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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9대서원 - 무성서원!


 
작성일 : 12-09-16 14:48
무성서원의 자료정리 성과, 현황, 과제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928  


무성서원의 자료정리 성과, 현황, 과제
 
이 해 준
(공주대 사학과)
 
1. 무성서원의 연혁 개략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번지(구 : 태인현 고현내면 원촌리)에 위치하고 있는 무성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전라우도의 首院 역할을 해왔다.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무성서원은 원래 887년까지 태산현감을 지낸 崔致遠(857년-?)을 제향하기 위하여月延臺(현재 무성리 성황산 서쪽 능선)에 생사당을 지어 모시다가 이름을 泰山祠을 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태산은 태인의 고호이다. 조선 초 丁克仁(1401∼1481)이 1437년(세종 19) 처가가 있는 태인에 내려와 초가 삼간을 지어 堂號를 不憂軒이라 하고, 家塾을 열어 향리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가 하면 洞中鄕飮禮를 시행하면서 고현동 향약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정극인 사후에 가숙은 鄕學堂으로 발전하였으며, 그의 사후 2년되던 1483년(성종 14)에 이곳으로 태산사가 이건되었다. 정극인과 인척이었던 訥菴 宋世琳(1479∼?)은1510년(중종 5) 향학당을 다시 정비하여 강당과 동·서제를 지어 강학을 하였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한편 靈川 申潛(1491∼1554)은 1543년(중종 38)에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러한 유서와 강학적 전통을 토대로 현내에 5학당을 개설하여 흥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1549년 상주목사로 이임하자 태인현민들이 역시 생사당을 건립하여 기렸다고 한다.(태인 성황사 자료, 태인신잠선생영상, 전북 민속자료 제4호)
그러다가 1615년(광해 7)에 鄕人들은 태산서원을 건립하고 태산사에 모셔져 있던 孤雲 崔致遠(857∼?)과 향학당의 지원과 향학 진흥에 공이 컸던 靈川 申潛(1491∼1554)을 합향하므로서 사묘인 태산사와 향학당을 결합하는 특이한 서원의 발전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1630년에 향학당을 만든 不憂軒 丁克仁과, 향학당의 운영을 맡았던 訥菴 宋世琳(1479∼?), 默齋 鄭彦忠(1479-1557), 誠齋 金若默(1500∼1558), 그리고 1675년에는 역시 향학당 운영을 맡았던 鳴川 金灌(1575-1635)까지 추배하여 최치원을 주향으로 모두 7위를 제향하였다.
1695년(숙종 21) 12월 1일 도내 유림들은 청액소를 올리기로 합의하고. 다음해인 1696년 1월 5일에 청액소를 올렸는데, 2월 9일에 무성, 태산, 남천 중「武城」으로 사액이 내리는 동시에 復戶 3결, 保奴30명이 지급되고, 원생은 30명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그 해 11월 23일에 賜額使로 예조좌랑 유격이 파견되어 연액례를 치루었다. 당시의 연액례 사실은 무성서원 소장 고문서 중 『연액기사』에 자세하다. 이후1783년에 사우의 단청을 새로이 하였고, 1784년(정조 8)에는 雙溪寺로부터 최치원의 影幀을 가져와 봉안하였다. 1783년 사우중수와 최치원 영정 이안 사실은 서원에 소장된 『중수일기』에 자세하다.
1825년 4월 강수재(강당)의 화재가 있어 1828년 현감 徐灝淳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으며, 1831년에는 최치원 영정을 다시 그렸다. 1834년에는 무성서원에서『계원필경집』을 간행하여 서원에 비치하였다. 1844년 사우를 중수하고, 1849년 강당재건에 힘쓴 현감 서호순의 불망비를 건립하였다.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복호ㆍ보노를 삭제하였으나, 영의정 이최응의 배려로 1879년 복호ㆍ보노가 환원(1882년 불망비 건립)되고, 1884년에는 崔成在 등에 의하여 『武城書院誌』가 간행되었다. 또1887년에는 講修齋를 창설하고, 1891년에는 絃歌樓를 건립하였다. 현가루는 논어의 양화편에 나오는“공자가 무성(제자 자유가 다스리던 지역)에 가셔서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다(子之武城 聞絃歌之聲)”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무성서원은 한말 丙午義兵으로도 유명하다. 1906년 병오창의에서 최익현과 임병찬의 창의거점이었기 때문이다. 崔益鉉과 林炳瓚(1851∼1916)은 1906년 6월 4일 武城書院에모여 강회를 열고 최고운의 영정을 봉심하고 당시 서원소임 김기술, 유종규와 함께 강회에 참석하여 창의토적소를 올렸다. 강회가 끝난 후80여 명의 의사가 함께 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격문을 돌려 태인, 정읍, 순창, 곡성을 점령하였으나 6월12일 순창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임병찬 등 13명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1925년 최치원 영정을 개모, 1926년 문루의 기둥과 담장 고사 수리, 1934년 사우 중수를 거쳐 1968년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ㆍ1989년ㆍ1993-4년ㆍ1997년에 서원을 보수하였다. 현재 무성서원 門樓인 絃歌樓는 두리기둥을 쓴 정면 3칸, 측면 2칸 기와집이고, 그 안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인 강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4칸의 講修齋, 왼쪽에 3칸의 興學齋가 있어 東西齋를 이룬다. 3칸인 神門을 지나면 祠宇인 단층 3칸의 태산사가 있는데, 그 안에 주향인 최치원을 북쪽 벽에, 나머지 제향인물6명의 위패는 좌우에 봉안하였다.(건축 관련은 잠정등재 보고서 및 제1회 워크숍(11. 12. 12) 자료 참조)
 
