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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9대서원 - 필암서원


 
작성일 : 12-09-14 16:29
실록에 나타나는 하서 김인후 선생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407  


실록에 나타나는 하서 김인후 선생

성종 262권, 23년(1492 임자 / 명 홍치(弘治) 5년) 2월 21일(임술) 5번째기사
당상직에 있는 화라온 올적합이 왜인보다 하석에 앉는 것에 불만을 품다

왜인(倭人) 과 야인(野人) 이 와서 숙배(肅拜)하였는데, 화라온 올적합(火剌溫兀狄哈)으로 당상직(堂上職)에 있는 자가 왜인(倭人) 보다 상석(上席)에 앉으니, 왜인 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 올적합 의 아래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하고는, 장차 돌아가려고 하면서 기꺼이 자리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임금이 주서(注書) 김인후(金麟厚) 로 하여금 위로해 타이르게 하고 다른 대청에 따로 자리를 베풀어 대접하게 하였다.



성종 278권, 24년(1493 계축 / 명 홍치(弘治) 6년) 윤5월 14일(정미) 3번째기사
황정 장충보 등을 왕자군 교수로 의망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적(典籍) 황정(黃玎) ·주부(注簿) 장충보(張忠輔) ·부사정(副司正) 김인후(金麟厚) ·권지 정자(權知正字) 황필(黃㻶) 을 왕자군 교수(王子君敎授)로 의망(擬望)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전 사부(師傅)는 어떻게 처치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이제 주의(注擬)한 바는 다 경학(經學)이 있는 자이니, 모두 찬독관(贊讀官)이라 칭하여 늘 두 사람이 날마다 번갈아 대궐에 나와 가르치고, 부마(駙馬)도 와서 배우게 하라. 전 사부도 갈지 말고 소아(小兒)를 가르치게 하라.”

하였다.



성종 286권, 25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1월 15일(을사) 1번째기사
지평 강형이 김인후의 사직이 불가하다고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강형(姜詗) 이 아뢰기를,
“ 이윤(李胤) 에게 김인후(金麟厚) 를 대신하게 하셨는데,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 김인후(金麟厚) 가 비록 서기(書記)의 직임(職任)을 감당(堪當)할 수 있다 하나, 나이 70여 세의 노모(老母)가 있다. 만약 먼 지방으로 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모자(母子)의 마음에 어떠하겠는가? 정리(情理)가 박절하기 때문에 명하여 환차(換差)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하자, 강형(姜詗) 이 말하기를,

“인정(人情)은 그렇지만, 법(法)에 있어서는 불가(不可)합니다. 김인후(金麟厚) 는 형이 있으므로 독자(獨子)의 예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임효곤(林孝坤) 이 동관 첨절제사(潼關僉節制使)를 사직(辭職)하였는데, 김인후(金麟厚) 가 이를 본받아 또 법(法)을 무릅쓰고 사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후에 김인후 를 본받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인데, 만약 일일이 따른다면 이는 법이 없는 것이니, 폐단(弊端)을 장차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지사(知事) 정괄(鄭佸) 이 아뢰기를,

“신이 김인후(金麟厚) 와 본래 교분(交分)이 없어서 이제야 비로소 들었는데, 김인후 는 외롭고 의지할 데 없어 다른 사람의 집에 임시로 붙어 살고 있으며, 노모(老母)뿐만 아니라, 장모[妻母]도 김인후 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비록 형(兄)이 있다하나, 한 집안이 의지하는 바가 오로지 김인후 뿐이니, 과연 절박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그러하므로, 이미 환차(換差)하도록 하였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강형(姜詗) 이 또 아뢰기를,

“듣건대, 구전(具詮) 이 상서(上書)하였다고 하는데,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발명(發明)27091) 하였을 뿐이다. 황형(黃衡) 이 답(答)한 것으로 보아, 추단(推斷)하지 않는 것이 옳다. 또 구전(具詮) 은 무재(武才)가 있으니, 차견(差遣)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강형(姜詗) 이 말하기를,

“듣건대, 구전(具詮) 은 노모(老母)가 있다 하는데, 기꺼이 절역(絶域)에 가며 사직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사람됨이 장수(將帥)로 임용(任用)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 구전 이 이미 늙은 어버이가 있다고 아뢰었다.”

하였다. 정괄(鄭佸) 이 말하기를,

“충(忠)과 효(孝)는 일치(一致)하니, 늙은 어버이가 있다 하여 으레 임용할 만한 사람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아니합니다. 전에 김세적(金世勣) 은 무사(武士)로서 특출(特出)한 사람이었으나, 늙은 어버이 때문에 종신(終身)토록 변장(邊將)으로 임용하지 않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구전 은 차견(差遣)할 만하다.”
하였다.



연산 34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7월 28일(병술) 2번째기사
성을 쌓는 일은 다시 문의하여 결정지어서 백성의 힘을 소모하지 말라고 명하다

장령 김인후(金麟厚) 가 아뢰기를,

“지금 강무(講武)하라는 명령을 들었사오나 전년의 농사가 부실하였고, 그 중에도 전라도 가 더욱 심하므로 관원으르 보내어 구제하게 하였던 바, 경상도 의 백성들도 또한 취식(就食)하였다 합니다. 이로써 헤아려 보오면 경상도 의 농사도 또한 부실하였던 것이며, 또 금년의 벼농사도 아직 성숙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결과도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마땅히 백성의 힘을 휴양하여 명년 대사에 대비하도록 하여야 가하온데, 멀리 외방 군사까지 징집하여 크게 사열하여 먼저 백성의 힘을 피곤하게 하니 불가한 일이 아니옵니까. 또 축성에 관한 일을 전라도 이외의 다른 도에는 우선 정지하도록 명령하시고는 다시 경상도 와 강원도 에 모두 축성하도록 하시니, 장차 명년에 대병을 일으키려 하면서 먼저 백성의 힘을 소모함이 가하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축성에 관한 일은 다시 문의하여 결정 짓고, 당번 군사 및 서울에 있는 하번(下番) 군사를 강무하게 하고 외방의 군사는 징집을 하지 말라.”

