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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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근암서원(近嵒書院)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148-1
   홍언충(洪彦忠) 김홍민(金弘敏) 이덕형(李德馨) 이 구(李 榘) 홍여하(洪汝河) 이만부(李萬敷) 권상일(權相一)
   1544년(중종 39)
   
   음력 3월 상해(上亥)
   문경근암서원소장유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77호(2006.01.02지정)
본 서원書院은 처음 1551년(명종明宗6)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선생이 세운 18서당의 하나인 영빈서당이 그 모태로 고노古老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현촌縣村 천변창사남川邊倉舍南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산양창의 남쪽 10리 지점에 해당되는 지점이라고 하였다.
처음 이 고장 출신으로 甲子士禍에 피화되어 해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선생을 모시기 위한 사당을 짓겠다는 논의가 이루어져 활재活齋 이구李榘가 계사癸巳년 4월에 상주목사에게 정문呈文을 올리고 이어 갑진甲辰년 7월에 부사를 역임한 전명룡全命龍이 다시 정문呈文을 올려 관의 승인을 받아 1665년(현종6)을사乙巳에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을 배향하여 향현사鄕賢祠가 되었으며 그 후 4년 뒤인 1669년(현종顯宗10) 을유己酉에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을 추배하고 예조의 허가를 받아 서원書院으로 승원陞院하였다.
1702년(숙종28)에는 사담 김홍민沙潭 金弘敏,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 두 선생을 추배하고 1786(정조10) 병오丙午에 활재 이구活齋 李榘,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세 분 선생을 배향하여 7현사가 되었으며 묘호는 경모사景慕祠, 원호院號는 근암近嵒이다. 근암서당近嵒書堂의 현액懸額 글씨는 장문당藏文堂 원진해元震海(1594-1651)의 글씨인데 서원으로 승원陞院 하면서 “원院”자를 조시호曺時虎가 고쳤다고 한다.
흥교당興敎堂과 주일재主一齋의 글씨는 상주목사를 역임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龍의 글씨이고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岺이 지나다 이곳에 들러 지은 시판의 글씨는 교관 신명전敎官 申命傳의 글씨이며 지원루知遠樓 욕인재欲仁齋 유의재喩義齋의 현액懸額은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가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와 이산서원원규伊山書院院規는 처사 오상원處士 吳尙遠의 글씨이다. 1870년(고종高宗7)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毁撤되고 다시 복원하였다.
 
(현現 근암서원近嵒書院 현액懸額은 1982년 중건 때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先生의 14대손인 처사 성암 이원기處士 星庵 李源箕선생이 썼고 2011년 중건 때 탁본하여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암 이원기 처사의 14세 때 쓴 글씨라고도 전한다)
 
* 연표
- 1551년(명종5) - 영천 신잠 목사가 영빈서당을 세움)
  (1544년(중종39) 근암서당 창건)
- 1653년(효종4) - 4월에 활재 이구 등 사림에서 우암 홍언충을 배향하는 향현사 건립을 상주목사에게 청원
- 1664년(현종5) - 부사를 지낸 전명룡 등이 다시 정문을 올려 관의 승인으로 우암 홍언충을 배향하는 향현사 건립승인
- 1665년(현종6) - 우암 홍언충을 배향
- 1669년(현종10) - 한음 이덕형 추배. 서원으로 승원
- 1702년(숙종28) - 사담 김홍민, 목재 홍여하, 두분을 추배
- 1786년(정조10) - 활재 이구, 식산 이만부, 청대 권상일의 세분 선생을 추배하여 배향선현 은 7현이 되었다
- 1870년(고종7) - 서원 훼철毁撤令에 의해 훼철毁撤
 근암서원은 지난 1970년대 후학들에 의해 사당과 강당이 일부 복원됐지만 과거의 모습에 비하면 규모면에서 매우 축소되는 등으로 서원 기능을 잃었었다.
문경시는 최근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4천766㎡에 총사업비 30억원을 들여 사당과 전사청, 강당, 내삼문, 동재, 서재, 누문, 관리사 등 모두 9동으로 근암서원 복원을 마치고 2011년 완공하였다. 게제된 사진은 근암서원 준공 낙성 고유행사 장면들이다.
 

1)홍언충(洪彦忠, 1473~150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卿), 호는 우암(寓菴). 득우(得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손(孝孫)이고, 아버지는 참찬 귀달(貴達)이며, 어머니는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또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질정관(質正官)·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1503년 수찬(修撰)으로 복직해 교리(敎理)가 되고, 그 해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다시 거제도(巨濟島)로 이배되었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해 조용히 길을 떠났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천성이 신중하면서 솔직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만사 自挽辭≫가 있다.
 
2)김홍민 (金弘敏, 1540~159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임보(任甫), 호는 사담(沙潭). 예강(禮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윤검(允儉)이고, 아버지는 옥과현감 범(範)이며, 어머니는 찬녕조씨(昌寧曺氏)이다. 홍미(弘微)의 형이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삼사(三司)를 거쳐, 1584년 이조좌랑으로 삼사와 같이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였다. 사인(舍人)에 이어 1590년 전한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규합하여 충보군(忠報軍)이라 칭하고 상주에서 적의 통로를 막아 적군이 부득이 호서지역으로 통행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중년 이후로 주자서(朱子書)와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을 탐독하였고 역학에도 뜻을 두었으며, 역사서로는 주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읽었다.
 
3)이덕형(李德馨, 156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부사과(副司果) 수충(守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진경(振慶)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며, 어머니는 현량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한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다. 이듬 해 서총대의 응제(應製)에서 장원을 했고, 이 외의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 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 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했다 한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란 중 줄곧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4)이구(李榘, 1613~1654)
자는 대방(大方), 호는 활재(活齋)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괴산 재월리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에서의 항복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한 성리학자이다. 학문적인 성향은 이황의 이기설을 따르고 이이의 학설을 반박하였으며, 논설에서는 주자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다. 저술로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인 3칸의 경현사(景賢祠), 4칸의 강당, 신문(神門), 4칸의 고자처(庫子處)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홍언충과 이덕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양쪽에는 김홍민·홍여하·이구·이만부·권상일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문경시는 엄원식 학예사 등이 앞장서서 최근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4천766㎡에 총사업비 30억원을 들여 사당과 전사청, 강당, 내삼문, 동재, 서재, 누문, 관리사 등 모두 9동으로 구성된 근암서원 복원을 마치고 2011년에 준공하였다.

1)문경근암서원소장유물-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77호(2006.01.02지정)
지난 2006년 1월2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문경근암서원 소장유물은 총 843점으로 교지(敎旨) 63점, 첩지(牒紙) 4점, 영지(令旨) 4점, 전지(傳旨) 1점,증시(贈諡) 1점,
참고-경북서원지
경북일보 http://www.kyongbuk.co.kr/
지방자치 네트워크 http://www.kyongbuk.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