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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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흥암서원(興巖書院)
   http://www.nrich.go.kr/kr/mmulti/mContentV.jsp?ca_id=4&arc_id=447&arc_… [954]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리 769
   송준길(宋浚吉)
   1702년(숙종 28)
   1716년(숙종 42)
   3월, 9월 상정(上丁)
   경상북도기념물 제61호(1985.10.15지정)
이 서원은 송준길(宋浚吉)의 위패를 모시고 그의 덕을 기리며 후학(後學)들을 교학(敎學)하던 사학기관(私學機關)이다. 1702년(숙종 28)에 창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 흥암서원(興巖書院)으로 어필사액이 내려지고 좌부승지 유숭(兪崇)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이 때 어필비각(御筆碑閣)및 하마비를 건립하였고, 1809년(순조 9)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서원훼철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1)송준길(宋浚吉, 1606~167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세영(世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응서(應瑞)이고, 아버지는 영천군수(榮川郡守) 이창(爾昌)이다.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사헌부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 정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진선(進善)·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집의·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 대사헌·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쳤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 만 1년)를 주장할 때 그를 지지하였다.
이에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겸 좨주·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단지,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1675년(숙종 1) 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 상소가 있은 다음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충현서원(忠賢書院)·봉암서원(鳳巖書院)·돈암서원(遯巖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창주서원(滄洲書院)·흥암서원(興巖書院)·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 ≪어록해 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棨殉節碑文)이 있다.

경내 건물로는 흥암사, 진수당, 집의재, 의인재, 어필비각 등이 있다.
 
1)강당
강당(講堂)인 진수당(進修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이익공식(二翼工式) 건축인데, 특히 내부의 가구(架構)에서 독특한 의장을 이루고 있다. 진수당 안에는 1705년 예조좌랑 오수경이 지이사제문, 절목, 기 등 많은 현판이 걸려 있고 동춘당집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2)동·서재
강당 뒤에는 동(東)·서(西) 양재(兩齋)인 의인재(依仁齋)와 진의재(進義齋)가 있다.
 
3)사당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사당인 흥암사(興巖祠)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익공식 단층 맞배집으로 자리잡고 있다.
 
4)기타
담장 밖 남쪽에는 어필각(御筆閣)이 있다. 어필비각 안에는 숙종이 지어준 ‘흥암서원’이라 새긴 비가 있다. 비각 앞에는 수령이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있다.

흥암서원에는 「심원록」을 비롯하여 「흥암서원재산목록」, 「청금록」, 「권장계수지부」등 총 14건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15개의 현판이 있는데, 그 가운데 어필각에는 숙종이 쓴 ‘흥암서원’ 음각판과 의정부 좌찬성 민진후의 글씨로 된 ‘비망기’가 보관되어 있다. 책판으로는 「동춘당집」, 「동허재선생집」, 「역천선생문집」, 「춘추」등이 있다. 이 외에 비석과 하마비 각 1기가 있다. 서울대학교규장각에 흥암서원사실록이 보관되어 있다.
 
1)흥암서원비
비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앞부분은 영조의 비망기이고 뒷부분은 권상하가 쓴 비문이다.
비망기의 내용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존숭하는 흥암서원의 편액을 영조 자신의 친필로 내려 존경을 표시하니 사설이 잠재워질 것이라고 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임금이 송시열과 송준길의 올바름을 알고 직접 편액을 써서 걸게 하면서 비망기를 내려주었으므로 어진 사람을 높이고 사설을 배척한 공이 크다고 한 뒤, 이로 인해 사문이 안정되고 선비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 하였다.
흥암서원의 선비들이 오래도록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해 비를 세워 글을 새기자고 하였으므로 전말을 기록한다고 덧붙였다.
 
참고-경북서원지
문화재청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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