하였다.



연산 34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8월 3일(경인) 3번째기사
장령 김인후가 조중휘를 성균관 직강에 임명한 잘못을 아뢰니 받아 들이다


장령 김인후 가 아뢰기를,

“ 조중휘(趙仲輝) 는 전일 영릉 참봉(英陵參奉)으로 있을 때에 신중하지 못하여 득죄하였고, 그 후 익산 군수(益山郡守)·형조 좌랑이 되어서는 모두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는데, 지금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하시니, 행검이 더러운 사람이 장차 어떻게 유생의 모범이 되겠습니까. 또 수령은 6기(期)가 되어야 체직하는 것이 국가의 상법인데, 진위 현령 권영(權齡) 은 기한이 만료되지도 않아 갑자지 경직(京職)에 승서하심은 《대전(大典)》의 뜻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 조중휘 는 개차(改差)하라.”
하였다.



연산 34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8월 14일(신축) 1번째기사
시독관 정광필이 여자를 불로 지진 주인의 가혹한 형벌 사용의 잘못을 아뢰다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 장령 김인후 와 헌납 홍윤덕 이조의 관리에 대한 국문을 필하여 치죄하기를 청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시독관(侍讀官) 정광필(鄭光弼) 이 아뢰기를,

“듣자옵건대, 서강변에서 어떤 여인이, 쇠를 불에 달구어 살을 지졌으되, 근근히 죽지는 않고 말하기를, ‘주인이 낙형(烙刑)2451) 한 소치이다……’ 하였다 하니 형벌을 사용하는데는 비록 인군일지라도 이와 같이 가혹하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아랫사람이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매우 참혹한 일이로다. 만약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연산 34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8월 16일(계묘) 2번째기사
장령 김인후가 이조의 관리들이 중간에 계달하는 잘못을 아뢰다

장령 김인후 가 아뢰기를,

“이조의 관리들의 그 과실을 엄폐하기 위하여 중간에서 계달하므로 회곡(回曲)됨이 막심하니 치죄하소서. 또 옛날에는 장상(將相)은 국가 안위에 관계된 후라야 기복(起復)2453) 하였는데, 이제 권현령(權玄齡) 은 하나의 무부(武夫)일 뿐입니다. 그런데, 부방(赴防)시키기 위하여 또한 기복하시니, 신은 상제(喪制)가 이로부터 파괴될까 염려됩니다. 현령 이 비록 무재가 있기는 하나 이러한 유는 얼마든지 있으니, 기복함은 마땅치 못합니다. 송공손(宋恭孫) 을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으로 삼으시니, 개성 은 고도(古都)이며 인민이 조밀하고 송사가 호번한데, 송공손 은 문필이 부족하므로 그 직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수형(李守亨) · 유속(柳續) 은 6품이 된 지 오래지 않은데, 갑자기 판관(判官)에 승서하시니, 아울러 개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조에 관한 일은 판서가 외척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뜻이 없기 때문에 버린 것이며, 권현령 에 대하여는 전례를 고찰하고 송공손 에 대하여는 정승에게 물어 보고, 이수형 과 유속 에 대해서는 이조에 물어 보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하기를, “ 김인후 는 바르고 충실하여 부화가 없는 사람으로 강어(疆禦)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조 판서 신수근 의 용사 농권(用私弄權)함을 통분히 여겨서 경연에서 바로 신수근 의 방자한 정상을 배척하되 조금도 흔들리거나 굽힘이 없었으며, 또 성준 을 상 앞에서 면대하여 공격하니 성준 과 신수근 이 깊이 미워하므로, 얼마 안 되어 정선 군수(旌善郡守)로 전보되었다.” 하였다.


연산 35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9월 19일(병자) 3번째기사
장령 김인후 등이 채수가 예관에 적당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들어 주지 않다

장령(掌令) 김인후(金麟厚) ·정언(正言) 성희철(成希哲) 이 아뢰기를,

“ 채수(蔡壽) 의 일은 신 등이 문안(文案)을 상고해 보오니, 그 종이 빚을 받은 일로 하여 절의 여종 석을금(石乙今) 을 때려 죽였는데 마침 사(赦)가 있어 면죄되었습니다. 그가 거상(居喪)을 삼가지 않아 이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예관(禮官)을 맡기오리까. 곧 개정하옵기 바라옵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연산 35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9월 28일(을유) 2번째기사
장령 김인후 등이 다시 채수의 일을 아뢰었으나 들어 주지 않다

장령 김인후(金麟厚) 와 정언 성희철(成希哲) 이 아뢰기를,

“ 채수(蔡壽) 의 일은 신 등이 논계한 지 이미 오래이온데, 전하께서는 하교하시기를, ‘ 채수 의 전일 소행이 이러하였으나 지금에 시비를 분간할 수가 없다.’고 하오시니, 신 등의 생각으로는 채수 의 시비가 분명하므로 지금 반드시 다시 분별할 것이 없습니다. 또 신 등의 논계는 그 죄 주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조행이 없는 사람은 예관(禮官)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감히 아뢴 것입니다. 지금의 6조(曹)는 옛날의 6경(卿)이요 판서가 유고하면 참판이 우두머리가 되오니, 청컨대 개차하옵소서.”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연산 35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10월 12일(무술) 2번째기사
김효강의 직첩을 다시 주고 대궐 안에서 감독하는 일을 하게 하다

사헌부에 전교하기를,

“대궐 안에서 감독할 일이 있으니, 김효강(金孝江) 의 직첩을 도로 주어서 행공(行公) 추국(推鞫)하게 하고, 겸하여 안의 일을 감독하게 하라.”

