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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9대서원 - 옥산서원


 
작성일 : 12-09-16 14:49
옥산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9,144  


옥산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이 병 훈
(영남대 국사학과 강사)
 
 
1. 옥산서원의 연혁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번지(구: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옥산서원)에 위치하고 있는 玉山書院은, 대원군의 서원 훼철시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로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지역의 首院 역할을 해왔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학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1572년에 회재의 평소 藏修之地였던 紫玉山 아래에 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곳은 회재가 別業을 짓고 학문에 힘썼던 곳으로서 회재 사후 내외손, 향촌사림(權德麟 외 13인), 지방관(府尹 李齊閔, 朴承任)의 상호 협조 하에 건립되었다. 이때 경주부윤 이제민은 서원 인근의 定惠寺와 斗德寺 및 沙器, 水鐵, 冶鐵 各店을 서원에 소속시켜 그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573년 2월 서악서원에 봉안되어 있던 회재의 위판을 이안하고, 같은 해 12월 監司 金繼輝의 啓達로 賜額을 받았다. 또한 주향자인 회재가 1610년 東方5賢의 한 분으로 文廟에 종사되자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옥산서원은 엄격한 기준으로 유생을 선발하여 교육활동 뿐만 아니라 경주지역 유림들의 공부를 위한 도서관적 역할 및 유생교육 교재·문집 등 서적을 직접 출판하기도 하여 지방출판문화의 중심지로서 기여하였다. 이러한 기능은 1577년과 1590년에 四書六經과 性理書을 宣賜받음으로써 가능하였다. 또한 서원 측에서는 서책출판을 담당하는 刊所를 별도로 설치·운영하였다.
옥산서원은 경주유림들의 근거지로서 유생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등의 역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별, 집단적 정치·사회적 활동에 구체적인 물질적 지원을 담당하기도 했다. 즉, 옥산서원은 동서·남북 분당이후 이언적이 이황과 함께 남인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으면서 퇴계를 배향하는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인식되었다.
옥산서원은 1967년 사적 제154호로 지정 되었으며, 서원에 보관 중인 『三國史記』(9책)는 보물 제525호로 지정되었다. 주변에는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獨樂堂(보물 제413호)과 屬寺였던 정혜사의 터가 남아있는데, 독락당 어서각의 『續大學或問』(1책)·『李彦迪 手稿本 一括』(13책) 은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공부하는 장소인 求仁堂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體仁廟가 뒤에 위치한 前學後廟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839년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로 ‘玉山書院’ 현판은 이산해와 김정희가 각기 썼다. 그 외에도 정문인 亦樂門을 지나면, 2층 누각인 無邊樓가 나오는데 그 현판은 한호가 쓴 것이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인 敏求齋와 闇修齋가 있다.강당과 묘우사이에는 회재의 神道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가 있는 비각이 있으며, 이외에도經閣(御書閣), 文集版閣, 典祀廳, 庫直舍, 庖舍, 마구간 등의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유물전시관인 ‘淸芬閣’이 있었지만, 2010년에 <玉山書院遺物展示館>을 지으면서 헐어버리고 모든 유물을 신축한 유물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2. 소장 자료의 전래와 현황
 
1) 옥산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현재까지 가장 많은 전적을 보유하고 있는 서원 중 하나이다. 1862년5월에 작성한 『書冊現在都錄』의 完文에는 서원 서책을 ‘院門外不出’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것으로서 퇴계가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1862)에 이르러 도서의 분실이 잦은 까닭에 이 완문의 내용을 판각하여 經閣의 門楣에 달아 경계토록 하고, 任司가 열람한 날짜와 사람, 책명을 기록한 후(『丙午 4月 書冊借去錄』, 1책이 남아있음) 직접 돌려받고 혹 그 책을 잃어버리면 임사가 반드시 다른 것을 구하여 돌려놓도록 규정하였다. 이처럼 도서 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썼기에 오늘날 많은 서적이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옥산서원에서는 經閣(御書閣)과 文集版閣, 定惠寺에 각기 서적, 문서와 목판(冊版, 詩板)을 구분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던 중 1834년 屬寺였던 정혜사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그곳에 보관 중이던 책판은 모두 옥산서원으로 옮겨졌다. 또한 회재의 별업이었던 독락당에는 이전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오면서 회재가 개인적으로 宣賜받은 서적과 그가 보던 手澤本, 후손이 수집한 서적 및 고문서, 19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관서문답록』, 『잠계선생유고』 등)이 보관·전승되어 오고 있다. 독락당 소장 자료들 중 內賜本과手澤本을 제외한 서적류는 1972년 淸芬閣을 지으면서 모두 옮겨왔으며, 옥산서원에서도 경각에 보관하던 전적과 고문서, 문집판각의 시판 및 기타 유물 등을 옮겨서 일괄 보관해 왔었다. 그런 가운데 유물의 훼손방지와 도난예방 및 일반인들의 열람이 가능하도록 2010년에 <옥산서원유물전시관>을 신축하여 현재, 서원 소장 전적과 고문서, 유물 및 목판(책판, 현판, 시판) 등을 최신 설비의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3) 옥산서원에는 (刊所)傳與記(46책), 書冊傳與記(1책), 書冊傳與都錄(2책), 書冊都錄(2책), (玉山書院)書冊記(3책), 書冊借去錄(1책), 獨樂堂 書冊都錄(1책, 甲寅 4월) 등과 같이 書名은 다르지만 任司의 인수인계나 포쇄시에 작성한 문건이 남아있다. 이 성책류들의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宣賜本과 古文書의 연대로 추정해보면, 18세기 중반이후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20세기 이전 옥산서원과 독락당에 소장되어 있던 전적, 고문서 및 유물 등을 파악하는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 연도가 확인되는1862년 5월의『書冊都錄』을 보면, 당시에 宣賜本 20종 346책과 院備本 374종 2,199책 등 총 394종2,545책이 확인된다. 또한 이들 서적과 문서는 다양한 크기의 櫃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문서의 경우 모든 기록이 일률적이지는 않지만, 대개 대궤에는『정서등록』과 노비·토지매매문서, 통문, 전답안, 노비추쇄안, 定惠寺 및 각 店所관련 문서 등 주로 서원의 재정(경제) 및 사회활동과 관련된 문건을 보관하고, 중궤에는 執事記, 笏記, 入院錄, 傳與記 등 서원 제향 및 임원, 인수인계 관련 문서를 보관하였다. 그 외의 명문,완문, 관문, 통문, 추수기, 관문, 각종 회계록 등은 잡문서로 묶어 보관하였다. 또한 유사한 문건은 여러 장을 1권으로 묶어 기록했기 때문에 정확한 문서의 수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서적은 책장에 보관하였는데 尋院錄, 書冊記, 攷往錄도 같이 관리하였으며, 내사본은 별도의 金櫃에 보관하고 있었다.
 
