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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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암서원(道巖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배여경(裵汝慶) 조영득(趙靈得) 조익성(趙益誠) 황후간(黃後幹)
   1679년(숙종 5)
   
   불향
   
도암서원은 1679년(숙종 5) 배여경(裵汝慶), 조영득(趙靈得), 조익성(趙益誠), 황후간(黃後幹) 등 네 사람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나 후손들의 성의에 의해 1940년에 당(堂)을 세우고 도암서당이라 현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암서당기의 기문은 1941년에 송준필(宋浚弼)이 찬(撰)하였다.

1)주벽-배여경(裵汝慶, 1622~1696)
자(字)는 선여(善餘), 호(號)는 일성재(一誠齋). 분성군(盆城君) 휘(諱) 원룡(元龍)의 15세손이며 선무랑(宣務郞) 휘(諱) 후도(後度)의 장남(長男)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순박하고 아름다웠다. 또한 효우(孝友)가 돈독(敦篤)하여 아우 정릉참봉(貞陵參奉) 여영(汝榮)과 더불어 같은 방에서 거주(居住)하였고 잠을 잘 때면 나란히 누워 한 이불을 덮었다. 1659년(효종 10)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1661년(현종 2)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했다. 그 후 6년 동안 묘막(墓幕)에서 거주(居住)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조석(朝夕)으로 묘소(墓所)에 가서 절하였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인도하였으며 제수(祭需)로 쓸 꿩을 잡아 우물가에서 공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기거하던 묘막이 다하니 묘소(墓所) 아래에 다시 지었으며 사절제(四節祭) 때면 하루에 세 번 성의(誠意)를 다하여 제물을 올리고 호곡(號哭)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사림(士林)에서 그 제사(祭祀)를 일컬어 일성(一誠)이라 하였다. 1659년(숙종 21)에 공의 지극(至極)한 효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배수하였고 이듬해 향년(享年) 75세로 하세(下世)하니 임금께서 공의 행의(行誼)를 가상히 여겨 승의랑(承議郞)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증직(贈職)하였으며, 1736(영조 12)에 사림(士林)에서 도암서원(道岩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묘소(墓所)는 경남(慶南) 함안군 군복면 소포리 오당골에 있다.
 
2)조영득(趙靈得, 1666~1736)
자는 희숙(喜叔), 호는 낙계(樂溪)이다. 평생에 걸쳐 효성이 지극했으며 가산이 여러 번 곤경에 빠질 정도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선을 베풀었다.
 
3)조익성(趙益誠)
충효는 하늘로부터 타고 났다. 무신년의 변란에 백의종군하여 죽음을 맹세한 시가 있는데 이르기를 “의분에 복받쳐 배를 타고 힘주어 맹세하니, 강바람 사납게 소리쳐 물결이 우네, 단검으로 종군하는 날을 그는 알리라, 군신의는 중하고 한번 죽음은 가벼우리”하였다. 종사관 강규환(姜奎煥)이 증정한 시에 이르기를, “변란 중에 어찌 충신이 없다 하리, 남창의 덕망 높은 그 사람들이네, 단검으로 종군하는 날을 지금 보지, 대소헌 선생에게도 후손이 있었네”라고 하였다.
 
4)황후간(黃後幹, 1700~1773)
호는 이봉(夷峰)이다. 이재(李栽)와 김성탁(金聖鐸)에게 사사(師事) 받아 도의를 연마했다. 성리학을 궁구하여 높은 학문의 경지를 이룩했으며 사부(師傅)가 되었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