하였다. 장령 김인후(金麟厚) 가 아뢰기를,

“ 횡성현(橫城縣) 에서 공납한 판목(板木)을 귀후서(歸厚署) 앞에 두었는데, 김효강 이 내수사(內需司) 소용이라 핑계하고 사사로 화인(火印)을 찍고, 맡아 지킨 자를 때린 다음 제 집으로 실어다가 썼습니다. 그 집 목수와 이웃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승복하였는데도, 김효강 만이 항거하고 승복하지 않으므로 신 등이 그 직첩 거두기를 청하고 뒤따라 몸을 추국(推鞫)하게 된 것이요, 상께서도 그 정상을 아시어 윤허하신 것이온데, 지금 4∼5일이 못되어 직첩을 돌려주기를 명하시니 매우 불가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수사에서 지금 역사 감독하는 일이 있어서 김효강 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려 하기 때문에 돌려 주게 한 것이다. 또 김효강 은 나이 70이 넘었으니, 데려다 국문하여 자복하지 않더라도 형장 심문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연산 35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11월 1일(정사) 1번째기사
장령 김인후가 성준을 공박하여 말하니 말이 지나치다고 하다

경연에 납시었는데 영사(領事) 성준(成俊) 이 모시었다. 장령(掌令) 김인후(金麟厚) 가 성준 을 공박하며 아뢰기를,

“대저 성급한 사람은 피상적으로 꾸며대서 하는 호소를 신청(信聽)하고 먼저 들은 말을 위주로 합니다. 그러나 집 종의 말은 들어서는 안 됩니다. 재상 집의 종은 본래 법을 범하는 자가 많으니 그것은 세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정부[廟堂]의 대신이 어찌 집 종의 일을 가지고 단자(單子)를 드릴 것이겠습니까. 그 단자를 드린 이유는 세력을 가지고 위협하여 집 종의 범죄를 버려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신 등을 그르다 하시기 때문에 신 등이 피혐하는 것입니다. 성준 이 아무리 신 등을 업신여기지만 법사(法司)야 무서워하지 않겠습니까. 성준 이 집 종의 일을 가지고 분노하여 문득 아뢰므로 신 등이 지금 바야흐로 피혐하고 있는데, 성준 은 낯 부끄럽게도 그대로 자리에 나와서 혐의를 삼지 않으니 이것이 가한 일입니까. 성준 의 종이 아니면 법사의 이속을 결박할 수 없으며 성준 이 아니라면 역시 마음대로 사사로운 일을 아뢸 수 없습니다. 조종조 이래로 백여 년간 법을 행하던 대간이 하루 아침에 세도 집의 억센 종에게 법을 행하지 못하니, 신 등은 만대의 죄인입니다.”

하니,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성준 이 나와서 아뢰기를,

“장령들이 경연에서 소신을 많이 비방하되, ‘마음대로 자기의 사사로운 것을 아뢰었다.’ 하옵는데, 신은 본디 피혐한 것뿐이옵고 자신의 사사로운 것을 아뢴 것이 아닙니다. 또 신에게 ‘낯 부끄럽게 나와 앉는다.’고 하는데, 이미 피혐하였지만, 피하지 말라 하교하오시니, 신이 감히 조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위를 능멸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전하께서 아시는 일입니다. 비록 낮은 관직, 천한 선비라도 대신을 용대하지 못해서 한 가지의 작은 일을 보아도 모두 비웃기 때문에 대신들이 모두 무서워서 움추립니다. 주인이 무서워서 움츠리는데, 더구나 그 집의 종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세도하는 집 억센 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복해서 생각하여도 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대론(臺論)이 이러하니, 직위에 나가기가 미안하여 피혐하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장령(掌令)의 말이 과하도다. 피혐하지 말라.”
하였다.



연산 35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11월 18일(갑술) 1번째기사
장령 김인후가 성준의 일을 아뢰니 성준이 맞서서 해명하다

경연에 납시었는데, 영사(領事) 성준(成俊) 이 모시었다. 장령(掌令) 김인후(金麟厚) 가 아뢰기를,

“근일 전하의 하시는 일이 모두 조종의 법 밖에서 나왔습니다. 조종조에서도 부인으로서 녹 받은 자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런 일을 당연히 대신들과 상의하여 행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의논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반드시 말리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 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너는 법 밖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렇다면 성종 께서 이정(李婷) 2526) 의 처에게 2등의 녹봉을 주신 것은 무엇이냐. 또 나의 이 일은 특별한 은혜이다.”

하매, 김인후 가 아뢰기를,

“ 성종 께서 부인으로 친척이 된다 하여 특별히 녹봉 2등을 주시었는데, 이 역시 법 밖의 일이오니 이것을 인용하여 준례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주시려면 사여(賜與)라 칭해야 하며, 녹봉이라 이름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헌납(獻納) 홍윤덕(洪潤德) 이 아뢰기를,

“ 전라도 는 지역이 크고 백성이 많아서, 다른 도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정숙지 는 일찍이 참의를 지내기는 하였으나, 경관직(京官職)인즉, 남이 하는 대로 대열을 따라다닐 수도 있지만 한 방면을 맡아 전제하는 소임이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이 정숙지 를 ‘상명하고 강개하다.’ 한 것은 정숙지 가 재상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의논한 것입니다. 정숙지 로 감사를 임명한다면 누가 조정에 대간이 있다 하오리까.”