 
2. 19세기말 『무성서원지』발간과 자료
 
1) 무성서원은 호남지역에서는 드물게 1884년에 서원지가 간행된 곳이다. 『무성서원지』에는 당시 무성서원 유림들의 자료정리 소명과 식견이 잘 반영되어 있고, 그만큼 서원지 편찬내용도 충실하다.
 
○ 武城書院院誌 2권 2책, 崔成在(도유사) 等編, 1884년, 武城書院開刊
序 : 金聲根, 鄭履源(甲申, 1884)
跋 : 寄亮衍, 申岐朝甲申, 1884)
 
상권에는 고운 최치원의 유적과 유문을 싣고 이어 제향인물의 사적, 그리고 서원의 창건에서부터 청액, 그리고 고운의 영정 봉안 등 의례에 관련된 각종 문서자료들을 정리하여 놓고 있다. 또한 건물 중수기나 장서기, 복호와 노비문기 등도 수록하고 있다.
하권에는 토황소격문을 비롯한 시문과 사우 강당 등 건물의 창건․중수기문, 원지 발간경과, 봉심안, 갑을기사라 하여 서원의 연혁과 변천사를 정리한 글도 있다. 특히 원규, 강습례 관련의 상세한 자료들은 무성서원의 교육, 강학, 의례의 진면을 증거할 귀중한 자료들이다. 말미에는 각종 물목과 전답안, 원생록, 원지 유사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도 또 한 번의 무성서원지가 발간[武城書院誌, 金麟基 등 編, 3권 3책, 석판본]이 있어서 한말-일제강점기의 변화상이 반영된다.

 
무성서원자료.jpg

무성서원자료2.jpg

 
2) 그런데 이 서원지에 수록된 자료들 중 많은 문서들이 현전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이들 자료들이 필사원본, 혹은 고문서 형태로 보존되었을 것이고, 서원지에 수록되지 않았던 전적과 문서들도 훨씬 더 많이 소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무성서원지』상 <芝山處士安在頀藏書記>에 芝山處士 安在頀가 1872년의 南學堂 중건과 1973년의 무성서원 강습례를 보고 집안에 소장하던 서책 수백 권을 무성서원에 기증하여 講習과 藏修의 자료로 삼도록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많은 장서가 비치되었음도 알 수가 있다. 그것들이 관리 소홀과 무관심으로 하나 둘씩 산질되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따라서 향후 보다 적극적인 탐문, 추가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기타 관련 문중, 유림의 소장문서들이 추가 확보될 가능성이 매우 크며, 추가조사 노력이 후속되기를 기대하여 본다.
 
 
3. 기록자료의 소장처와 조사 현황
 
1) 무성서원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 정리나 연구는 매우 적다. 그리고 학계의 관심도 주로 건축과 조경분야에 한정되어 서원 역사, 기록자료에 대한 관심은 최근까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손윤희, 「무성서원의 건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원 석사 2002
- 최만봉, 「무성서원의 입지와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회지』 22-4호 2004
- 정읍시, 『무성서원종합정비 기본계획』, (주)길 건축사, 2007
 
2) 고현동약 연구(이강오, 박익환, 백승종)나 임병찬 의병에 대한 연구(신규수, 홍순권, 강길원, 윤병석),정극인과 상춘곡에 대한 연구 등에서 무성서원에 대하여 일부 거론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 서원 연구와 자료 정리는 제대로 진전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와서 무성서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이러한 연구 및 자료정리 부진에 대한 대안이 일부 모색되기 시작하여 직접 무성서원을 주제로 부각하는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
- 송만오, 「무성서원 소장자료의 종류와 그 내용」, 2009, 서원학회 워크숍 발제
- 박종배, 「19세기 후반 무성서원의 講習禮」, 2009, 서원학회 워크숍 발제
- 이계형, 「무성서원과 최익현 의병의 성격」, 2009, 서원학회 워크숍 발제
 