4) 옥산서원 고전적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조성되었다. 우선, 옥산서원이 사액될 때 나라에서 내린 ‘內賜本’이 있다. 이것이 옥산서원 전적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로도 1577년, 1590년 등 수시로 내사가 이루어졌다. 서원 소장『서책도록』·『전여기』등을 통해 확인되는 내사본은『周易』·『詩傳』·『書傳』·『春秋』·『禮記』·『論語』·『御定春秋四傳』·『論語諺解』·『孟子大文』·『孟子俱解』·『中庸俱解』·『性理大全』·『朱子大全』·『鄕禮合編』·『國朝儒先錄』·『御定朱書百選』·『朱子語類』·『御定奎章全韻』·『御定五經百編』·『御製雅頌』·『御製大學續或問』등이 있다. 둘째, 지방관아와 감영에서 도서를 간행하여 보낸 경우로서 관아에서 간행했거나 비축하고 있던 도서를 보낸 경우이다. 일례로 경주부에서는『東萊先生音註唐鑑』을, 慶尙監營에서는『書傳大全』·『二倫行實圖』·『孟子諺解』·『孟子集註大全』등을 보내왔다. 셋째, 인근의 서원이나 문중에서 간행하여 보낸 경우이다. 『帝王曆年通攷』는 서악서원에서 인쇄하여 보낸 것으로 주기되어 있는데, 이외에도 많은 도서가 상호 교환 형식으로 기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향교나 사찰에서 기증한 것도 있었다. 개인이 기증한 도서로는 이언적이 內賜 받은『二倫行實圖』·『埤雅』·『皇華集』등이 서원 장서목록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외에는 대부분 문집이나 傳記類의 도서로서 후손들로부터 기증되었다. 넷째는 서원 자체의 판단에 의해 간행하거나 구입한 전적들이다. 구입도서는 주로 교육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小學, 四書五經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 史書와 詩文의 도서가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자체 간행본으로 『晦齋先生年譜』,『晦齋先生集』,『漢史列傳抄』,『太極圖說』,『續大學或問』,『奉先雜儀』,『中庸九經衍義』,『金南窓所書元朝五箴及太極門辨』,『晦齋所製退溪所書十六詠及元朝五箴』,『求仁錄』,『近思錄』,『大學章句補遺』,『太極書饌集辨誣錄』,『晦齋年譜』와 19세기 이후 『無忝堂文集』,『龜峯先生遺集』,『蒙庵先生文集』,『晦齋別集』등을 간행하여 총 19종이 있다. 주로 성리서와 회재문집을 직접 간행하였는데, 19세기 이후부터는 후손들의 문집을 주로 간행하였다.
 
5)『傳與記』冊版帙에서는 작성 당시에 보관하고 있던 책판을 소개하고 있다. 『전여기』의 작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책판의 출입이 언제 이뤄졌는지 파악하기 힘들지만 『東京雜記』(1670), 『鏤板考』(1796), 『金鰲勝覽』(1936)을 통해 그 대강은 확인할 수 있다.
옥산서원에서는 서적을 출판하기 위해 별도의 刊所를 두어 운영했는데, 간행에 사용한 책판은 문집판각과屬寺였던 정혜사에 나눠서 보관하였다. 1670년 정혜사에는 『九經衍義』·『求仁錄』·『金南窓所書元朝五箴及太極問辨』·『大學補遺』·『梅月堂四遊錄』·『奉先雜儀』·『櫟翁稗說』·『益齋集』·『抄漢書』·『太極圖說』·『韓濩所書赤壁賦』·『晦齋文集』·『晦齋所製退溪所書十六詠及元朝五箴』·『孝行錄』등 14종의 책판이 있었다. 이중 경주부에서 간행한 『매월당사유록』, 『역옹패설』, 『적벽부』,『효행록』, 『익재집』 등을 제외한 나머지가 옥산서원에서 간행한 것이다.
1796년에는 옥산서원에 소장된 책판으로 『求仁錄』·『近思錄』·『大學章句補遺』·『奉先雜儀』·『中庸九經衍義』·『太極問辨』·『晦齋集』등 7종이 확인된다. 1936년 『금오승람』에서는 1670년 정혜사 소장 책판 14종 외에 『東史纂要』,『晦齋別集』등이 새로 확인된다. 이중 『동사찬요』는 1609년 경주부에서 간행한 관판본이며, 『회재별집』은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1934년 옥산서원에서 간행한 것이다. 『금오승람』에는 정혜사 소장 책판이 옥산서원으로 옮겨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834년 정혜사가 화재로 전소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옥산서원 소장된 각종『전여기(도록)』등에 보이는 책판을 모두 망라하면 『九經衍義』(345판),『晦齋先生文集(舊)』(106판),『晦齋先生文集(新)』(184판),『大學章句補遺』(23판),『近思錄』(126판),『求仁錄』(77판),『奉先雜儀』(223판),『大元朝五箴』(81판),『十六詠』(8판),『太極問辨』,『漢書』(77판) 책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東京誌』(97판),『益齋集』(90판),『櫟翁稗說』(33판),『益齋畵像』,『漢書板』(77판),『孝行錄』(25판),『心經』(73판) 등이 있었다. 이 중『효행록』,『심경』,『익재집』,『역옹패설』,『익재화상』등은 慶州府에서 판각한 것으로 정혜사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 改版을 위하여 잠시 옥산서원에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附記되어 있다. 그러나 『동경지』는 입수 경로를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옥산서원에서 간행된 책판은 옥산서원과 정혜사 등에 分藏하고 있었으며, 인쇄내지 改版을 위하여 수시로 옮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부에서 간행한 일부 책판도 이 두 곳에 보관되기도 했는데, 정혜사 화재를 전후한 시기에 益齋와 관련된 책판은 양월의 구강서원으로 옮겨지고 옥산서원에는 회재와 관련된 책판만이 남게 되었다. 특히, 『회재집』은 1575년 경주부에서 初刊한 이래 1600년에 다시 重刊하였고,이후 3刊(1624)부터 10刊(1926)까지는 옥산서원에서 간행하였다.
 
 
3. 자료조사ㆍ연구 현황과 기타 기록자료
 
1) 옥산서원 소장 자료는 크게 고서, 고문서(성책류 포함), 목판 자료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자료는 서원의 교육과 출판(도서관) 및 행정(경제), 사회·정치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서원 측에서는 일찍이 院規로서 소장 자료의 접근을 제한하고 傳與(掌)記, 都錄 등을 만들어 이를 전승, 관리하는데 힘을 쏟아왔다. 그러나 서원 측에서 중요시 한 것은 藏書와 서원 운영과 관련된 자료에 국한함으로써 그 외의 수많은 문서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중도에 망실되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1980년대 들어 고문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기 이전까지 계속 되어왔으며, 이전까지의 서원 자료에 대한 정리(목록화)작업 또한 藏書(전적)가 우선시 되었다.
 