하고, 김인후 는 아뢰기를,

“ 성준 이 법을 어기고 자기의 사사일을 바로 위에 주달하니, 이것은 법이 대신에게서부터 무너지는 것입니다. 역시 추국(推鞫)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성준 이 아뢰기를,

“신의 일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는 것이며, 신 역시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일찍이 어전에서 스스로 해명하려 하였사오나, 무례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만두었습니다. 전번 경연에서 김인후(金麟厚) 가 아뢰기를, ‘전금리(典禁吏)가 납패(納牌)할 때에 신의 종을 잡아 헌부로 갔다.’고 하오나, 신의 종이 잡힌 것은 인정(人定) 때였습니다. 납패는 언제나 파사(罷仕)2527) 할 때에 있는데 어찌 인정 후에 패를 가지고 순금(巡禁)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평(持平) 김효간(金效侃) 은 또 신을 논박하여 이르기를, ‘녹사(錄事)는 사사로이 부리지 못하는 것인데, 어제 녹사가 단자(單子)를 드리니 불가하다.’ 하오나, 신의 생각으로는 녹사는 정부의 당리(堂吏)이므로 정부 6조(曹)에서 고할 일이 있으면 역시 녹사로 서장(書狀)을 드리는 것은 준례입니다. 그런데 대간이 신의 과실을 얽어매려 하여 신의 사실 아닌 일을 이렇게 논박하니, 그 심리가 지극히 간휼합니다. 신으로서는 스스로 해명할 수 없으니 소민(小民)의 일을 따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김인후 가 아뢰기를,
“ 성준 이 간휼하다고 대간을 절욕(折辱)하는데, 대신의 체모로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신 등이 자기를 논박하는 데 성내어 문득 추한 욕설을 하는 것이오니, 대간이 없다면 성준 의 마음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연산 35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11월 21일(정축) 2번째기사
대사헌 김경조 등이 성준의 죄를 아뢰며 불초하다고 하자 옥에 가두다

대사헌 김경조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여러 번 옥에 나갈 것을 청하였는데, 하교하시기를, ‘정승이 간휼하다고 한 것은 다만 김인후(金麟厚) 를 가리킨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김인후 가 아뢴 것이 모두 본부의 뜻이온데, 성준 이 어찌 김인후 만을 배척한 것이리까. 그러므로 신 등이 함께 대변(對辨)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 등을 하옥하고 직위를 갈으신다면 성준 의 뜻이 역시 쾌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너희들이 정승을 불초하다고 하니, 그 말이 매우 그르다. 곧 취옥(就獄)하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 35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11월 25일(신사) 1번째기사
의금부에서 대간의 죄에 해당하는 율을 아뢰자 죄를 줄는 지의 여부를 정승에게 묻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전 대사헌 김경조(金敬祖) 는 죄가 태형(笞刑) 50에 해당하고, 집의(執義) 이점(李坫) 은 장형(杖刑) 60, 장령 김인후(金麟厚) 와 이의손(李懿孫) ·지평 김효간(金效侃) 은 모두 태형 50에 해당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을 능욕하였으니 죄 의당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을 의논하느라 발언한 것이니, 죄를 주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정승과 증경(曾經) 정승들에게 묻게 하라.”

하였다. 윤필상(尹弼商) 이 의논드리기를,

“근일 대간의 아뢴 사연을 보오니 정리에 지나친 것도 있사오나, 대간의 말한 바는 혹 중도를 지나치더라도 죄주지 않는 것이 역대의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하고, 어세겸(魚世謙) 은 의논드리기를,

“대간의 범한 일이 율로는 이 같다 하더라도 성상께서 모름지기 너그럽게 용납하시어 그 뜻을 좌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가사 대신이 죄가 있는데 언관(言官)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지금 성준 을 지척(指斥)한 것은 작은 과실이온데, 만일 이것으로 하여 죄를 준다면 장래에는 언로(言路)를 막고 사람들의 시청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하고, 정문형(鄭文炯) 은 의논드리기를,
“지금 김경조 등의 추고(推考)한 문안을 보니 법으로는 당연하옵니다만, 언관의 과실은 너그럽게 죄를 처결하는 것이 제왕의 큰 도량입니다.”
하고, 한치형(韓致亨) 은 의논드리기를,
“대관의 말은 중도에 지나치더라도 우용(優容)하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하였다.



연산 35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12월 10일(갑오) 1번째기사
우의정 성준이 사직하는 글을 올리니 글을 돌려주며 사직하지 말라 명하다

우의정 성준(成俊) 이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근일 대간이 신의 죄를 극론(極論)하오나, 신은 신의 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당초 신의 집 종이 손녀의 침구보[寢褓]를 가지고 영춘군(永春君) 집에 갔는데, 그때가 이미 인정(人定) 후였습니다. 길에서 금란(禁亂)한다는 술취한 사람을 만나 침구보를 위협으로 풀려고 하니, 신의 종은 이것이 필시 도적이라 생각하여 서로 힐난한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단자(單子)를 써서 녹사(錄事)를 시켜 사헌부에 보냈는데, 헌부에서는 시비를 가리지 않고 곧 신의 종을 가두고 그 죄명을 속여 말하기를,