3) 무성서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는 아니었지만,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의 태인지역의 역사문화유산 조사에서도 무성서원자료를 조사한 바 있다(당시 조사자료는 건물 4동, 비각 4동 비석 15기, 현판 38개,주련 23개, 문서 다수 등 : 『태인고현동 향약』국립중앙박물관, 2009년, 36면 참조)
 
4) 한편 2009년 문화재청에서는 비지정동산문화재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무성서원소장문서에 대한 조사를 실시(『비지정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2010, 문화재청, 공주대산학렵력단 : 무성서원 문서는 송만호 교수 조사보고)하였고, 이를 통하여 현재 무성서원에 소장된 전적, 고문서자료가 고서8점, 성책고문서 49점임을 확인하였다.

5) 그리고 이밖에 무성서원 문서로 다른 기관에 소장된 자료로 ①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31점(한국역사정보통합씨스템) ②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4점(2006 특별전-정읍편- 도록), ③ 독립기념관 소장 2점 등이 알려지고 있다.
 
6) 2010년의 무성서원 조사보고서와 함께 조사단은 문화재청과 전라북도․정읍시에 무성서원 고문서의 문화재지정을 권유하는 보고서를 제출(문화재위원 이해준, 문화재전문위원 옥영정․서병패, 2010. 1)하였고, 2011년에는 이치백 무성서원 원장의 결단으로 전북대 박물관에 의뢰하여 현전하는 무성서원 자료의 일괄 촬영과 목록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4. 전승 자료의 내용(목록)
 
※ 무성서원의 경우 영남의 대표적 서원들에 비하여 현전 자료량이 매우 적은 실정이어서 조사된 자료목록을 일괄 소개하도록 한다.
 
○ 서원소장 고서 8종
直軒集, 김종순(1837~1886), 木版本, 1891년 1卷1冊
肯構堂遺稿, 김중정 유고, 木版本, 1899년, 1卷1冊
漢陰集, 이덕형(1561~1613), 木版本, 일제시대, 1卷1冊(결)
東谷集, 김재희(1823~1887), 活字本, 1921년, 2冊
武城書院誌, 未詳, 木版本, 1930년, 1卷2冊
畏庵集, 김도명(1803∼1873), 木版本, 1932년, 1卷1冊
全州李氏一孝三烈錄, 未詳, 活字本, 1933년, 1卷1冊,
古縣洞約誌, 1939년, 1책 秉天祠誌, 1942년 1책 湖南節義錄, 木版本, 1964년, 1卷5冊
 
○ 서원소장 성책고문서 49종
泰山書院院儒案, 1책 1620년 (1618년 원생안 합철)
泰山書院院生錄, 1책 1639년 (1622년, 1659년 유생안 합철) 武城書院院生案(1), 1책 1773년
武城書院院生案(2), 1책 1800년 (무성서원 奴婢案(1801) 합철)
尋院錄(1), 1책 1612~1732년(총 600여 명) 尋院錄(2), 1책 1732~1771년(총 750여 명)
尋院錄(3), 1책 1780~1828년(총 570여 명) 尋院錄(4), 1책 1813~1831년(총 220여 명)
尋院錄(5), 1책 1831~1876년(총 110여 명)
奉審錄(1), 1책 1875~1915년 奉審錄(2), 1책 1962년 奉審案(3), 1책 1993년
完文(1)- 節目, 1책 1838년 完文(2)- 節目, 1책 1845년
延額記事, 1책 1696-1794년
重修日記, 1책 1783년 중수扶助記, 物力需入記, 移安獻官執 事記, 奉安影幀日記 등.
武城書院祭物冊, 1책 1734년 靈昭殿秋享祭物記, 1장 1800년대말(영소전의 제례물목)
武城書院祭禮笏記, 1책 조선후기(축문) 武城書院享需稧案, 1책 1906년
武城書院院規, 1책 1924년 武城書院享需錢殖本記, 1책1928년 通文, 高敞鄕校 1930년
開成杜門洞祠院剏建趣旨書, 閔千植, 1930년 公函, 1장 1931년 聲討文, 全州鄕校, 낱장 1931년
敬通, 武陽書院, 낱장1932년 武城書院慕賢稧案(1), 1책 1932년
武城書院慕賢稧案(2), 1책 1933년 武城書院慕賢稧案(3), 1책 1960년
武城書院收支簿, 1책 1933년 計算書, 日高金市, 1938년
稟告, 3장 1938년 武城書院院案(1), 1책 1946년 武城書院院案(2), 1책 1950년
武城書院土稅未收記, 1책 1952~1956년 泰山祠復設推進會通文, 1장 1957년(태산사 복설건)
武城書院享需稧案序, 낱장 병오년 武城書院春秋祭官錄(1), 1책 1974년
武城書院春秋祭官錄(2), 1책 1981년 武城書院庫舍建築關係書類, 1책 1979년
武城書院秋享祭官分定記, 1장 1980년 修補助金收支簿, 1책 1980년
祭需記, 1책 1981년 武城書院辛未秋享祭需記, 낱장 1991년 武城書院講經錄, 1책 2000년
武城書院國寶管理委員會案, 1책, 2000년
 