2) 옥산서원 자료에 외부의 조사는 193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전국 문중 및 원사에 소장된 藏書를 파악한 것이 시초이다.(『朝鮮圖書解題』, 1932) 그러나 옥산서원의 藏書만을 별도의 항으로 정리한 것 아니었다. 이외에는 1920년에 일본인 松田甲이 옥산서원 등을 방문한 후 듣고 확인한 것을 간략히 서술한 것이 있다. 당시 옥산서원에는 내사본으로『詩傳』(20책:2질),『書傳』(15책),『春秋』(10책),『禮記』(15책),『禮記』(10책),『御定春秋四傳』(27책),『論語』(14책:2질),『論語講解』(4책),『孟子大全』(4책),『孟子俱解』(4책),『中庸俱解』(4책:2질),『大學俱解』(4책:2질),『性理大全』(25책),『朱子大全』(95책),『御定朱書百選』(3책),『朱子語類』(75책),『五經百編』(5책),『鄕禮合編』(2책),『國朝儒先錄』(4책),『御定奎章全韻』(1책) 등 총 20종 341책이 있었으며, 그 외의 장서도 많아서 앞의 내사본과 합하여 약 330종 2,197책이 있다고 했다.

· 松田甲,「경주의 玉山書院」『韓日關係史硏究』, 1920.
· 조선총독부, 『조선도서해제』, 조선통신사, 1932.
 
3) 옥산서원 장서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69년 이춘희 등이 陶山, 玉山, 紹修, 屛山書院을 현지 조사하여『李朝書院文庫目錄』(국회도서관, 1969)으로 간행한 것이 시초이다. 이들이 조사할 당시의 옥산서원 장서는 御書閣(經閣)(503종 2,847책)과 獨樂堂(363종 1,264책) 두 곳에 分藏되어 있었는데, 두 곳의藏書는 모두 866종 4,111책이었다. 특히, 독락당은 회재의 개인 서재였던 만큼 회재에게 하사된 내사본을 위시하여 그의 眞蹟과 手澤本들이 많이 있었다. 실제, 鑄字本은 모두 40종 730책이 있었으며, 이중1513년 乙亥字로 간행된 『正德癸酉 司馬榜目』(보물 제524-1호)은 현존 사마방목으로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반면, 옥사서원 장서각(경각)에는 약 60%정도가 문집류이며, 내사본인 『주자대전』,『주자어류』등의 거질본들이 낙질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러한 옥산서원 장서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경주지역에서 간행된 서적을 파악하면서 부수적으로 진행되거나, 특정 판본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 李春熙, 『李朝書院文庫目錄』, 국회도서관, 1969.
· 문화재관리국, 『한국전적종합조사목록』1, 1986.
· 박장승, 「경주소재 서원·사에서 간행한 전적고」『신라문화』19, 2001.
· 김건우, 「<관서문답록>의 간행과정과 훼판시비」『장서각』14, 2005.
· 한국국학진흥원, 『경북지역의 목판자료(3)』, 2007.
· 남권희, 「조선시대 경주 간행의 서적」『신라문화』33, 2009.
· 윤상기, 「경주 옥산서원판본에 관한 연구」『조선시대 지방감영의 인쇄출판활동』, 청주고인쇄박물관, 2009.
 
4) 옥산서원 書院誌 편찬은 1993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玉山書院誌』가 있다. 이 책에서는 古書籍을 제외한 필사원본(성책고문서)류와 고문서들 중 일부를 발췌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그 연구편에서 서원소장 고문서류에 대한 대략적인 현황을 파악해 놓았다. 이를 보면, 성책고문서는 攷往錄,尋院錄, 奴婢案, 都錄類 등을 합쳐 총 691책이 있으며, 특히 경제관련 성책류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문서는 通文, 書目, 明文 등을 합쳐 총 653건인데, 이중 통문이 211건으로 가장 많으며, 다음이 回文(83건), 祭需單子(77건)와 所志(23건)의 순이었다. 옥산서원 고문서를 활용하여 서원운영, 경제적 기반, 사회·정치적 기능 등을 연구한 것은 다음이 있다.
 
· 이수건, 『경북지방고문서집성』, 영남대학교출판부, 1981.
· 이수환, 「서원의 정치·사회사적 고찰」『교남사학』창간호, 1985.
· 이수환, 「조선후기의 서원 -옥산서원을 중심으로-」『국사관논총』32, 1992.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옥산서원지』,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 이수환, 「회재 이언적과 옥산서원」『경주사학』16, 1997.
· 손병규, 「17-18세기 경주 옥산서원의 토지재원과 그 운영」『태동고전연구』16, 1999.
· 이수환, 「18-19세기 경주 옥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서간의 향전」『고문서연구』16·17, 2000.
· 손병규,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태동고전연구』17, 2000.
·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2.
· 이주연, 『조선시대 서원의 교육활동에 대한 고찰 :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대구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손병규,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조선시대사학보』35, 2005.
· 오경후, 「조선시대 경주지역 寺院의 수적 추이와 성격」『신라문화』, 2007.
· 이수환, 「이언적 문학의 창작현장과 유적」『대동한문학』29, 2008.
· 이수환,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2009.
· 정기숙, 「조선시대 서원의 회계제도와 경영」『한국 전통회계와 내부통제시스템』1, 민속원, 2011.
 
5) 옥산서원 자료와 더불어 빠트릴 수 없는 것이 회재 후손가의 전승 文籍이다. 대표적으로 독락당과 양동마을 내 소장 자료를 제시할 수 있다. 특히, 회재의 별업이었던 독락당은 그의 아들 李全仁에게 상속되어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잘 관리해 왔기에 수많은 장서와 고문서가 남아있다. 이들 자료는 1972년 청분각을 지으면서 회재 수택본과 내사본, 고문서, 목판(『關西問答錄』(1811, 25판), 『潛溪李先生遺稿』(1847, 33판))을 제외한 기타 藏書들이 옥산서원으로 이전되었다. 독락당 소장 고문서는 『영남고문서집성 2』(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2)과『고문서집성 65』(한국학중앙연구원, 2003)으로 영인되어 소개되었는데, 2012년부터 한국학자료센터 홈페이지에서 독락당 고문서 원문이미지와 해제를 웹서비스 하고 있기에 현재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열람이 가능하다. 양동마을은 회재 이언적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곳으로 그들이 옥산서원의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회재 종가인 무첨당을 위시한 제 집안에는 옥산서원과 관련된 문서(通文, 『玉院事實』등)들이 일부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문화재청, 2003년 조사보고서 참조).
 
