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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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오암서원(鰲巖書院)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최항경(崔恒慶), 최은(崔은), 최린(崔轔)
   1730년
   
   매년 3월 초정(음력)
   
오암서원은 운암서원에서 출발한다. 1730년 지역 사림의 발의로 죽헌을 배향한 운암서원(雲巖書院)이 건립되었다.  운암서원은 1741년(영조 17)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당하고, 1782년 후손과 사림이 다시 죽헌이 지내던 오암정사 터에 오암서원(鰲巖書院: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으로 재건해 죽헌 두 아들(은·린)의 위패를 함께 봉안해 모시게 되었다. 보기 드물게 삼부자가 배향된 서원이다. 오암서원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또다시 훼철되었으나, 1978년 서원복원을 결의하고 1999년에 오암학계를 조직하여 2007년 서원복원 향사를 성료하였다. 

1) 죽헌 최항경(1560~1638)
 
죽헌과 죽헌의 두 아들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인 효덕사. 오암서원(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내에 있다.
“선생은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갖추고 가묘(家廟)에 배알한 뒤, 단정히 앉아서 책상을 대하고 두 아들과 더불어 종일토록 강론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집안 사람들이라도 그 게으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선생은 예(禮)를 좋아하여 이르기를 '예란 것은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고 경(敬)은 학문을 하는 시종(始終)이다. 예가 아니면 경을 지닐 수 없고 경이 아니면 예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죽헌(竹軒) 최항경(1560~1638)에 대해 제자인 고산(孤山) 김응려가 평한 글이다. 조선의 문신이자 대표적 성리학자인 한강(寒岡) 정구(1543~1620)의 수제자였던 죽헌은 벼슬을 하지 않고 이처럼 평생 학문과 수양을 통해 모두가 존경하는 선비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한강(寒岡) 문하에서 평생 도학을 닦으며 숨은 군자로 생활 
'아름답고 성한 창밖의 밭둔덕 대나무는(窓畔竹)/ 한겨울 추위에도 푸른 빛 변함 없네(歲寒不改色)/ 나는 위무공을 사모하노니(我思衛武公)/ 구십에 억시(抑詩)를 지어 자신을 경계했네(九十詩猶抑).’ 최항경이 스스로 '죽헌(竹軒)’이라는 호를 지은 뒤 같은 제목으로 읊은 시다. 참 선비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죽헌의 마음자세를 엿볼 수 있다. 위무공의 고사를 인용해 죽을 때까지 대나무처럼 변함없이 성리학이 지향하는 삶을 살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위무공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위나라 군주다. 55년간 재위하면서 95세의 수를 누렸는데, 90세가 넘어서도 억시를 지은 뒤 사람을 시켜 곁에서 수시로 읽게 하며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이 같은 삶의 철학을 지녔던 죽헌은 그 인생 행로도 남달랐다. 서울에서 태어난 죽헌은 1575년 부친이 선대의 묘소를 찾아보러 성주에 내려갔다가 별세를 하자, 성주로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고 상을 치르게 된다. 1577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려 했지만, 한강 정구가 전원(田園)과 선대의 묘가 있는 성주에 머물기를 권유하자 성주에 머물면서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게 되었다. 모친도 고명한 한강 선생에게 학문을 배울 것을 권유하고, 필요한 것들을 부족함이 없게 마련해 주면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독려했다. 
한강 문하에서 학문을 닦는데 매진하던 그는 160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이는 모친의 뜻을 따른 것이었고 자신의 뜻은 아니었다. 벼슬에 뜻이 없었던 죽헌은 거처 부근에 있는 오암(鰲巖) 위에 작은 집(鰲巖精舍)을 짓고 공부의 장소로 삼았다. 그리고 창 밖에는 푸른 대나무를 심어 함께 하면서 '죽헌’이라 호를 지은 뒤 그 현판을 달고, 담박하고 한가롭게 살았다. 
죽헌은 당시 지은 자경잠(自警箴)에서 '마음을 붙잡아 잠시라도 놓아버리지 마라. 이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깊이 탐구하여 투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치에 의존하고 욕심을 막으며 옳은 방법에 따라 공경하고 바르게 행해야 한다.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를 이루는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힘쓰는 것이다’고 했다. 
죽헌이 나이가 들면서 덕이 높아지고 그 명망이 날로 높아지자, 사림은 큰 논의나 시비가 있으면 반드시 그의 분석과 판단을 구하여 결정하였다. 

◆칭찬·배려로 사람 감동시켜 잘못을 깨닫게 해 
죽헌은 성품이 너그러워서, 비록 종들에게도 모진 말로 꾸짖거나 하지 않고 순하게 가르치고 달래어 모두로부터 환심을 샀다. 
그의 부인 류씨는 엄숙하고 무서운 편이었는데, 어느날 계집종이 장롱 속의 베와 명주를 훔쳐서 나가다가 마침 죽헌의 눈에 띄게 되었다. 계집종이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자, 죽헌이 조용히 이르되 “너는 두려워 말고 빨리 가서 집안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 부인이 알게 되면 반드시 중형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지나갈 수 있어도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후로는 다시 이런 행동을 하지 마라"고 타일렀다. 계집종은 감동해 울면서 갔고, 그 후로는 충성스럽고 착한 사람이 되어 속이거나 숨기는 일이 없었다. 
천곡서원(川谷書院) 원장 시절의 일이다. 가까운 마을에 신귀(申貴)라는 사람이 노모에게 매우 불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는 그를 불러 효도의 도리와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나는 네가 노모를 잘 모신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특별히 부른 것은 앞으로 더욱 힘쓰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 뒤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러자 그는 음식은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알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죽헌은 “과연 죄가 있고 그 죄를 안다면 크게 다행한 일이다. 음식을 보니 노모가 생각나서 눈물이 나는 모양이구나. 부모에게 마땅히 이같이 하는 것이 효도이니라"하며 종이를 주어 그 음식을 싸서 모친에게 갖다 드리게 했다. 그 후 신귀는 마침내 마음을 고쳐 효자가 되었다고 한다. 

