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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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병산서원(屛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유성룡(柳成龍) 유 진(柳 袗)
   1572년(선조 5)
   1863년(철종 14)
   3월, 9월 초정(初丁)
   사적 제260호(1978.03.31지정)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5)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광해군5)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62년(현종3년)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류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 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1)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자온(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 (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해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유진(柳袗, 1582~16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아버지는 영의정 성룡(成龍)이다.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2년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묘(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잡았다.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634년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당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한다.
 

병산서원은 도동서원, 도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5대 서원으로 손꼽힌다. 전학후묘의 구성 원리에 따라 정문에서 시작하여 앞쪽에는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강학공간으로 구성하고, 중앙의 강당을 지나 서원 뒤쪽 가장 높은 곳에 배향 공간인 사당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서원건축은 교학(敎學)을 위한 강학 건물과 제향(祭享) 공간인 사당, 부속시설 이렇게 세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강학건물군으로 복례문(復禮門), 만대루(晩對樓), 동서재, 입교당(立敎堂), 장판각이 있고 제향건물군으로는 신문, 존덕사(尊德祠), 전사청이 있으며 부속시설군으로는 주소(庫直舍), 달팽이 뒷간, 광영지 등이있다.
 
1)복례문(復禮門)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한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원래는 지금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입교당 중건일기(1921)」에 의하면 서원의 측면인 만대루 동편에 있었던 것을 이건한 것이라 한다. 병산의 험한 형세를 피하고자 했던 풍수원리가 담겨있었다.
 
2)만대루(晩對樓)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팔작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이 웅장한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건축과 자연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말이다.
-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3)입교당(立敎堂)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이다.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렸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으로 가구는 5량(樑)이다. 강학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 세 부분으로 나뉜다. 양쪽 방에는 온돌을 들이고 중앙의 강학당은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툇마루가 마련된 명성재에는 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는 이른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4)동·서재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었다. 강당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5)장판각(藏板閣)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입교당 후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이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본의 소장량이다. 따라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6)존덕사(尊德祠)
서원에서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서애 선생과 수암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며 풍판이 설치된 맞배지붕건물이다. 변형된 익공(翼工)양식의 겹처마로 단청이 되어 있으며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7)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8)주소(廚所)
주소는 안동지방 고유의 뜰 집 형식인 ‘ㅁ’자형 건물군이다. 3칸 대청이 마당의 전면과 맞닿아 있고 양쪽으로 방을 들였다.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묘지기, 장무, 정지지기들이 거주하였고, 향사제 기간에는 참가자들을 위한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도의 건물을 고직사(庫直舍) 또는 교직사(校直舍)라고도 한다.
 
9)달팽이 뒷간
서원 밖 주소(廚所)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206호(1977년)로 지정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10)광영지(光影池)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 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꾸어 놓아 그 형태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병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던 고문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