· 옥산서원청분각건립위원회 편, 『회재선생과 옥산서원』, 1972.
· 이동걸, 『옥산서원과 양동마을』, 우리출판사, 1987.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고문서집성』(2), 영남대출판부, 1992.
·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집성』65, 2003.
· 옥산정사, 『옥산서원 독락당』, 2003.
· 문화재청, 『경주 양동민속마을 동산문화재 현황파악 학술조사 보고서』, 2003.
 
6) 문화재청에서는 2004년에 경주 옥산서원 소장 비지정 일반동산문화재에 대한 일괄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고서, 고문서(성책류 포함), 목판, 현판, 기타 유품 등 모든 유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당시에 조사된 것을 보면, 고서 943종 3,977책, 고문서 1,156점, 책판 19종 1,123장, 기타 유물 24점 등 총 3,246점이었다.
 
· 문화재청,『2004년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보고서』, 2004.
· 문화재청·경상북도,『2005년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보고서』, 2005.
 
7) 옥산서원과 관련한 연구는 자료의 반출과 열람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현황도 파악되지 않았기에 원활히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옥산서원 장서에 대한 목록 작업이 우선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서원 소장 자료를 활용한 연구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연구는 서원 관련 자료집과 보고서가 출간된 후인 1990년대 중반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연구가 진행되기 이전에는 관광도시인 경주의 문화재를 소개하면서 일부 언급되거나, 건축물과 서원 주변의 자연경관에 대한 조사가 주를 이루었다. 최근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과 관련하여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 관광소개 및 문화재 조사
· 황호근, 『경주의 고적 : 신라고도안내』, 계몽출판사, 1959.
· 조선총독부, 『조선사료집진』, 한국고전개발학회, 1970.
· 문화재관리국,『한국관광자원총람』, 1978.
· 신영훈, 『한국의 삼대서원』, 교학사, 1986.
· 월성문화원, 『월성문화유적지』, 1988.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북부지역지표조사보고서 2 : 건축유적·민속문화 편』, 1997.
·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경북동부지역 문화유적답사」『인문과학연구』17, 1998.
· 경상북도, 『문화재대관』, 2003.
 
▷ 회재 이언적과 (세계문화유산)양동마을 소개
· 이동종, 『옥산서원어서각중건시집』, 한국한시연구원, 1972.
· 이호일, 『한국의 서원』, 가람기획, 2006.
· 박우인, 『경주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 <UNESCO>선정 세계 10대 사적지』, 드라이브사, 1995.
· 김환대, 『경주양동, 안동 하회마을 -한옥과 자연이 숨쉬는 500년 전통 마을 이야기』, 지식파수꾼, 2010.
· 경주시, 『세계문화유산 경주양동마을』, 2010.
· 이수환,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다. 경주, 회재 이언적 종가』, 예문서원, 2011.
 
▷ 서원 건축 관련
· 이연노·주남철, 「옥산서원 구인당 중건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 논문집』17, 2001.
· 송영인, 『옥산서원 배치형태에 관한 연구』, 금오공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신상섭, 「하회·양동마을에 작용된 환경설계원칙과 문화경관상」『한국환경과학회지』12, 2003.
· 손봉균, 『사림학파의 당쟁을 통해 본 서원건축의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노송호, 『향교와 서원의 입지 및 외부고간 분석을 통한 한국적 교육환경 모색』,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 최미경, 『영남지방 서원루의 건축계획 : 자연경관 해석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8) 옥산서원 관련 기타 기록자료.
 
① 문집에 散見되는 옥산서원 관련 글들은 대부분 영남지역을 유람하면서 옥산서원에 잠시 들리거나 留宿하면서 그 감회를 읊은 시와 致祭한 후 쓴 글로 크게 나눠진다. 이들은 회재의 문인 내지 후학들이 대부분이며, 정조와 같이 왕실의 인물들도 있다. (「한국고전종합 DB」및 『嶺南文集解題』(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 1988 참고)

· 姜 瑋, 『古歡堂收艸詩稿』권2, 發弭餘草 「玉山書院」.
· 權以鎭, 『有懷堂先生集』권1, 「癸巳三月初六日 棄雞林歸 出宿玉山書院 歷六臣祠 檜淵書院 桐谿墓 俱有詩記之」.
· 權斗經, 『蒼雪齋先生文集』권3, 「玉山書院謁晦齋先生祠」.
· 權德麟, 『龜峯集』권2, 「玉山書院記略」, 「玉山士林答陵齋通文」, 「刊役時玉山書院通南學文」.
· 權復興, 『五慕齋實紀』권1, 「玉山書院答通」
· 琴蘭秀, 『惺齋集』권1,「玉山書院罷會後 書示僚友李汝誠 」.
· 金尙容, 『仙源遺稿』上, 五言律詩,「同體察使李議政住玉山書院餞歲酒席 次接伴使金相公睟 韻」,「同體察使李議政住玉山書院餞歲酒席 次接伴使金相公睟 韻 二首」.
· 金邁淳, 『臺山集』권3,「祗拜玉山書院 退宿溪亭 臨歸書贈主人」.
· 金道和, 『拓庵集』권9,「玉山講義」.
· 金止男, 『龍溪遺稿』권3,「玉山書院十四詠 次穌齋韻」.
· 盧守愼, 『穌齋先生文集』권7,「玉山書院諸額贊」.
· 都聖兪, 『養直先生文集』권1,「謁玉山書院 五言」.
· 陶山書院, 『汾李辨誣事變日錄』권1,「玉山書院答通」.
· 睦大欽, 『茶山集』권2, 五言古詩「玉山書院 次五峯韻」.
· 朴旨瑞, 『尼溪集』권1,「玉山書院」.
· 朴申慶, 『能皐集』권5,「答玉山書院通文」.
· 朴珪壽, 『瓛齋先生集』권8, 書牘「與溫卿」.
· 沈東龜, 『晴峯集』권3, 七言律詩「玉山書院 次趙日章絅韻」.
· 孫起陽, 『聱漢先生文集』권1, 排悶錄「玉山書院 食筍謝主人李慶山浚」.
· 成近默, 『果齋先生集』권1,「會海隱姜先生于玉山書院 講太極圖 西銘 玉山講義及仁說 敬次先生韻」.
· 成海應, 『硏經齋全集外集』권56, 筆記類 蘭室譚叢「朱子大全永樂本」.
· 安德文, 『宜庵集』권2,「玉山書院」.
· 安鼎呂, 『晦山集』권6,「玉山齋」.
· 宋近洙, 『龍湖閒錄』1, 「一二八, 慶州玉山書院 文元公 李彥迪致祭文」.
· 李安訥, 『東岳先生集』권11, 月城錄「玉山書院 書示諸儒生」,「題畫竹扇 贈玉山書院儒生」 , 「玉山獨樂堂 次李佐郞 宜活 見贈韻」,「玉山獨樂堂 贈主人李僉知浚 用五峯李相公韻」.
· 李 栽, 『密菴先生文集』권1,「玉山書院」.
· 李萬敷, 『息山先生別集』권4, 地行錄10「玉山」.
· 李 滉, 『退溪先生年報』부록 권4, 「同月初三日傳敎」.
· 李衡祥, 『甁窩集』권10,「玉山士林」.
· 李能允, 『谷圃集』권4,「玉山書院體仁廟重建日記」, 「玉山書院任案」.
· 李野淳, 『廣瀨集』권7,「玉山講義圖」.
· 李彦迪, 『晦齋先生集』부록,「玉山書院記」(許曄).
· 吳 䎘, 『天波集』권4, 「遊玉山書院記」.
· 兪 泓, 『松塘集』권1, 「玉山書院 次盧相公韻」.
· 兪漢雋, 『自著』古詩,「玉山書院」(戊戌).
· 尹 拯, 『明齋先生遺稿』권2,「訪玉山書院 謁晦齋先生祠 有感」.
· 張顯光, 『旅軒先生續集』권2, 書 「答玉山書院士林」,「與玉山書院士林」,「答玉山書院士林」 ; 答問目「答玉山書院」.
· 趙 靖, 『黔澗先生文集』권1,「宿水雲亭」.
· 趙秀三, 『秋齋集』권4,「玉山書院」.
· 趙寅永, 『雲石遺稿』권2,「玉山書院」.
· 正 祖, 『弘齋全書』권22, 祭文4「玉山書院 致祭文」; 권184, 羣書標記六 命撰二「嶠南賓興錄二卷」.
· 丁範祖, 『海左先生文集』권3,「次遊玉山書院韻」.
· 鄭克後, 『雙峯先生文集』권2,「與玉山書院諸生」 ; 권3,「代玉山書院士林 通曲江書院文」.
· 鄭襲明, 『滎陽實記』권4,「玉山書院事蹟」.
· 蔡準道, 『石門集』권3,「玉山講義少」.
· 許 曄, 『草堂先生文集』記, 「玉山書院記」.
· 許 傳, 『性齋先生文集』권19,「吏曹參判李公墓碑銘」,「權江東墓碣銘」.
 