쇠고기와 쇠가죽을 가졌다고 하니, 이것은 헌부가 신이 참으로 쇠가죽과 쇠고리를 보냈다고 죄를 만들려는 것으로서 그 계략이 깊습니다. 이런데 신이 어찌 뻔뻔스럽게도 사피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동료 한치형(韓致亨) 에게 의논하니, 역시 신의 생각과 같으므로 신이 부득이 피혐(避嫌)하였으며, 피혐을 하자니 사유를 갖추어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헌부가 신의 죄를 청하지 않은 날이 없어, 지난달 14일에는 경연(經筵)에서 장령(掌令) 김인후(金麟厚) 가 신의 죄를 논하기를 ‘대신이 종의 일로 하여 단자를 드렸으니 그르며, 사사 단자를 녹사(錄事)를 시켜 드렸으니 그르며, 사사일을 계달(啓達)하는 것은 속록(續綠)에 금하는 바인데, 신 등이 〈사실을〉 분간하기 전에 문득 아뢰었으니 역시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르기를 ‘서리(書吏)가 패(牌)를 바치고 돌아가려 하다가 길에서 만나 서로 싸웠다.’고 하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종놈이 제가 사사로이 나들이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니요, 신이 사실 시킨 것이오니, 어찌 종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녹사는 재상의 아전(衙前)으로서 모든 관계 단자를 모두 녹사를 시켜 드리는데, 하물며 이런 범람된 아전의 심문을 청하는 일을 녹사로 드리는 것이 무엇이 해로우리까. 대범 대간이란 공론의 소재인데, 사람에게 죄를 얽어 놓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가합니까. 만일 성상께서 금부(禁府)로 옮겨 밝히 시비를 분별하도록 명하지 않았으면, 신은 반드시 헌부가 공론을 빙자하여 얽어놓는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금부에서 시비를 분변하여 얽어놓은 정상이 드러나니 헌부의 관원은 누가 자기에게 마칠까 두려워서 분간하기 전의 일을 발명하려 하되 상달할 근거가 없으므로 신의 죄를 청하여 발명한 것입니다.

또 그 패를 바친다는 말은, 역시 밤 깊은데 바치지 않은 관원을 검거하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을까 두려우므로 미리 막은 것입니다. 어찌 대간으로서 자기 죄를 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꾸며서 만듭니까. 지금 김인후 가 헌원(憲員)으로 감히 어전에서 바르지 못함이 이러하니 그의 간휼함이 심하옵니다. 신이 곧 답하여 아뢰려고 하였으나, 성상의 들으심에 번거로울까 염려되어 감히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8일 경연에서 지평(持平) 김효간(金效侃) 이 또 신의 죄를 청하기를 김인후 의 아뢴 바와 같이 하였습니다. 왕이 하교하기를, ‘한쪽만을 가두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시니, 김효간 이 답계(答啓)하기를 ‘종 계손(戒孫) 은 문초를 받았으므로 가두고, 서리(書吏) 나장(羅將)은 아직 미처 문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아전과 사령이 혹 범죄가 있으면 곧 가두어 추고(推告)할 때에 문초를 받는 것이 준례인데, 김효간 이 역시 어전에서 거짓 꾸미기를 이렇게까지 하였으니, 이 역시 간휼한 것이오나, 신이 또 성상의 하감하심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20일 경연에서 김인후 는 의금부에서 추고를 끝내므로 이미 사헌부의 소위가 부실함을 알았는데도 일을 말하던 끝에 범연(汎然)하게 신의 일에 미쳤으니, 이것은 김인후 가 본부의 소위가 부실하다 하여 문득 중지하면 그의 잘못이 더욱 분명하기 때문에 범연히 청한 것이오니, 그 곧지 못함이 더욱 심하옵니다. 또 김인후 등이 여러번 어전에서 신을 대하여 죄를 청하고, 능욕(陵辱)함이 이미 심하온데 신이 한 번도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성상께서는 그 곡직을 통촉하신다 하더라도 좌우 시종들이 신에게 죄범이 있다 하고, 김인후 등의 의론은 공정하다 말할 것이므로 신이 부득이 그 말이 곧지 못한 정상을 배척하고 그 간휼함을 숨김이 없이 아뢰옵니다.

대저 사람들의 말하는 것이 곧으면 정대하다 하고 곧지 않으면 간휼하다 합니다. 또 어찌 범인과 대간을 구분하여 말을 달리 하오리까. 대간이 정대하면 정대하다 하고 간휼하면 간휼하다 하는 것은 모두가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사람이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인후 등이, 신이 자기들의 과실을 지적한 데 성을 내서 신을 불초하게 송사하는 자라고 보복을 하였으나 신이 말한 것은 정확하게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요, 저들이 말한 것은 끝내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없는 말을 가지고 사실을 지적한 말에 비교하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을 구원하기는 ‘언어간의 작은 실수이다.’ 말하고, 신을 훼방하기는 극구 논박하여 못하는 말이 없으니, 아무리 죄상이 나라를 그르친 권간(權奸)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오리까. 이것은 또 사람의 경중에 따라서 논하는 것입니까. 직위의 경중에 따라 논하는 것입니까. 신은 마음 아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이 비록 성은을 입사와 사퇴를 허락하시지 않사오나, 신이 삼공에 비위(備位)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논박을 받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백관을 이끌어 나가리까. 바라옵건대, 빨리 신의 관직을 갈고 이질고 능한 이로 대신하여 대간의 뜻을 쾌하게 해 주심이 신의 지극한 소원이옵기에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하니, 그 끝에 어필로 써서 이르기를,

“마음과 일이 모두 바른데 어찌 번거롭게 물러가려 하오. 지금 만일 공을 체대한다면, 대간의 동료를 비호(庇護)한 뜻을 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위를 능멸하고 대신을 업신여기는 풍습이 날로 일어날 것이니, 이것을 누가 구원할 것이오. 그러므로 윤허하지 않으오.”

