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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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계서원(道溪書院)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이 유(李 瑜) 이보흠(李甫欽) 이수형(李守亨) 이여빈(李汝馪)
   1610년(광해군 2)
   
   10월 1일
   
1610년(광해군 2)에 창건되었으며 이수형(李秀亨)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이유(李瑜) 이보흠(李甫欽) 이여빈(李汝馪)을 추가 배향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강당인 10칸의 공극루만 남아 있다가 우계이씨 문중의 노력으로 2005년 복원 되었다.

1)이유(李瑜, 1426~1457)
조선 전기의 왕자. 이름은 유(瑜). 아버지는 세종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 해 태조의 일곱 째 아들인 방번(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와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몇몇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그 해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해 왕위를 선양받았다.
이듬 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결과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 때 그도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해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해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에 육종영(六宗英 : 안평대군외 6인의 종친에게 神主配享을 내린 일)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도 괴산군 청안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2)이보흠(李甫欽, ?~145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아버지는 부사직 현보(玄寶)이다.
1429년(세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30년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서 공법(貢法)의 논의에 참여해 전제(田制)와 세법을 상론하였다. 1434년에는 사정(司正)으로서 우효강(禹孝剛)·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박사를 역임하고, 1443년 감찰로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주부가 되었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나 공법 논의 등에 참여하였다.
1445년에는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해, 사창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의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대구 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 ‘순량(循良)’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그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京職)에 초탁(超擢)하려 했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해 임기를 마쳤다.
그 공으로 1452년(문종 2) 장령에 초배(超拜)되었고 1454년(단종 2) 직예문관으로서 ≪세종실록≫ 편수의 기주관이 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몰아낸 이후는 지순흥군사(知順興郡事)로 보외(補外)되었다가 1457년(세조 3) 순흥에 유배중인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와 함께 재향품관(在鄕品官)·군사(軍士)·향리(鄕吏) 등 이른바 영남 사인들을 규합해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박천에 유배된 뒤 같은 해 10월에 교살되었다.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인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제자인 유방선 (柳方善)에게 출신지인 영천에서 수학한 점, 길재(吉再)의 묘에 제사를 지낸 점, 그리고 대구의 수령을 맡을 때 공렴품관(公廉品官) 등 영남 지방의 재향사류(在鄕士類)와 연결해 성리학적 향촌 질서의 이론으로 주자(朱子)가 고안한 사창법을 최초로 실시한 점 등으로 미루어 영남 성리학 학통의 계승 과정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 때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도 청안(淸安)의 향사(鄕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3)이수형(李守亨, 1435~1528)
자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 본관은 우계이다. 음(蔭)으로 출사하였으며, 평시서령(平市署令)으로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조려(趙旅)와 함께 원주 치악산 바위에 충절을 맹세하는 이름을 나란히 새겨 놓고 순흥 도지리에 은거하였다. 거실을 지었는데 삼면을 벽이고 북쪽에 창문을 내였으니 북쪽은 영월에 단종의 능침이 있기 때문이었고, 늘은 이광정이 그 거실에 ‘공북헌(拱北軒)’이라는 편액을 달았고, 창설 권두경은 천인실(千仞室)이라 이름하였다. 좌승지로 추증되었다가 이조참판으로 가증되었다.
 
4)이여빈(李汝馪, 1556~163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 아버지는 참봉 효신(孝信)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4대손인 귀윤(貴胤)의 딸이다. 한우(韓佑)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으로 나갔으나 1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문란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鑑谷)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1614년 옥사가 일어나 이이첨과 정인홍이 폐비를 주장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옳지 못함을 상소하고 7일 동안 합문(閤門) 앞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취사문집≫ 6권이 전한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廟宇)인 견일사(見一祠), 강당인 공극루(拱極樓), 동재(東齋)인 공북헌(拱北軒), 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고 강당인 10칸의 공극루만 남아있다가 2005년 복원 되었다.

참고-경북서원지
우계이씨 취사공파 http://chwoogaelee.ne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