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임천서원(臨川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송현동 740
   김성일(金誠一)
   1607년(선조 40)
   1618년(광해군 10)
   3월, 9월 초정(初丁)
   홍교당-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6호(1985.8.5지정)
김성일(金誠一)이 1593년(선조 26) 4월 29일 진주(晋州)공관에서 수명을 다하고 14년 뒤인 선조 40년(1607)에 선생의 학덕과 공훈을 기려 일향의 선비들이 선생의 상자지향(桑梓之鄕)에 조두지소(俎豆之所)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 따라 당시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와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임하현(臨河縣) 서쪽에 옛 서당에다 사묘(祀廟)를 세우고 향사했다. 1618년(광해군 10)에 ‘임천’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을 때 영남유림들이 훼철 반대를 상소하였다가 이문직(李文稷), 유기호(柳基鎬) 등 14명이 귀양가게 되었다. 그 뒤 1908년에 복원하였다.

1)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안동 임하현 천전리에서 김 진(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서경≫, ≪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 ≪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陶山)에 돌아와 수학하였다. 퇴계로부터 “행실이 고상하고 학문이 정수하여 내가 본 중에 그와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평을 들었으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 80자를 손수 쓴 병명(屛銘)을 받았다. 그 마지막에 “박문약례(博聞約禮) 두 가지를 모두 지극하게 하였으니 도통연원의 바른 맥을 이었도다(淵源正脈).”라고 주자를 칭송하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 병명을 두고 후학들은 도통(道統) 전수(傳授)의 징표로 이해했다.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572년에는 「노릉복위 육신복작 종친서용소(魯陵復位 六臣復爵 宗親敍用疏)」를 올려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했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후일 종계를 바로 잡은 것은 이때의 성과였다. 사헌부장령이 되어서 왕의 면전에서 과감하게 간하며 고관들의 잘못을 피하지 않고 지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전상호(殿上虎)라 불렀다.
1579년 및 이듬해에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로 함흥ㆍ삼수ㆍ길주ㆍ종성ㆍ온성ㆍ경원 등 함경도 각지의 성지와 군기를 검열하고 창고의 곡식을 조사하는 등 국방실태를 점검 하였다. 군사들에게 옷을 나누어 주며 위무하였고, 백성들의 폐막을 포함한 변경의 문제점을 상소 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가 되어서는 족징⦁인징 등의 군역 상의 문제점, 무비 해이의 폐단, 방납의 문제점 등 일곱 가지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 해결책을 건의하였다. 특히 공납제에 대하여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방납에 따른 폐단을 시정할 것과 아울러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할 것을 주청하였다.
같은 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3년여 동안 재직하면서 목민의 이상 실천에 힘썼으며 오랫동안 끌어온 송사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나주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 : 지금의 경현서원)을 세워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 등 동방오현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케 하였다. 나주에 목사로 있으면서 ≪성학십도(聖學十圖)≫, ≪계산잡영(溪山雜詠)≫,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퇴계선생자성록(退溪先生自省錄)≫ 등 퇴계선생의 주요 저작을 간행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어서는 왜인의 서계(書契 :조선과 일본 사이에 주고받던 외교문서)의 패만한 내용을 고치도록 목숨을 걸고 주창하여 일부 반영시켰으며, 외교상의 의전, 격식, 절차에 나라의 명예와 체통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조선국연혁고이>와 <조선국풍속고이>를 지어서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주체성(主體性)을 선양하였다.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정세를 보고할 때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전쟁 발발의 소문으로 온 나라의 흉흉해진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일본이 반드시 침입할 정황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나, 나중에 왕과 비변사 등 소수의 국방 최고책임자들에게는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한 일본 사신의 말을 보고하여 국방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 해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여 민심을 얻을 것과, 왕자들의 호화주택과 부정축재, 군정의 문란, 동서붕당과 관료들의 악습, 한 겨울의 축성 등의 여러 가지 문제의 시정을 주창하면서 국방력을 제대로 강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이 신원되도록 힘썼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 중에는 진입하는 왜군의 선발대를 물리쳐서 임진왜란 최초로 승전을 이루었다. 그때 국왕 선조는 그의 전년도의 귀국보고를 문제 삼아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승전에 관한 장계와 왕세자, 유성룡(柳成龍), 최황(崔滉) 등의 변호로 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도로 되돌아가서 의병 창기와 왜군 격퇴에 신명을 바쳤다.
초유사로서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의 의병 창기와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과 감사, 수령 간의 불화를 잘 조정하여 의병의 희생이 적도록 하면서 왜적에게 실함된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내지로의 적의 침입을 막았다.
경상우도 감사로서는 진주의 군사적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병력의 확보, 성지의 수축, 병기의 준비, 군량의 확보 등 왜적의 침입에 사전에 대비하게 하였다.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하기 전에 김시민(金時敏), 이광악(李光岳) 등의 관군은 진주성 내에, 곽재우, 윤탁(尹鐸), 정언충(鄭彦忠), 김준민(金俊民), 최경회(崔慶會), 조응도(趙凝道), 정유경(鄭惟敬) 등의 의병들은 성 밖 동서남북 사방에 미리 배치하였으며, 왜적이 쳐들어오자 성 내외에서 합동하여 대처케 함으로써 진주대첩을 거두게 하였다. 이 진주대첩으로 호남을 방어하게 됨으로써 국가 중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593년 기민 구휼과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던 중 진주 공관에서 순국하였다.
학문적으로 그는 이황의 적전고제(嫡傳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해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다.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으로 전해져, 한말 의병 창기와 안동 독립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 ≪구씨의절(丘氏儀節)≫, ≪향교예집(鄕校禮輯)≫등을 참고해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임천서원(臨川書院),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海사錄)≫, ≪상례고증≫등이 있으며, <경연일기>, <조천일기>, <북정일기> 등이 전한다.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 : 道德博聞曰文 危身奉上曰忠)이다.

경내에는 묘우를 비롯하여 동서재, 강당, 전사청, 주사 등의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 중 묘당은 동향으로, 강당은 남향으로 건립되었는데 이는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하였기에 일정한 방향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문을 두고 있는 묘당인 숭정사(崇正祠)는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인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김성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전사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강당인 홍교당(弘敎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으로 전면에는 반칸 정도를 더 내어 툇마루를 만들었다.
강당의 좌우 각 1칸씩은 방으로 만들었고 전면에 직방제(直方齊), 건척제(乾惕齊)의 현판이 달려 있으며, 대청에는 임천서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동·서재인 응도재(凝道齋)와 양호재(養浩齋)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앞에 툇마루를 두고 뒤에는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정면인 입도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대문이다.


참고-안동관광정보센터 http://www.tourandong.com/
안동의 서원 http://anu.andong.ac.kr/
사이버한자 http://cyberhanja.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