하고, 이어 한림(翰林) 서후(徐厚) 에게 명하여 그 소장을 성준 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연산 37권, 6년(1500 경신 / 명 홍치(弘治) 13년) 4월 15일(무술) 2번째기사
대사간 안호 등이 전 대간의 일을 의정부에서 논계한 경위를 물을 것을 청하다

대사간 안호(安瑚) 와 사간 이효독(李孝篤) ·집의 김극회(金克恢) 가 아뢰기를,

“전 대간이 논죄(論罪)되는 것은 애매합니다. 정부에서 논계한 것은 반드시 들은 데가 있을 것이니, 그 경위를 물어보소서.”

하였는데, 들어 주지 않았다.

당초 이점(李坫) 이 집의(執義)로 있을 때에, 성준(成俊) 의 종이 우육 금지령에 걸렸으므로 성준 이 여러 종을 시켜 헌부의 이속을 결박하고 그 노비의 고기를 빼앗았었다. 대관(臺官) 김인후(金麟厚) 가, 성준 이 종을 시켜 금지령을 범하고도 헌부(憲府)의 이속을 결박하였다고 하여 추국(推鞫)하기를 계청(啓請)했었고, 또, 경연(經筵)에서 서로 힐란하였다. 성준 이 감정을 품고 은밀히 대간의 과오를 노려 전일의 분을 풀려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점(李坫) 이 그 당시의 대관으로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요, 박임종(朴林宗) 의 체임이 그 자취가 사정을 낀 것 같으므로, 성준 이 이것을 가지고 아울러 중상하여 앞으로는 대간이 감히 항거하는 사람이 없게 하려 한 것이었다. 국문에 당하여 박임종 의 일을 발설한 사람은 바로 그와 교분이 두터운 양희지(楊稀枝) 였므르로 왕이 수의(收議)하게 되자, 성준 이 구원하기를 매우 지극하게 하였기 때문에 옥사가 다소 너그러웠으니, 그의 농간과 음흉이 대개 이랬던 것이다.


연산 53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5월 4일(계사) 1번째기사
성준의 논죄를 재촉하고 한치형·이극균 등의 죄를 논하다

밝을녘에 삼정승·의금부 당상이 남빈청(南賓廳)에 나가니, 전교하기를,
“ 성준(成俊) 을 급속히 조율하여 아뢰라.”
하고, 또 최숙생(崔淑生) 에게 묻기를,
“사복시(司僕寺) 밭을 내원포(內園圃)에 속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네가 먼저 발언했느냐? 만일 먼저 발언한 자가 있으면 빨리 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유순(柳洵) 등이 아뢰기를,

“전일 한치형(韓致亨) · 이극균(李克均) 이 죄를 ‘승여를 지척하되 정리에 극히 해롭게 한 율[指斥乘輿 情理切害之律]’로 논하도록 하셨는데, 지금 준 의 공초에, ‘전일 논술한 일들은 모두가 치형 · 극균 에서 나온 것이요, 저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서명(署名)을 한 것뿐이다.’고 하니,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 감히 품합니다. 또 숙생(淑生) 을 국문한즉, 먼저 말을 한 것은 정인인(鄭麟仁) 이라 하니, 잡아다 빙국(憑鞫)함이 어떠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 유빈(柳濱) · 이철균(李鐵均) 같은 자는 먼저 주창한 사람이나 자수하였기 때문에 모두 사형을 감하여 종이 되게 한 것이다. 성준 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모의에 참여했을 것이니,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어떤가. 또 그 손자는 직첩을 거두고 서울에서 살지 못하게 하며, 그 아들 역시 외방으로 내보내야 한다.”

하였는데, 유순 등이 아뢰기를,
“교수형에 처함이 지당합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숙생은, 위에 바치[供上]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아뢰었다 하나, 대저 내포(內圃)에 속하면 어디에 쓰겠는가. 말이 매우 간사하니 형신하여 아뢰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 성준 을 교수형에 처하되, 준 에게 이르기를 ‘네가 경연(經筵)에서 김인후(金麟厚) 와 자기 일을 가지고 서로 힐난하여 말지 않았으며 심지어 포악하다고까지 말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중금(中禁)4364) 노형손(盧亨孫) 의 사형을 의논할 때, ‘바로 위에 속한 일이 아니다.’고 말하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또 궁중의 일을 짐작으로 억측하여 말하는데, 가령 다른 사람이 말하더라도 네가 금하고 막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하였으니, 그 죄가 셋이다.’고 하라.”

하였다. 이어 정승들에게 전교하기를,

“지금 위를 능멸하는 풍습과 누설하는 풍습이 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대신을 공경하고, 여러 신하들을 체받다.[敬大臣 體群臣]’고 하였다. 내가 언제나 승지들이 후설(喉舌)의 자리에 있으면서 매우 근고(勤苦)한다고 하여 일찍이 더 대우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재상과 대간(臺諫)에 대하여도 역시 존대하였는데 그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대간은 궁중의 비밀한 일이라도 감히 말하여, 또 김일손(金馹孫) 같은 무리는 들은 것이면 쓰지 않는 것이 없어 무도한 말을 많이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가한가. 예전에4365) 이르기를 ‘나를 돌보아 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撫我則后 虐我則讎]’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재상과 대간으로 대우하는데, 재상과 대간은 그 도로써 섬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죄를 주는 것이다.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마음먹고 통렬히 고치는데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다. 이 뒤에는 재상·대간이라 하더라도 이런 일이 있으면 죄를 주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이 뜻으로 다시 전지(傳旨)를 내려 깊이 알도록 하라.