○ 懸板․記文, 柱聯 등 자료 (51건)
武城書院賢宇重修記 신축 閔申鎬 武城書院重修記 임진 尹濟翼
武城書院復戶保奴還復記 임오 金稷欽 武城書院講堂重創記 무자 金抆
武城書院重修記 병술 金永朝 武城書院重修記 병오 金秉述
武城書院重修記 무자 金光欽 武城書院重修記 기묘 宋程淳
武城書院重修記 정사 李在宇 武城書院埼盤重修記 임신 金澤
武城書院墻垣重修記 무진 金煥豊 賢宇重修及典祀所創建記 경오 金煥豊
武城書院院址復舊記 정축 金煥豊 武城書院重修記 정묘 金煥一
武城書院重修記 을미 尹秉 武城書院重修記 갑진 權直相
武城書院記 임인 金直述 講修齋重修記 을사 金麟基
絃歌樓創建記 1891 순상 閔正植 絃歌樓重修記 1903 鄭寬求
絃歌樓記 1891 관찰사 金奎弘 絃歌樓重修記 1936 전북지사 高元勳
懸板, 柱聯 외 기타
 
○ 碑石 (15기)
縣監 徐候灝淳不忘碑(1849) 縣監 李定植不忘碑(1882) 領相 李公最應不忘碑(1882)
前監役 丁汶述重修義助碑(1937) 進士 崔永大永世不忘碑(정묘) 武城書院廟廷碑(1898)
創建義捐芳名錄 興學齋創建碑(1921) 通政大夫 前秘書監丞 申瑢熙不忘碑(1925)
前醫官 李慶熙不忘碑(1925) 士人 金麟基不忘碑 武城書院重修紀念碑
武城書院史蹟紀念碑 丙午倡義記績碑(1992)
 
○ 전북대학교 박물관(호남기록문화시스템 검색)
告目 丁卯年 武城書院의 張大榮 等이 金承旨에게 올린 고목
告目 甲戌年 武城書院 西齋의 姜炳先 等이 崔生員에게 보낸 告目
望記 戊辰年 武城書院 儒會所, 崔珞均 武城書院 掌議 薦望單子
望記 丁卯年 武城書院 儒會所, 金溶悳 武城書院 掌議 薦望單子
望記 甲子年 武城書院 儒會所, 武城書院 道內色掌 薦望單子
望記 甲子年 武城書院, 道內色掌 薦望單子
望記 甲戌年 武城書院, 道內 儒林의 訓長 薦望單子
所志 1903년 全羅道의 儒生 金相浩 等이 武城書院의 院貳에게 올린 所志
通文 癸卯年 武城書院道會所에서 全州鄕校로 보낸 通文
通文 1924年 武城書院道會所에서 益山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丙辰年 武城書院道會所에서 金堤鄕校로 보낸 通文
通文 丙辰年 武城書院道會所에서 金堤鄕校로 보낸 通文
通文 癸卯年 3月 武城書院 南北道儒會에서 成均館에 私諡 요청하는 通文
通文 1924 12月 泰仁 武城書院儒會所에서 孝烈 표창건으로 益山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壬辰年 2月에 武城書院道會所에서 孝行 표창으로 金堤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壬申年 武城書院 儒林이 咸平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壬寅年 武城書院 儒林들이 金溝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壬午年 泰仁 武城書院에서 金溝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1903年 武城書院에서 金溝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甲戌年 武城書院 儒林들이 慕聖公會에 보낸 通文
通文 甲戌年 泰仁 武城書院 儒林들이 金溝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甲戌年 武城書院 儒林들이 金堤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戊申年 武城書院 儒林들이 泰仁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戊申年 武城書院 儒林들이 泰仁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壬辰年 武城書院都會所 權鍾豊 등이 金堤鄕校에 보낸 通文
通文 戊辰年 武城書院 金澤 등이 京城의 慕聖公會에 올린 通文
通文 丁卯年 武城書院 儒林 金箕述 閔在鎬 朴齊大 金 澤 等이 臨陂鄕校게 보낸 通文
任命狀 武城書院道會所 1925년
任命狀 武城書院道會所 1933년
通狀 慕聖公會에서 모낸 통장 1925년
通文 용산사에 보내온 통문 1959년
 