② 타 기관에 소장된 자료로는 한국국학진흥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용산서원(15점), 지산종택(7점), 한양조씨 옥천종택(1점), 진성이씨 향산고택(1점), 농암종택(1점), 풍산류씨 북촌댁(1점), 안동 갈전 순흥안씨 정봉종택(1점), 독락당(8점), 도산서원(1점) 등이 확인된다. 이들 자료는 <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검색이 가능하며, 이외에 서책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慶州府校院書冊目錄』(규7720), 『書目』(규7923), 『嶠南賓興錄』권1,「御製祭文(玉山書院)」등이 있다.
 
 
4. 전승 자료의 내용과 특성
 
1) 옥산서원 소장 고서
 
옥산서원 고서는 도산서원 장서와 더불어 우리나라 현존 서원문고 중 그 보존이 가장 잘 되었으며, 임란 때에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곳이다. 오히려, 옥산서원은 1599년 임란의 피해를 입은 홍문관에 四書五經,『朱子大全』,『國朝儒先錄』,『小學諺解』, 四書諺解本등의 내사본을 보내고 있다.(『列邑院宇事蹟』, 경상도 옥산서원)
1960년대 조사에 따르면, 옥산서원은 503종 2,847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2004년의 조사에서는943종 3,977책으로 나타난다. 이는 1972년 청분각 건립 후 독락당에 소장된 고서들의 일부가 옥산서원으로 옮겨오면서 고서 책수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淸芬閣建立誌』(옥산서원 소장, 필사본), 1976).옥산서원 장서는 문집류가 300여 종으로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經書·歷史·傳記·儒家類로 이 중에서도 전기류가 70여 책으로 제일 많다.
옥산서원 고서 중 주목되는 것은 보물 525호로 지정된 『三國史記』이다. 이 책은 1573년 경주부가 인출하여 옥산서원에 보낸 것으로 현재 전래되는 몇 안 되는 완질본 중 하나이다. 이외에도 조선전기 대종을 이루던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들이 있는데 『晉書』,『埤雅』,『唐柳先生集』,『漢書』등의 갑인자본과 『大廣益會玉篇』,『飜譯小學』,『小學集說』,『朱子大全』등의 을해자본이 그것이다. 또한,『주자대전』(95책)과 『朱子語類』(丙子字本, 75책)는 1577년에 內賜된 것으로 完帙이 보관중인데, 이는 도산서원과 옥산서원에만 볼 수 있다. 이외에도 귀중본으로 분류될 만한 전적이 많이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희귀, 귀중본 목록
『三國史記』 (1573 소장, 50권 9책, 중종연간 刊) - 보물 525호
『續大學或問』(1794, 필사본, 1책, 정조친필 書頭, 奎章之印)
『經史證類大全本草』(1302, 零本 7책, 중간본, 獨樂堂印)
『古今韻會擧要』(번각본, 영본 1책, 세종년간 간행)
『國朝儒先錄』(1570, 乙亥字混入補字本, 4권 4책, 內賜本)
『唐柳先生集』(1440, 初鑄甲寅字本, 영본 6책)
『唐詩彙選』(1615, 10권 10책, 訓鍊都監字本)
『大廣益會玉篇』(乙亥字本(補木活字), 영본 1책)
『大學章句大全』(중종~선조연간, 1책, 목판본)
『大學章句大全』(明版飜刻本, 1책, 1579년 內賜本)
『東國李相國全集』(16세기 刊, 木版本混入補刻板本, 영본 4책)
『東萊先生南史詳節』(甲寅字本(15세기후반), 25권 5책)
『東萊先生唐書詳節』(甲辰字本(初鑄甲寅字 混用), 영본 13책)
『東萊先生東漢詳節』(甲辰字本(初鑄甲寅字 混用), 30권 9책)
『東萊先生北史詳節』(甲辰字本(初鑄甲寅字 混用), 영본 6책)
『東萊先生史記詳節』(甲辰字(本文), 初鑄甲寅字(序文), 영본 3책)
『東萊先生三國志詳節』(甲辰字本(初鑄甲寅字 混用), 영본 4책)
『東萊先生西漢詳節』(甲辰字本(初鑄甲寅字 混用), 영본 10책)
『東萊先生隋書詳節』(甲辰字本(初鑄甲寅字 混用), 20권 5책)
『東萊先生五代史詳節』(甲辰字(本文), 初鑄甲寅字(後序), 10권 3책)
『東萊先生音註唐鑑』(1562 경주부 刊, 목판본, 24권 5책)
『東萊先生晉書詳節』(甲辰字, 16세기 印, 30권 6책)
『飜譯小學』(16세기 간, 乙亥字飜刻本, 영본 1책, 玉山書院 印)
『飜譯小學』(16세기 말간, 乙亥字飜刻本, 영본 2책, 藏書記: 玉山書院)
『埤雅』(初鑄甲寅字本, 20권 5책, 16세기초, 內賜本)
『西涯擬古樂府』(再鑄甲寅字本, 3권 3책, 16세기말)
『說文解字韻譜(蒙韻譜)』(16세기 刊, 木版本, 영본 2책)
『聖學十圖』(1570 경남 하동 刊, 목판본, 1책)
『小學集說』(乙亥字本, 15세기, 영본 2책, 獨樂堂 印)
『續蒙求分註』(1568, 목판본, 4권 4책)
『心經附註』(1492, 목판본, 4권 2책, 獨樂堂 印)
『兩山墨談』(1539, 목판본, 18권 4책)
『五朝名臣言行錄』(1502 청도부 간행, 庚子字飜刻本, 영본 19책)
『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16세기말全州, 癸未字飜刻本, 70권23책, 獨樂堂 印)
『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16세기말, 癸未字飜刻本, 70권 23책, 玉山書院 印)
『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16세기, 영본 1책, 初鑄甲寅字本, 獨樂堂 印)
『資治通鑑綱目』(16세기 중엽, 初鑄甲寅字本, 영본 137책)
『資治通鑑綱目』(16세기 후반, 再鑄甲寅字本, 영본 64책)
『佔畢齋集』(16세기, 목판본, 영본 2책)
『朱子大全』(1543, 乙亥字本, 95권 95책, 內賜本)
『朱子語類』(16세기초, 丙子字本, 140권 75책, 內賜本)
『增續會通韻府羣玉』(訓鍊都監字本, 21권 21책)
『晉書』(16세기초, 初鑄甲寅字本, 영본 24책)
『眞西山讀書記乙集上大學衍義』(16세기초 간, 乙亥字本, 영본 15책, 獨樂堂 印)
『太平廣記詳節』(16세기, 初鑄甲寅字飜刻本, 영본 3책)
『漢書』(初鑄甲寅字(補木活字), 영본 50책, 晦齋 印, 手澤本)
『皇朝道學名臣言行外錄』(16세기간, 庚子字飜刻本, 17권 4책)
『晦庵先生朱文公詩集』(16세기 刊, 목판본, 영본 1책, 藏書記: 冊主智山家藏)
『晦庵先生朱文公詩集』(16세기 刊, 목판본, 영본 3책, 藏書記: 冊主溪亭李氏)
 