또 이세좌(李世佐) 의 죄는 난신(亂臣)이나 다름이 없다. 그 아들 이수형(李守亨) 등 4인과 급제한 이세걸(李世傑) 을 베이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게 하려는데 정승들의 의견은 어떤가? 성준(成俊) 의 아들 성경온(成景溫) · 성중온(成中溫) 은 외방에 부처(付處)하고, 그 손자와 한형윤(韓亨允) 역시 극균(克均) 의 아들의 예에 의하여 형장을 때려 내보내는 것이 가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반드시 중죄로 논한 뒤에야 통쾌하기 때문이다.”

하매, 순(洵) 등이 아뢰기를,

“ 세좌 의 자재를 한결같이 난신의 준례로 논단하는 일을 율조문을 상고하온즉 ‘부자(父子)의 나이 만 16세 이상은 교수형에 처하고, 동생은 공신의 집에 종으로 나누어 준다.’고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그 아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동생은 종이 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율조문에 의하여 논단하라.”

하였다. 의금부 당상 정미수(鄭眉壽) 등이 아뢰기를,

“ 세좌 의 아들로서 평안도 에 안치(安置)4366) 된 자가 3사람이요, 함경도 에 안치한 자가 2사람인데, 본부(本府)의 낭청(郞廳) 수가 적으니, 낭청 한 사람씩을 한 도에 보내어 모두 교수형을 집행하도록 하고, 세걸 은 이미 흥양현(興陽縣) 에 부처하였는데, 그대로 그 고을에서 종이 되게 함이 어떠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5인의 처소에 각각 낭청을 보내어 잡아다가 교수형에 처하게 하고, 세걸 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연산 53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5월 15일(갑진) 2번째기사
김감·정미수·이계남이 이극균·이세좌·윤필상 등의 족친을 써서 아뢰다

의금부 당상 김감(金勘) · 정미수(鄭眉壽) · 이계남(李季男) 이, 이극균(李克均) · 이세좌(李世佐) · 윤필상(尹弼商) · 성준(成俊) · 한치형(韓致亨) · 어세겸(魚世謙) 의 동성과 이성(異姓) 팔촌 족친을 써서 아뢰니, 전교하기를,

“무릇 내가 쓰는 물건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여 중지시키며, 심지어는 의대(衣襨) 같은 것까지도 범람하다고 말을 하였으니, 이는 아랫사람이 위에 계산하여 주려 한 것이다. 이는 모두 정사를 어지럽힌 신하이기 때문에 이렇게 죄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그 뿌리를 다 뽑아버린다면, 뒤에 신하로서 자손이 번성한 것을 믿고 발호(跋扈)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자가 반드시 경계삼아 방자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 무사들이 극균(克均) 에게 아부하기를 여라(女蘿)4380) 가 나무에 붙듯 하였으니,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 필상(弼商) 은 간흉(奸兇)하기가 더욱 심하고, 세좌(世佐) 는 전후에 중죄를 범하였으므로, 이 세 사람의 족친은 동성 팔촌과 이성 사촌까지, 그 자녀들을 분정하여 귀양보내며, 연좌(緣坐)시키는 법이 없더라도 역시 서울에 살지 못하게 하라.

세겸(世謙) 은 ‘대비의 쓰는 것은 사찰(寺刹)에 쓰는 데 지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또한 억측으로 말한 것으로서 그 죄가 원래 중하다. 그러나 치형(致亨) 등에 비하면 좀 경하기 때문에, 증손까지만 죄를 주게 한다. 치형 과 성준 의 죄는 세겸 보다 중하므로, 동성이나 이성이나 사촌까지 죄를 주어 모두 각 포구의 방어(防禦)하는 곳으로 나누어 보내며, 그 중 법에 의당 연좌될 사람은 모두 형장 때리라.”

하고, 또 승정원과 김감(金勘) 에게 전교하기를,

“국가의 소용에 대하여 가불가(可不可)를 논하기로 한다면, 신하의 집 용도(用度)를 인군 역시 그 출납에 관여하여 제 스스로 쓸 수 없게 할 것인가. 극균 등은 나의 용도 수량에 대하여 언제나 각 관사로 하여금 상고해서 보고하게 하여 번거롭게 논계(論啓)하였다. 무릇 대신이 인군을 섬기되 그 대강을 총관(總管)할 것이지 자질구레한 사소한 일들을 어찌 다 논할 것인가. 이는 그 마음이 간특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삼대(三代)4381) 이전에는 법 제도가 소활하고, 인심이 순후하여 반드시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대저 신하는 마음가짐이 순후하고 간특함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신하된 자는 언제나 나라를 근심하는 말을 하여 ‘사직이 중하다.’고 하면서 하는 일은 곧 이러하니, 이는 실로 안에 간흉한 마음을 가지고 겉으로만 사직을 위한 생각과 나라를 근심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대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비유한다면, 집이 기울게 되더라도 기둥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니, 인군이 혼암하더라도 아래에 어진 신하가 있어 부지(扶持)하고 광구(匡救)한다면, 나라 역시 힘입을 수 있는 것이다. 어찌 극균 등과 같이 인군이 소소한 일을 하고 안하는 것을 떠들어대야만 할 것인가? 이 뒤부터 정부 대신들은 세쇄하게 하지 말고, 오직 큰 의리가 있는 것을 논집(論執)하여 순후한 풍속을 회복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대저 신하로서 인군을 섬기는 데는 지위의 고하를 물을 것 없이 오직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요, 은총의 후박이나 대우의 경중으로 그 마음을 달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인군이 벼슬을 높이고 은총을 특이하게 한다면, 어찌 그 심력을 다하여 섬기지 않을 것이랴. 지금 재상들이, 누가 혹 술과 고기를 선사하여도 기뻐하는 마음을 갖고 외방 수령이 좀 뇌물을 주더라도 또한 반드시 감사할 줄 안다. 하물며 인군이 존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여 지위가 재상이 되게 하였다면 어찌 마음에 감격하지 않을 것이랴. 근자에 극균 등이 정부에 들어와서 하는 일이 이러했으니, 매우 그르다. 정부와 육조·대간(臺諫)에게 효유하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 성준(成俊) 은 주창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는데, 다시 생각하니, 대저 불의의 일에 어찌 주창과 추종이 다르겠는가. 또 준(俊) 은 전에 경연(經筵)에서 그의 손녀 사위 맞이하는 일로 대간 김인후(金麟厚) 와 서로 힐난하되, 음성과 안색이 모두 거칠고, 심지어는 인후 를 강포한 사람이라고 욕설까지 하였으니, 만약 위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인군 앞에서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대저 대간 역시 신하이니 뜰 아래로 끌어내려 형장을 때리더라도 불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인군으로서 오히려 항상 높여 대우하는 것은 그가 대간(臺諫)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준 이 감히 이 같았으니, 불경이 심한 일이다. 지금 준 을 이미 교수하였으니 다시 다른 형벌을 가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그러나 악을 징계하여 후세에 보이고 싶으므로, 다시 중죄로 처벌하지 않을 수 없으니, 능지(凌遲)하라.