○ 국립전주박물관(2006 특별전-정읍편- 도록)
上書 불명 武城書院道會所
通文 불명 武城書院 西齋의 姜炳先 等이 崔生員에게 보낸 告目
祭文 년대불명 2매, 武城書院
 

5. 자료 특성
 
1) 武城書院 資料의 文化財指定 價値
무성서원에 소장된 고문서자료 중 지정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료는 모두 15종 15책의 성책고문서로 필사원본이다. 이들 자료는 크게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1) 유생안류(원유안, 원생안) 4책, 2) 완문,절목 2책, 3) 심원록․봉심안 6책, 4) 기타로 연액기사, 중수일기, 무성서원제물책 등 15책이다.(「지정조사보고서」, 문화재위원 이해준, 문화재전문위원 옥영정․서병패, 2010. 1)
① 유생안류 : 유생안은 총 4책으로 사액 이전의 태산서원 당시 원생록 2책과 무성원서원으로 사액 받은 이후의 원생록 2책이다. 그러나 합철이 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1618년, 1620년, 1622년, 1639년, 1659년의 5건의 泰山書院儒生案이 남아 있다. 武城書院院生案의 경우도 1773년 원생안과1800년 원생안, 그리고 1801년의 노비안이 함께 철해져 있어 모두 7점의 유생안과 1종의 노비안이 보존된 상태이다.
② 完文과 節目 : 모두 4책으로, 1838년과 1845년 완문은 서원전답의 관리 운영과 관련한 것으로 무성서원의 경제실상 및 그 운영의 구체적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완문에 첨부된 절목에는 서원전토를 팔아 고현내 각 리별로 分給殖利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906년 절목은 향수계 절목이다.
③ 심원록과 봉심록 : 심원록 5책, 봉심록 1책은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200여 년간의 무성서원 학맥과 인맥, 정치사적 성향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④ 기타 : 이밖에 무성서원 관련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성책문서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延額記事』와『重修日記』, 『武城書院祭物冊』이다. 『延額記事』는 1696년 무성서원 청액소에서부터 연액례, 폐물 등 부조기, 건물의 수리, 위패의 還安ㆍ移安 등 사액에 관한 제반 사항을 기록한 문서이다. ‘청액상소(柳之春 등, 1696년)를 시작으로 연액시 예관(예조좌랑 柳格)과 원임 김만해 등 직임 명단, 禮官 幣物, 各邑扶助記, 物力需入記, 청액시 유회, 사우중수, 연액시 향수, 이안제 축문, 환안제 축문 등등의 기록들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무성서원의 사액과 관련된 중요사실들을 상세하게 밝힐 수 있는 자료이다.
『重修日記』 1책은 1783년(정조 7) 고운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하기 전에 사당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출연한 인명과 1784년 쌍계사로부터 최치원 영정을 가져오는 과정까지 영당이건 관련한 일체의 일기체 기록이다. 흥양․낙안 양읍 통문, 본읍 답통을 시작으로 1783년(정조 7) 고운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이에 관련된 전 과정과 사당 중수에 참여 출연한 기관, 인명과 1784년 쌍계사로부터 최치원 영정을 가져오는 과정까지 영당이건 관련한 일체의 일기이다. 扶助記, 物力收入記, 移安獻官執事記, 奉安影幀日記, 단청중수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武城書院祭物冊』은 1734년(영조 10) 관청에서 무성서원의 제향시 공급한 제수의 물목과 수량을 기록한 문서로 사액 후 관에서 제수 공급한 물품 명목이 실려 있다.
 
