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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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계서원(道溪書院)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산383
   박인로(朴仁老)
   1707년(숙종 33)
   
   음력 3월 5일
   박노계집판목(朴蘆溪集板木)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8호(1974.12.10지정)
이 서원은 조선조 선조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선구자이며 효자로, 임진왜란 때는 수군으로 종군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해안 지방의 만호(萬戶)까지 역임한 박인로(朴仁老)를 향사하기 위해 1707년(숙종 33)년 창건하였다. 사당, 강당서원은 건립 당시보다 규모가 줄어들고 위치마저 옮겨졌다고는 하지만 노계 선생의 묘소가 바로 지척에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노계가(蘆溪歌) 비석이, 우측에는 소담한 동산이, 그리고 앞쪽에 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어 아늑함과 더불어 포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서원 좌측 건물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박노계집 판목을 보관하고 있다.

1)박인로(朴仁老, 1561년~1642년)
조선 중기의 문인. 임진왜란 때는 무인(武人)으로도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경상북도 영천 출생. 아버지는 승의부위 석(碩)이며, 어머니는 참봉 주순신(朱舜臣)의 딸이다.
그의 82세의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전반생(前半生)이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면, 후반생(後半生)은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한 선비요, 문인 가객(歌客)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이미 13세에 <대승음 戴勝吟>이라는 한시 칠언절구를 지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동래·울산·경주지방을 비롯해 영양군까지 잇따라 함락되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38세 때는 강좌절도사(江左節度使)인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수군(水軍)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다.
거제도 말단인 조라포(助羅浦)에 만호(萬戶)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무인의 몸으로서도 언제나 낭중(囊中)에는 붓과 먹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시정(詩情)을 잃지 않았다.
그의 후반생은 독서수행의 선비이며 가객으로서의 삶이었다. 곧, 문인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은거생활에 든 40세 이후로, 성현의 경전 주석 연구에 몰두하였다.
밤중에도 분향축천(焚香祝天)하여 성현의 기상(氣像)을 묵상하기 일쑤였다. 또한, 꿈 속에서 성·경·충·효(誠敬忠孝)의 네 글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자성(自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여러 도학자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덕형(李德馨)과는 의기가 상합하여 수시로 종유하였다. 1601년(선조 34) 이덕형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영천에 이르렀을 때, 처음 대면하여 지은 시조가 <조홍시가 早紅枾歌>이며, 1605년에는 <선상탄 船上歎>을 지었다.
1611년(광해군 3) 이덕형이 용진강(龍津江) 사제(莎堤)에 은거하고 있을 때 그의 빈객이 되어 가사 <사제곡 莎堤曲>·<누항사 陋巷詞>를 지었다.
1612년 도산서원에 참례하여 이황(李滉)의 유풍을 흠모하였고, 그 밖에도 조지산(曺芝山)·장여헌(張旅軒)·정한강(鄭寒岡)·정임하(鄭林下)·정연길(鄭延吉)·최기남(崔起南) 등과 교유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노인직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라는 은전(恩典)을 받았다.
1635년에 가사 <영남가 嶺南歌>를 지었고, 이듬 해 <노계가>를 지었다. 그 밖에 가사 <입암별곡 立巖別曲>과 <소유정가 小有亭歌>가 전하는데, 가사가 9편이고 시조는 68수에 이른다.
말년에는 천석(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양군 남쪽 대랑산(大朗山)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1707년(숙종 33)에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춘추제향하고 있다.
그는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비록 시조를 즐겨 지어 완전히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도 가사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계서원은 강당의 후면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입덕묘(入德廟)인 사당과 강당, 건물의 외곽담장 밖에 있는 화장실 등 총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박노계집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태평사」,「누항사」,「선상탄」,「노계가」등 7편의 가사와 68수의 시조가 전해지고 있다.
 
1)박노계집판목(朴蘆溪集板木)-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8호(1974.12.10지정)
인조 때의 시인 박인로(朴仁老)의 문집인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