▷ 장서목록은 李春熙, 『李朝書院文庫目錄』(국회도서관, 1969)과 문화재청,『2004년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보고서』(2004)를 참조하기 바람.
 
2) 옥산서원 소장 고문서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는 그 형태 서지에 따라 성책류(필사원본)와 고문서(낱장)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자료는 조선중기 이후 서원내지 향촌사회의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주는 일차적인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러나 이들 고문서류는 1993년 『옥산서원지』를 편찬하기 전까지 그 내용과 수량이 공개되지 않았었다. 이 서원지에서도 문서의 종류와 수량은 파악되었지만, 일부 문서만을 발췌·수록하고 개별 문서에 대한 설명이 없는 관계로 이용에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옥산서원 고문서 자료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정리서 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후 문화재청에서 2004년에 옥산서원 전체 유물을 조사하여 필사본 700여 책과 고문서 600여 건에 대한 간략한 서지와 해제를 보고서로 발간하여 일정 부분 참고가 된다. 단, 당시 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고문서 자료는 제외하였다.
 
(1) 성책류
옥산서원 소장 성책류(필사본)를 연대별로 보면 창건 초기인 17세기의 기록은 많지 않고 대부분이 18세기 이후의 것이다. 그 종류는 크게 서원의 인적구성과 조직․운영체제를 파악할 수 있는 것과 서원 경제관계 및 기타 일기․부조책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징적인 것은 서원 경제관계 자료가 비교적 잘 보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경제관련 자료인『會計錄』․『都錄』등은 수적으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① 서원의 역사를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19세기의 『考往錄』(1책)이 있다. 『傳與記』에서 보면 원래 옥산서원에는 초기 고왕록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서원 초기의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서원 초창기의 상황은 서원유생들의 상서․소지 등을 모은 『呈書謄錄』(1책)을 통해서 그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② 서원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던 원장․유사 등 院任의 명단인 『首副任案』(7책) 및 서원의 규약인 『院規』와 17세기 『入院錄』(양동 종손댁 소장), 享祀의 절차를 알 수 있는『笏記』(2책)도 중요한 자료이다. 또 『首副任案』과 함께 서원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사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는 창건초기부터 최근까지의 춘추향사시 집사의 명부인 『執事記』(30책)가 있다.
③ 옥산서원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외곽 사림세력의 범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로 『尋院錄』이 있다. 이 책은 서원 내방인사가 자필 서명한 일종의 방명록으로, 기재순서는 직위(본관), 인명, 거주지, 내방일 순으로 되어 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본관이 중요시되면서 거주지가 기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심원록은 원임안과 함께 각 서원마다 가장 중요시 여기는 책으로 그 등재여부도 엄격히 규정하고 있어 여기에 기재된 인사는 당시 서원과 일정한 관련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하여 당시 옥산서원의 인적교류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옥산서원은 심원록을 他官․本鄕으로 구분하여 기재하였으며 전자는 千字文 순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玄․宇․荒․陽․爲․師 등이 缺秩이며 일부는 뒷부분이 탈락된 경우도 있지만 설립 년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비교적 잘 보관되어 총 103책이 현존한다.
④ 『本鄕尋院錄』은 경주부내 인사를 대상으로 한 방명록이다. 원래 서원에 따라서는 심원록에 「本府人勿許濫書」라는 규정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옥산서원에서도 초기에는 이 규정이 적용되었던 것 같다. 본향심원록은 1756년에 처음 작성되어 총 48책이 현존하는데, 여기에 등재된 인사는 당시 경주부내 대표적인 사족인 良洞의 孫․李氏가 주축이 되고 있다.
⑤ 謄錄․完議類가 있다. 먼저 『呈書謄錄』(1588∼1623)은 서원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院儒들이 감사나 해당지역 지방관에 呈書한 上書 내지 所志 등을 모은 책이다. 그 내용은 대부분이 서원소속 정혜사 승도의 僧役 면제, 현물관납 면제 또는 서원소속 선척․어염세의 면제, 漁夫․格軍․鹽干 등 원속의 면역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서 서원 초기의 경제적 사정의 일단면 및 서원과 지방관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다. 이외 서원운영의 규약을 기록한 것으로『謄錄』․『山堂居接謄錄』및 完議․重修所別辨完議 등이 있다.이 책들은 구체적인 작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18세기후반 내지 19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⑥ 서원초기의 2대 경제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토지와 노비에 관한 문서로, 土地案은 1694․1795년의2책이 있고, 奴婢(推刷)案은 시대별로 7책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18세기 중후반의 『秋收記』․『打作記』가 있다.