2) 武城書院 講習禮 資料
무성서원은 한국의 서원 중에서도 창건 연혁과 변천과정에서 독특한 특성을 가진 곳이다. 즉 흥학당이라는 서당 강학과 향음주례․향약의 전통이 합쳐져 오랜 전통을 이어왔던 것이다. 무성서원의 강학례와 향약적 전통은 한국 서원의 특성을 특화할 수 있는 자료로 무성서원 강습례는 기본적으로 鄕飮酒禮의 예법에 따라 班次를 정하였으며, 크게 陳設-瞻拜-相揖-升堂-讀規-拜讀-進講-禮畢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3월3'일과 '9월 9일'이라는 개최 시기, '강습례'라는 명칭, 虛位의 진설과 허위를 향한 瞻拜, 허위 앞에서의拜讀 등 몇 가지 의식절차 상에서 여타 조선시대 서원 강회와 다른 독특한 면을 갖고 있다. 무성서원의 강습례는 경서 강독을 위주로 전개된 집단적 강학 활동이라는 강회의 일반적 의미와 함께 古禮 習禮라는 특별한 禮敎的 意味를 함께 갖고 있다(박종배, 「19세기 후반 武城書院의 講習禮에 관한 일 고찰」, 한국서원학보 제1집, 2011, 한국서원학회).
무성서원의 교육, 강학, 강습례 자료는 『武城書院誌』(1884) 하권의 院規, 甲乙記事, 그리고 상습례와 관련된 講習禮節目, 講習禮執事, 笏記, 講習禮圖 등이 있다.
『무성서원지』(1884년본, 1936년본)의 <갑을기사>는 1675년 2월의 사우 중수부터 1929년2월 중정일의 春享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1675년부터 1868년까지는 서원 중수나 제향 관련 기사가 院任 명단과 함께 드문드문 기록되어 있을 뿐이고, 총 기사 수도 30건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1871년 이후부터는 춘추 제향에서부터 원임, 강습례(향음주례 포함), 주요 인사의 봉심, 원우 수즙 등의 기사가 매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갑을기사>를 통해 볼 때, 강습례는 1873년부터 1880년까지 총 20회(향음주례 2회 포함)의 강습례가 집중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이후에는 한동안 행해지지 않다가1891년 이후 1922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간헐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1873년부터 시작된 무성서원의 강습례는 존치된 47개 서원의 하나인 무성서원이 서원의 본질적 기능인 ‘講學明道’의 모범을 보이는 차원에서 그 시행이 결의되었고, 芝山處士 安在頀는 1872년의 南學堂 중건과 1973년의 무성서원 강습례를 보고 집안에 소장하던 서책 수백 권을 무성서원에 기증하여 講習과 藏修의 자료로 삼도록 하였다(무성서원지』상 <芝山處士安在頀藏書記>).
<강습례절목>을 보면 반차(班次) 등 강습례 거행시의 수칙을 5개 조로 규정하고 있으며, 강습례의 진행을 돕는 ‘都執禮, 唱執禮, 直月, 直日, 典栍, 典簿, 曹司, 典書’ 등 집사명단을 <강습례집사>에 적고 있다. <홀기>, <강습례도>도 강습례의 전 과정을 이해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1906년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최익현이 무성서원을 거점으로 起義할 수 있었던 기반도 1872년의 강습례 시행 결의에서부터 다져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서원에 소장된 武城書院講經錄 1책은 그 전통을 이어 2000-2002년에 이루어진 강회를 기록한 자료이다.
 
3) 崔致遠 影幀 移安과 桂苑筆耕集의 간행
무성서원의 역사와 문화사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특기 사항은 바로 고운 최치원과 무성서원의 긴밀한 관련이다. 무성서원이 대원군의 서원훼철을 면하게 된 연유도 결국은 고운 최치원이라는 인물 때문이라 할 수 있고, 고운 이외의 무성서원 제향인물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지역의 ‘鄕賢’으로 비견되어도 좋을 만하다.
주지하듯이 무성서원이 위치한 곳은 태산현의 옛터로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최치원은 태산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일화와 유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무성서원을 찾는 많은 인사들이 고운의 행적을 기리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고, 무성서원과 직결하여서는 고운 최치원의 영정 봉안, 그리고 고운의 시문집인 『桂苑筆耕集』의 판각과 보관처로서 의미가 있다.
1783년(정조 7) 낙안·흥양향교 유생들이 통문을 보내어 쌍계사에 봉안된 영정을 이안하기를 권유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이듬 해인 1784년(정조 8)에 마침내 무성서원에 고운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에 관련된 자료로 『(武城書院) 重修日記』(1책 17장, 필사본)가 남아 전한다. 이 책에는 영정 이안의 전 과정과 사당 중수에 참여 출연한 기관, 인명과 1784년 쌍계사로부터 최치원 영정을 가져오는 과정까지 영당이건 관련한 일체의 일기이다. 扶助記, 物力收入記, 移安獻官執事記, 奉安影幀日記, 단청중수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고운의 영정은 1784년 이안 이후 1831년에 새롭게 개모하였고(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23년에 한말의 저명한 화사 채용신(1850-1941)에 의하여 다시 개모되어 현전하고 있다(전북도립미술관에 위탁보관 중),
한편 『계원필경집』은 고운 최치원의 시문집이다. 원래 879년부터 4년간 고변의 幕府에서 從事巡官으로서 書記의 職任을 맡고 있을 때 지은 만여 편의 글 가운데서 정수만을 뽑아 20권으로 편차한 四六文으로 삼국사기ㆍ해동문헌총록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ㆍ조선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세한 서지자료는 전해지지 않으며, 1834년 徐有榘가 호남 관찰사로 재직 중 洪奭周의 집에 家藏된舊本을 얻어 교정하여 全州에서 聚珍字로 간행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4220),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徐有榘는 校印桂苑筆耕集序(1834)에서 호남을 안찰하다가 武城書院에 들러 拜謁하였고 이때 洪奭周가 문집을 부쳐 주면서 후대로 전승할 것을 권함에 교정하여 간인하고 태인 武城書院과 陝川의 伽倻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현재 무성서원에는 판각이나 당시 간본이 전해지지 않는다.[校印桂苑筆耕集序, 1834년,徐有榘, 洪奭周 撰]
고운 최치원의 생사당터로 전해지는 月延臺(현재 무성리 성황산 서쪽 능선), 影幀과 桂苑筆耕, 그리고 인접한 관련 유적지(流觴臺碑, 披香亭 등)를 아울러서 연계하는 자료 정리와 활용이 필요할 것으로 보여진다.
 
