -보물 제1109호(1991.12.16지정) 정몽주초상(鄭夢周肖像) -보물 제1110호(1991.12.16지정) 포은정몽주유허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2호(1992.07.18지정)
이 서원은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琚) 등 향내 유림들이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浮來山) 아래 창건을 시작하였다. 1554년(명종 9)에는 명종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사액 된지 불과 5년 만에 사액되었으므로 초기 서원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에 중건하였으며 재사액을 받았다. 1643년(인조 21)에 장현광을, 1727년(영조 4)에 황보인을 추가로 이곳에 배향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습니다.
이 때 역사가 깊은 이 서원이 훼철 된 것은 개경에 있는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포은 선생을 향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존영각을 건립하여 포은 선생의 영정만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 1965년에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에 보수정화 하였다.
이곳에 임고서원이 들어서게 된 것은 포은 선생의 부모 묘가 서원 뒤편 부래산에 있기 때문이다. 부래산 기슭에는 포은 선생의 부 일성부원군 운관(云瓘) 묘와 어머니 변한국부인 영천 이씨 묘가 함께 있다. 그리고 서원 바로 옆에 묘소를 지키는 계현재(啓賢齋)가 있다.

1)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해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 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 朱子集註≫에 대한 그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 하였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해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대사성 이색(李穡)은 그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해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사신의 임무를 다해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나, 당시 조정에서 몰려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해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고려 말 다사다난하던 때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 일이나 큰 의혹이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났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해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해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 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황보인(皇甫仁, ?~145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아버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좌정언이 되었고, 1420년 좌헌납이 되었다.
1422년에는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으로서 강원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기근을 규찰한 뒤 귀환해 곧 장령이 되었다. 1425년 1월 한성소윤(漢城少尹) 재임중 경상도찰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1428년 집의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좌부대언을 거쳐 1430년에는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31년 강무행행(講武行幸)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마(人馬)가 죽거나 다치자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되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형조참의로 복직되었으며,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리고 1432년 형조좌참판·병조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정효전(鄭孝全)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판중추원사 하경복(河敬復), 형조판서 정흠지(鄭欽之), 예문관대제학 정초(鄭招)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찬진(撰進)하였다.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에는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兵曹事)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幸)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되어 종성을 수주(愁州) 강변으로 이치(移置)하면서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해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되어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하였다.
1445년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임하고, 144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49년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우의정의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아 그대로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하다가 그 해 좌의정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했으며, 이듬 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문종의 국상을 총령하였다.
다음해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 우찬성 이양(李穰),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되었다.
오랫동안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 31) 7월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계기로 김종서와 함께 복관(復官)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 1719년 후손이 전조(銓曹 : 吏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되었다. 그러다가 1746년(영조 22) 복관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1758년에는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 端宗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그리고 1804년(순조 4) 집 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에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읍의 경남서원(慶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다.
 
3)장현광(張顯光, 1554~163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8세 때 <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해 23세 때인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또 세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만에 돌아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 (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해 왕을 알현했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했고 계속해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죽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임고서원은 구서원과 신서원, 이렇게 2개의 서원이 동서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서원의 경우 강당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서원은 문충사(文忠祠)인 사당과 강당, 동·서재, 전사청 2동, 영광루(永光樓)인 누각, 비각, 고직사 4동 등 총 12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구서원과 신서원 모두 강당의 후면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종 목   보물 제1109호
명 칭  임고서원 전적(臨皐書院 典籍)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전적류/ 전적류
수량/면적   일괄10종25책
지 정 일   1991.12.16
소 재 지   경북 영천시 문외동 25 영천시립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임고서원
관 리 자    영천시립도서관
설 명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들은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 있다. 임고서원은 명종 8년(1553)에 창건되어, 선조 36년(1603)에 중건되었다.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은 약 200여 책이 있는데, 이 중에서 지정된 것은 10종 25책이다. 지정된 책을 보면,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논어언해』·『심원록』·『임고서원고왕록』·『임고서원장학계안』등의 책으로 모두가 임고서원에 관련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임고서원이 창건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서원의 운영과 구성 등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상세목록>

1. 임고서원소장전적-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臨皐書院所藏典籍-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6冊
2. 임고서원소장전적-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臨皐書院所藏典籍-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3冊
3. 임고서원소장전적-논어언해 3冊
4. 임고서원소장전적-심원록 6冊
5. 임고서원소장전적-고왕록 2冊
6. 임고서원소장전적-임고서원전곡집물범례등록 1冊
7. 임고서원소장전적-임고서원장학계안(부)절목1冊
8. 임고서원소장전적-환성사결입안 1冊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