⑦ 서원은 또한 일반적으로 원노비 외에 募入․投託․仰屬人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피역인들을 광범하게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명단을 기재한 案은 『所屬案』․『院屬私案』 등으로 표현되지만 이를 통칭하면 院屬案이라 할 수 있다. 옥산서원에는 該邑 원속안과 他邑(영일․흥해․장기․영천) 원속안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18세기 중반이후부터는 이들 원속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작성한 『院(儒)生案』43책, 『(都色․齋直)良下典案』53책, 『御書閣守直軍案』29책이 있는데, 이 案들은 1∼2년 간격을 두고 작성되었으며, 서원 원속의 구성이나 그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⑧ 서원의 수입․지출상황을 기록한 일종의 경리장부로 『會計錄』․『都錄』․『傳與記』등이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타서원에서는 『傳與記』․『傳掌記』라 한다. 회계록은 대체로 18세기 초중반의 것으로 보이며,『都錄』은 18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까지 총 130여 책이 있다. 이 책들을 통해 옥산서원의 대체적인 경제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刊所․遺物․食床都錄 및 重修時都錄을 따로 작성하기도 하였다. 서원소장 서책은 따로 『傳與記』(56책)를 작성하여 인수인계하였는데 여기에는 서책 외에도 서원소장의 각종 기물 등도 포함되었다.
⑨ 서원건물 중수 시에는 그 과정을 日記로 작성하기도 하고, 扶助記․都錄․下記 등도 반드시 작성하였다.예컨대 1839년 求仁堂중건시에는 『求仁堂重建日記』, 『講堂重建時鄕中出物置簿』․『重修錢冊』․『重修錢捧上記』․『鄕中錢入記』․『道內錢入記』및『賜祭時都廳下記』,『揭額時都廳下記』,『額板祗延時都廳下記』,『重修米下』가 작성되었다. 또 1905년 중건 시에도 重修都錄이 작성되었다. 1843년 無邊樓중건 시에는 下記ㆍ用下ㆍ都錄이, 1905년 體仁廟重建時에는 都錄․重修扶助冊이 작성되었다. 이러한 대단위 건물 중수가 아닌 院內의 간단한 수리라 할지라도 都錄․下記는 작성되었는데『大庫重修都錄』,『書院重修日記』,『廚舍重修記』,『院宇修理時用下秩』,『御書失變時下記』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중수시 都錄․下記는 중수시간, 동원된 役丁의 수와 소요된 비용 등이 기재되어 있어서 한국 고건축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그밖에 旁目, 道會時到記, 役費日記, 鄕里約法, 會校錄, 淸道執禾記, 享會錄 및 다수의 到記 등이 있다.
⑩ 이외에도 정확한 입수경위는 알 수 없지만 『西岳書院攷往錄謄草』․『西岳書院院儒時用案謄錄』․『西岳書院講儒付案錄』․『西岳書院講案』 등의 서악서원 관계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2) 고문서
① 戶口單子는 서원을 하나의 戶로 파악하여 소속 노비를 기재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앞 노비안과 더불어 서원소속 노비의 규모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② 明文은 17세기중반부터 19세기말까지의 것으로 대부분 토지에 관한 것이다. 立議․完議․完文 중 17세기 초의 立議 2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18세기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③ 薦(講)案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 사이의 것인데, 新薦案에는 入院유생의 명단, 천주 및 유생의 入格․畢講여부가 기재되어 있고, 講案에는 구체적인 교육 평가가 기재되어 있다. 대체로 서원은 17세기 중반이후부터 교육적 기능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이 案은 옥산서원이 19세기까지 유생들의 교육기관으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④ 上書․所志․書目․稟目 등 所志類는 대체로 서원경제에 관한 것으로 屬寺인 정혜사 승도의 면역, 良人․下典 등 원속 및 서원소속 각종 店 등에 대한 관부의 침탈에 대해 면역․면세를 호소하는 것이다. 상서를 제외한 소지․서목 등은 구체적인 작성연대를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말까지의 기록으로 보인다.
⑤ 通文은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것이 대부분이다. 발행처는 대체로 서원․향교 및 각 문중이었는데 그 범위는 경상좌도 전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통해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통문의 내용은 서원건립과 배향․추향문제, 道會개최, 승무운동, 서원중수시 부조, 문집 중간시 부조, 충효열에 대한 표창 문제 등이며,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적서간과 사족 상호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각종 시비와 관련된 것이 많았다.
⑥ 回文은 향례일, 향회개최, 首任 薦望 등 원내 대소사가 있을 때 모임을 알리는 문서이다. 대체로 이 회문은 서원을 중심으로 몇 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문중별로 돌렸다. 祭需單子는 서원 自費로 마련한 것 외에 부윤․감사 등 지방관이 하사한 것도 있었다. 良下典充定案은 서원자체에서 私募하여 발급한 案과 官에서 발급한 案 2종류가 있다. 이를 통해서 당시 서원과 관의 관계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외 單子와 賭租預賣秩, 簡札類, 계약서, 영수증, 위임증, 証書 등이 있다.
 
▷ 구체적인 목록은 문화재청,『2004년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보고서』(2004)를 참고바람.
 
3) 서원소장 판목 목록
 
서원 소장 판목은 2004년 문화재청과 2007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일괄 조사하여 목록집을 발간하였다.이들 자료를 참고하면, 옥산서원에는 제향자 이언적의 문집인『晦齋先生集』외에도『求仁錄』,『大學章句』,『奉先雜儀』,『太極問辨』,『中庸九經衍義』,『近思錄』,『琴坡集』,『林居十五詠』등 총 19종1,121장이 책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無忝堂文集』,『龜峯先生遺集』,『蒙庵先生文集』,『太極圖說』,『漢史列傳抄』등의 책판이 있었음을 문헌과 판본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이들 책판은 남아있지 않다. 또한 현전하는 책판들도 결락이 많다.
책판은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서원 내 문집판각과 정혜사에 분장되어 있었는데, 조사 당시에는 서원 내 세 곳에 분산 보관되어 있었다. 문집판각에는 『회재선생집』,『구인록』,『대학장구』,『봉선잡의』등을 비롯해 12종 487장이 소장되어 있었고, 경각에는 『구경연의』,『구경연의별집』,『금파집』,『근사록』,『천자문』을 비롯한 5종 609장이 소장되어 있었다. 한편 서원 옆에 유물각인 청분각 내 별실에는『元朝五箴』과 『임거십오영』의 2종 25장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 모든 판목들은 2012년 현재, <옥산서원유물전시관>내의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다.
 