4) 鄕賢 活動 傳統과 韓末의 武城倡義
무성서원은 한말의 창의지로서 유명하다. 병오창의, 무성창의로 일컬어지는 1905년의 최익현, 임병찬의 의병사적은 무성서원의 정신사적 위상과 지성사적 전통을 잘 보여준다.
원래 무성서원의 창건과정이나 전신인 태산사, 태산서원이 鄕賢들의 향촌활동, 특히 강학과 향약활동에 그 터전을 두고 있었다. 不憂軒 丁克仁(1401∼1481)이나 그의 뒤를 이어 강학의 전통을 이어간 訥菴 宋世琳(1479∼?), 默齋 鄭彦忠(1479-1557), 誠齋 金若默(1500∼1558), 그리고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5학당을 개설하여 흥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靈川 申潛(1491∼1554)의 행적, 역시 향학당 운영을 맡았던鳴川 金灌(1575-1635) 드의 행적도 이 큰 틀과 결코 다름 아니다.
주지하듯이 태인 고현동 향약은 보물 제118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무성서원 제향인물인1475년(성종 6) 불우헌 정극인의 향음주례서와 1510년 송세림의 향음주례 발문에서 보듯 고현 동약은 동린계로 도강 김, 여산 송, 영광 정, 경주 정, 청도 김씨 등이 만든 조직이다. 그리고 이는 무성서원의 전신인 흥학당과 태산사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며 그 활발한 활동시기도 거의 일치하며, 동약의 주도층과 서원의 운영 주도층이 거의 동일하였다. 고현동 향약의 자료중 현전하는 최고의 것인 1602년의 자료에 보이는 인물들이 대부분 태산서원(무성서원)의 관련 주역들이었고, 현전하는 무성서원의 주련[勸規交恤 藍田古約]에서도 이러한 향약과의 연관이 잘 드러나 있듯이 초기 향약의 시행처로서도 주목된다.
그런가하면 모두 제향이 되지는 않았지만 인목대비의 폐출에 반대하면서 고현동에 은거한 七狂과 송정에 은거했던 十賢(1910년 채용신이 그린 七狂圖와 松亭十賢圖가 남아 전함) 등에서 보듯이 무성서원 운영주도층들은 고현동 향약이나. 의병활동을 통하여 향촌사회에서 지성사적 대표성을 가지고 존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이 이어진 것이 바로 1905년 병오 무성창의였던 것이다. 창의 거점이 무성서원이었던 것은 무성서원의 영향력과 상징, 대표성이 인정된 결과였을 것이고, 그같은 모습들을 우리는 무성서원의 기록들을 통해서 잘 밝혀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면암 최익현의 의병창의는 앞에서 소개한 무성서원의 강회와 유림 동원력, 대표성을 기반한 것이었던 것이다.
 
 
6. 향후 활용의 과제
 
이상에서 간략하게 초략한 것처럼 태인 무성서원은 전라우도의 首院 역할을 해왔던 대표적 서원이다. 무성서원은 본래 태산사, 태산서원으로 존속하다가 1696년(숙종 21) 도내 유림들의 청액소로 무성으로 사액이 내렸고, 1784년(정조 8)에는 雙溪寺에서 최치원의 影幀을 가져왔다. 1834년에는 최치원의『계원필경집』을 간행하여 서원에 비치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에서도 문묘제향인인 최치원을 제향한 서원으로 유지 존속되었고, 한말 의병의 봉기지로, 또한 강학활동으로도 저명한 서원이었다.
이러한 연혁과 상징적인 위상에 비하여 볼 때 현전 자료의 량은 매우 적어 극히일부 만이 전해져 온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은 크다. 그러나 이번 한국서원의 세계유산 지정과 함께 새로운 각오로 이들 자료들을 재정리,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보다 완벽한 무성서원의 과거와 전통이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다음에서 향후 필요한 조사와 활용의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제안하여 보고자 한다.
 
1) 現傳 古文書 資料의 文化財 指定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전하는 고문서 자료들을 일괄하여 문화재로 짖어하는 일이다. 이미 이 분야 전문가들이 도지정을 권유한 바도 있다(문화재위원 이해준, 문화재전문위원 옥영정․서병패, 2010. 1). 지역연구자와 문화재위원들의 협조를 받아 하루빨리 도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야 할 것이다.
 
