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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최충(984~1068) 자는 호연(浩然)이고,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등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본관은 해주(海州)로서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1005년(목종 8) 22세로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1055년(문종 9)까지 50여 년간 다섯 왕을 도우며 역사(歷仕)하였고, 관력은 요직을 두루 거쳐 문하시중에 이를 정도로 매우 화려하였다.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고,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형부상서(刑部尙書)·중추사(中樞使)를 역임하고, 1037년(정종 3) 참지정사(參知政事)·수국사(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 초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법률관에게 율령을 가르침으로써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1055년(문종 9)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한 후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는 최초의 사학(私學)을 설치하고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 그 외에 여름에는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돌아다니며 시부(詩賦)를 짓고 향반주례(鄕飯酒禮) 등 의례(儀禮)를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들을 최문헌공도(崔文憲公徒)라 한다. 그의 가장 큰 공헌과 업적은 바로 사학(私學)을 설립한 것이다. 구재학당을 효시로 해서 당시의 유신(儒臣)들은 각기 학당을 짓고 학도를 모아 교학에 힘썼으니 이름난 것이 12도(十二徒)나 된다. 이들은 거의가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한 중기(中機) 사람들이다. 그는 재당(齋堂) 안에서 경전사서(經典史書)를 읽는 외에 산수(山水)를 노래하고, 권진(勸進)하는 목표를 인의(仁義)와 인륜도덕(人倫道德)에 두었다. 그의 교학정신은 사학의 창설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9재 학당의 교과목은 9경과 3사였고, 여름에는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시부를 짓고 향음주례 등 의례를 익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9재의 명칭은 두 개를 제외하고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