번호
분류
명칭
수량
번호
분류
명칭
수량
1
책판
求仁錄
79
11
책판
朝鮮總督府齋藤實
1
2
책판
大學章句
17
12
책판
九經衍義
208
3
책판
奉先雜儀
13
13
책판
九經衍義別集
142
4
책판
續大學或問
9
14
책판
近思錄
130
5
책판
御製續或問
4
15
책판
琴坡集
127
6
책판
太極問辨
38
16
책판
元朝五箴(大)
9
7
책판
晦齋先生遺墨
12
元朝五箴(小)
4
8
책판
晦齋先生集
163
17
책판
林居十五詠
12
9
책판
晦齋先生集別集
79
18
책판
立春祝文
1
10
책판
晦齋集
72
19
책판
千字文
1
소계
19종
1,121
 
 
4) 서원소장 자료의 가치
 
첫째, 옥산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현존 우리나라 서원문고 중 가장 많은 자료를 수장하고 있다. 약4,000책에 이르는 방대한 古書와 1,100 점의 목판, 약 1,500여 건의 고문서를 보존 전승해 왔던 것이다.이들 자료는 임고서원 소장전적(보물 1109호)과 필암서원 문서일괄(보물 587호)에 비하여 시대적으로나 내용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또한 서원운영과 관련하여 당시에 바로 작성된 고문서류가 거의 대부분 소장되어있다는 점에서 이들 자료는 조선중기 이후 서원 운영내지 향촌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둘째, 옥산서원의 운영에는 경주 사림들 외에도 주향자인 회재의 후손들이 계속 참여해 왔기에 그 후손가에 남아있는 자료들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독락당은 회재의 별업이자 개인서재로서 사용되었던 곳으로 회재의 수택본과 그 개인에게 하사된 내사본이 다수 남아있으며, 이곳을 이어받은 이전인의 후손들이 옥산서원의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흔적이 고문서로 남아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곳이다. 또한 회재의 종택인 무첨당이 있는 양동마을 역시 현재까지 회재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옥산서원의 운영에 참여했기에 다수의 자료들이 남아있다. 이처럼 옥산서원 자료는 이들 후손가의 소장 자료와 비교, 분석을 통해서 더욱 그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셋째, 고서는 회재의 수택본과 독락당 소장본(내사본) 및 옥산서원 소장본(내사본) 등은 임란이전 시기에 지어진 서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 일부는 일찍이 사료적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미지정된 고서들 중에서도 귀중본으로 분류되는 것이 다수이다.
넷째, 옥산서원 고문서는 18세기 이후 작성된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서원초기부터 작성된 자료들 또한 많이 있다. 이들 자료는 서로 연계성과 시기적으로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서원의 교육, 출판 및 제향의식과 정치·사회활동의 구체적 실상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특히, 200건이 넘는 통문과 60여 건의 소지·상소는 옥산서원의 다양하고 활발한 언론·사회 활동을 확인시켜주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都錄類는 서원의 경제활동 뿐 아니라 당시 사회물가의 변동도 확인이 가능하다.
 
 
5. 향후 활용의 과제
 
1) 현전 소장 자료의 문화재 지정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전하는 고문서 자료들을 일괄하여 문화재로 지정하는 일이다. 옥선서원 소장 古典籍類의 경우 일부는 이미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고문서등은 일괄로 국가지정문화재를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이는 비단 옥산서원뿐만 아니라 독락당과 양동마을 자료 모두에 해당된다.
 
2) 연구사업의 추진과 정례화
옥산서원은 그 지역적, 역사적 위상에 비해 전문적 연구가 미진하였는데, 이는 자료의 접근성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서원지의 발간으로 옥산서원 고문서 자료의 일부가 소개되고 이로 인해 90년대 이후 옥산서원의 경제·사회·정치적인 측면과 주향자인 회재 이언적의 사상과 문학에 대한 연구가 일정부분 진척되었지만, 여전히 규명해야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최근에는 『한국학자료센터』사업의 일환으로 옥산서원 자료의 DB화가 진행 중이지만, 이 작업은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하므로, 이 일에 우선하여 자료집의 발간이 시급한 실정이다. 옥산서원 전적류에 대한 목록은 몇 차례 조사를 통해 대부분 정리가 되었지만, 이를 더 연구·보완하여 전문 해제집을 발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성책 고문서는 서원지(1993)에 일부만 소개가 되었기에 남은 수백 종의 자료들을 정리하여 조속히 자료집 발간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통해 제 분야에서 많은 연구들이 후속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곧 옥산서원의 위상을 제고하고 독창성 내지 우수성을 끌어내는데 기여할 것이다. 나아가 좀 더 적극적인 노력으로는 이 기회에 분산 소장된, 그리고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옥산서원 관련 자료들을 정밀 재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한국서원에서 옥산서원이 가진 역사, 문화적 특성을 반영시킨 주제별 연구를 매년 진행(학술세미나, 연구논문(총) 발간)할 필요성이 있다. 서원정신과 역사의 올바른 이해와 계승이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큰 과제라고 볼 때 이 사업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실례로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2011년부터 <한국유교문화심층연구>의 일환으로 도산서원 자료를 활용한 학제간 정기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2012년 내에 연구총서로 발간될 예정이다. 이러한 사례를 잘 살펴 옥산서원에서도 정기 세미나를 통한 홍보, 연구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연구는 세계유산 등재된 양동마을을 연계하여 진행된다면 보다 많은 내용이 축적될 것으로 보인다.
 
3) 기록자료의 교육, 홍보자료 활용
옥산서원은 최근 양동마을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으로 인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그리하여 2010년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옥산서원유물전시관>을 새로 건립하고,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하면서 관광객들에게 홍보와 안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서원 자체의 홈페이지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옥산서원에 관한 설명을 개인 블로그 내지 현장의 안내게시판과 관공서 홈페이지의 내용으로 대처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비전문적이고 소략할 뿐만 아니라 건물위주의 설명뿐이어서 옥산서원만의 고유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수정ㆍ보완해야 할 점은 이들 기록 자료를 제대로 활용한 옥산서원의 교양 해설자료, 교육ㆍ홍보자료의 편찬을 강조하고자 한다. 현재까지의 관광 안내 자료를 보면 매우 소략하고, 건물과 제향인물 중심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역사와 정신이 포함되고 경관이나 건축, 제향인물의 행적이 수요층에 따라 알기 쉽고 다양하게 정리되어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은 각종 사진, 동영상과 함께 홈페이지를 구축하여 서비스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 편집, 교육자들이 힘을 합쳐 수요자에 맞는 서로 다른 홍보ㆍ교육 자료들을 개발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옥산서원만의 특징을 살린 홈페이지 구축, 홍보 자료집 발간과 주변 관광지(양동마을, 독락당,정혜사지, 주변 계곡 및 등산코스)와 연계한 코스의 개발 및 숙박시설의 개선이 이뤄진다면 옥산서원은 단순 유교건축물이나 특정 인물 중심의 유산이 아닌 한국의 대표적인 정신문화유산이자, 관광명소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