2) 資料集(影印本) 編刊과 追加 調査 推進
다음으로는 이들 지정, 혹은 무성서원의 역사적 갗티와 변천사를 증거하는 자료들을 자료집(영인본)으로 편간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성서원의 경우 다른 서원에 비하여 전문영구가 미진한데, 그 이유는 자료의 제약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 자료집의 영인본 발간은 연구자들의 연구의욕을 높여줄 것이고, 무성서원의 문화사적 특성을 몇 가지로 요약하여 강조한 것처럼 많은 연구들이 후속될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좀더 적극적인 노력으로는 이 기회에 분산소장된, 그리고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무성서원 관련 자료들을 정밀 재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에비하면 일찍이 1884년에 서원지를 편간하여 자료정리의 역사와 의지가 남달랐던 서원이다. 그럼에도 서원지에 수록된 자료들 중 많은 문서들이 현전하지 않는다. 더욱이 당시에는 이들 자료들이 필사원본, 혹은 고문서 형태로 보존되었을 것이고, 서원지에 수록되지 않았던 전적과 문서들도 훨씬 더 많이 소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무성서원지』상「芝山處士安在頀藏書記」에 芝山處士 安在頀가 1872년의 南學堂 중건과 1973년의 무성서원 강습례를 보고 집안에 소장하던 서책 수백 권을 무성서원에 기증하여 講習과 藏修의 자료로 삼도록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많은 장서가 비치되었음도 알 수가 있다.
그간에 연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관리 소홀과 무관심으로 산질된 이들 자료를 확보하려는 적극적 노력이 사원유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여 본다. 의식을 공유하는 무성서원의 僉位들이 중심이 되어 탐문, 추가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관련 문중, 유림의 소장문서들이 추가 확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다른 서원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기회에 통문류 같이 타 서원이나 타 기관에 보존된 문서, 그리고 문집류 자료에 수록된 각종 書簡이나, 記文, 問目, 通文들도 검색하였으면 좋겠다.

3) 硏究事業의 推進과 定例化
다음으로 한국서원에서 무성서원이 가진 독특한 문화사적 특성을 반영시킨 주제별 연구를 매년 진행(학술세미나, 연구논문(총) 발간)할 필요성이다. 서원정신과 역사의 올바른 이해와 계승이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큰 과제라고 볼 때 이 사업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간략히 몇가지를 지적하였지만 무성서원의 역사와 변천사를 살펴보면
 
고운 최치원의 생사당과 태산사
불우헌 정극인의 향학당 유적과 상춘곡(고현 동약)
영천 신잠의 5부학당과 생사당
7현의 흥학 행적과 무성서원
태산서원의 건립과 도내유생의 청액상소
연액의절
최치원 영정 이안과 계원필경 발간
무성서원의 중수 연혁
훼철을 면한 호남의 首院
무성서원 현가루와 게판문
무성서원의 강습례 전통
면암 최익현의 의병창의와 무성서원 - 강회와 유림 동원력
 
등등으로 무성서원만의 특수한 성격을 드러내는 주제들이 많다. 이들 세부 주제에 대한 연구와 발표회를 정례화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한다. 이로써 세부 연구테마들에 대한 다양한 전문가층의 연구동원과 활용,무성서원의 가치 증대와 일반인에 대한 교육, 홍보라는 부수적 효과까지 수반하며, 향후 문화자원으로 활용할 아이템들을 개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매년 정례적인 무성서원 학술세미나를 지자체에서 지원하거나 서원 자체(숭모계나, 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해도 좋을 것임)가 운영하여 그 결과를 논문집(자료집, 논총)으로 발간하면 좋을 것이다.
 
4) 기록자료의 교육, 홍보자료, 서원스테이 자원활용
마지막으로 이들 기록자료를 제대로 활용한 무성서원의 교양 해설자료, 교육, 홍보자료의 편찬을 강조하고자 한다. 현재까지의 관광 안내자료를 보면 매우 소략하고, 건물과 제향인물 중심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역사와 정신이 포함되고 경관이나 건축, 제향인물의 행적이 수요층에 따라 알기 쉽고 다양하게 정리되어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거론한 주제와 특성, 무성서원만의 모습들이 축약적으로 편집 온축하려면 연구, 편집, 교육자들이 힘을 합쳐 수요자에 맞는 3-4종의 서로 다른 홍보, 교육자료들을 개발하여 간행하여야 한다. 그럴 때 서원스테이나 학생들의 교육·체험자료로 효율적 활용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럴 때 무성서원은 단순 유교건축물이나 특정 인물 중심의 유산이 아닌 한국의 대표 정신문화유산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2012.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