◆“춥거나 배 고파서 고통스러운 것은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 

“선생은 언제나 의관을 바르게 하고 꿇어앉아 있으며, 게으르거나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면 주위의 제자들이나 가족에게 물러가게 한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문 밖에 이르면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가는데 선생은 이미 관대를 갖추었더라. 내가 좇아 배운 지가 30여년인데 관대를 하지 않을 때를 보지 못했다. 한강 선생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면 반드시 일어나서 받아 공경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읽기를 마친 뒤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났다가 앉으셨다." 밤낮으로 죽헌을 곁에서 지켜본 제자의 기록이다. 
그는 밥 먹을 때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귀천과 친소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먹던 밥도 다 먹지 않고 상을 물렸으며, 또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과 더불어 말할 때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말하기를 “나는 듣지 못한 바이다"라고 하고, 다른 사람의 선함을 말하는 이가 있으면 “나도 또한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다. 그의 덕화력(德化力)이 어떠했는지 엿보게 하는 일이다. 
종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꾸짖거나 벌하는 일이 없이 부드러운 언행으로 감화시켜 즐겁게 생활하도록 하니, 상하가 모두 기뻐하고 한 사람도 탄식하거나 원망하는 소리가 없었다. 가난하고 곤궁한 것을 보면 구제해 주었고, 멀리 있거나 천한 자라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춥고 따스하고 배 고프고 배 부른 것은 누구든지 나와 같을 것이다"고 말했다. 
말이 없고 마음 속에는 헤아림이 많았던 그의 덕화력은 '마치 물이 사물을 윤택하게 하는데도 사물이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윤택해지는 줄 아는 것과 같고, 꽃의 향기가 사람을 흐뭇하게 해 주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흐뭇해하는 것과 같았다’는 평을 들었다. 

◆“굶주린 사람이 밥 구하듯이 도를 구하라" 
인조 14년(1636) 겨울, 병자호란으로 오랑캐 군대가 침략해 서울이 함락되고 나라가 위급함에 처한 상황을 듣게 된 죽헌은 나이가 일흔일곱의 고령이라 “일찍이 섬 오랑캐의 난리를 당해서는 노모가 집에 계시어 자유롭지 못했고, 금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늙어서 어찌할 수가 없으니 신자(臣子)의 직분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고 탄식한 뒤, “나는 늙어 쓸모가 없으니 너희들은 나를 돌볼 생각을 말고 힘을 합해 충과 효를 다하도록 하라"며, 두 아들에게 바로 고령의 의병소(義兵所)에 나아가게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내 죽지 않고 오늘의 국치를 보게 되니 어찌 통분하지 않으리오"라고 말했다. 그 때 남긴 통분시(痛憤詩)다. 
'가을 깊어 서리 낀 볼에 책과 칼도 슬퍼하는데/ 나쁜 기운의 오랑캐 날뜀에 분개하노라/ 내가 만약 나이 젊은 장년이었다면/ 군진에 따라가서 작전을 지휘하리.’ 
죽헌은 이날 이후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살다가 1638년 초여름에 생을 마감했다.
죽헌은 붓글씨 솜씨가 당대를 대표할 정도로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필력을 자랑한 적이 없었다. 그의 필법은 해동명필첩(海東名筆貼)에 많이 수록돼 있다.

 
2) 최은(1583~1656)
본관은 영천이며 자는 사행(士行), 호는 관봉(鸛峰)이다. 죽헌 최항경의 장자인데 안동 화음 권양가로 취가하고 부친을 따라 한강 정구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3년 동생 최린과 함께 사마시에 연벽등과(聯璧登科)로 합격하였다.
뵹자호란 때 부친의 명을 따라 동생 린과 함께 조카 진화를 대동하고 고령 창의소에 출진하였으나 남한산성 함락 소식을 접하자 통한의 분루시를 남겼다.
 
3) 최린(崔轔 1597~1644)
자는 사발(士發), 호는 매와(梅窩)이다. 죽헌 최항경의 둘째 아들로 연안 죽제 이시익의 딸을 맞이하여 혼인하였다. 8세에 아버지를 따라 한강 정구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633년 형과 함께 사마시에 올랐으나 역시 벼슬길에 뜻을 주지 않았다. 스승 한강 정구 선생이 돌아가신 후 여헌 장현광에게 종학하여 물자설(勿字說)을 피력하였다. 작천정사에다 집을 짓고 정원에 매화나무를 심어 그 매화의 능한(凌寒)의 지조에 감탄하여 매와로 자호하고 편액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635년에는 퇴계이선생변무소(辨誣疏)를 써서 수학동문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호란 때에는 의군으로 문경까지 진군하였으나 강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여 돌아와 치광자(痴狂子)라 별호하게 되었고 이후 중국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효덕사, 내삼문, 대강당, 동무인 경성재(敬誠齋),오암정사, 광영루 외 원장 및 부속건물 1동이 있고 죽헌선생유허비가 있다.

오암서원석비와 미수 허목선생이 쓴 글씨인 오암(鰲巖), 죽헌고택, 신도비, 문집목판본200여매, 서원찬건기문현판 등이 남아있다.

참고자료 : 영천최씨 법산문중대종회 발간 오암서원 법산요람(法山要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