또 극균 · 치형 · 준 이 정부에 있을 때 반드시 세우고 경장(更張)한 법이 많았을 것이요, 또 변방에 출입이 많았으므로 무사에게 편하게 하려 하여 그들이 아뢰어 세운 법이 더욱 많았으리라 생각되니, 지금 사관의 기록을 상고하여 다 삭제해 버리는 것이 어떠한가? 만일 내가 잘못한 것이라면, 걸주(桀紂) 라고 썼더라도 진실로 삭제할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하지도 않은 일을 무함하여 쓰기를 무오년 일과 같이 하였다면, 역시 삭제하는 것이 가하다. 더구나 극균 등이 어기고 그르친 일이겠는가.”

하니, 김감(金勘) 과 승지들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좀 있다 전교하기를,
“ 성준 을 능지하여 효수하고, 시체를 돌리라.”

하였다.


연산 54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6월 4일(계해) 4번째기사
박열·권균 등이 사직을 청하다

승지 박열(朴說) · 권균(權鈞) · 강징(姜澂) · 손주(孫澍) 가 아뢰기를,

“신 등도 혹은 ‘언로에 방해됨이 있다.’는 계를 범하고 혹은 ‘밤까지 사냥한다.’는 계를 범하였으니, 퇴대(退待)하라시는 명을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때에 앞장서서 주장한 자가 누구인가?”

하매, 박열(朴說) 이 아뢰기를,

“기미년4456) 에 성준(成俊) 이 김인후(金麟厚) 를 가리켜 간휼(奸譎)4457) 이라 하매, 그때의 재상(宰相)·대간(臺諫)이 함께 성준 의 불경(不敬)이 심함을 논박(論駁)하여 아뢰었는데, 이 때문에 대간이 다 갈리고 신(臣)과 정수강(丁壽崗) 이 장령(掌令)에 배직(拜職)되어 그날로 성준 이 불경하다는 뜻을 아뢰었으나, 먼저 발언한 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고, 권균 · 강징 이 아뢰기를,

“경신년4458) 사냥 때에 장순손(張順孫) · 박은(朴誾) 이 경연번(經筵番)으로 입직(入直)하여 논계(論啓)하고서, 신 등이 이튿날에 사진(仕進)하니, 순손 이 ‘요사이 밤까지 사냥함은 상체(上體)4459) 를 노고케 할 것 같으니 아뢰지 않을 수 없다더라.’ 하므로, 신 등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서 같은 말로 아뢰었습니다. 또한 언로(言路)에 방해됨이 있다는 말은 통 기억할 수 없어서 앞장서서 주장한 자를 모릅니다.”
하였다.



연산 63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7월 14일(신묘) 3번째기사
어전에서 성준과 힐난한 김인후를 국문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 김인후(金麟厚) 는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어전에서 성준(成俊) 과 서로 힐난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연산 63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8월 5일(임자) 2번째기사
경연에서 잘못 아뢴 강징 등을 형신하게 하다

정승에게 전교하기를,

“ 강징(姜澂) 이 경연(經筵)에서, 연굴사(演窟寺) 와 복세암(福世菴) 은 옮겨 배치할 수 없다고 아뢰었으니 형신(刑訊)하라. 이수공(李守恭) 은 뇌진(雷震)을 재변(災變)이라 하였으니, 비록 그 몸이 죽었지만 그 아비와 아들을 모두 가두어 형신하라. 김인후(金麟厚) 는 경연에서 성준(成俊) 과 서로 다투었는데, 준(俊) 이 인후(麟厚) 를 강포하다 지적하였으니, 그때 함께 들은 사람에게 물어 보아 아뢰라.”

하니, 정승들이 아뢰기를,

“ 인후(麟厚) 의 일을 상고해 보니, 어전이 아니라 빈청(賓廳)에서 단지 준(俊) 과 서로 다투었던 것으로, 그때 함께 들은 사람은 상고해 보아도 증거가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일 경연에서 《당고종기(唐高宗紀)》의 선제(先帝) 후궁(後宮)에 대한 일을 강할 때에, 박안성(朴安性) 이 아뢰기를 ‘이것은 옛날 제왕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는데, 신하가 임금 앞에서 군상(君上)의 잘못을 의논할 수 없는 것이니, 다시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왕이 성종(成宗) 의 숙의(淑儀) 남씨(南氏) 와 간음하고 추문이 밖에 퍼질듯 하므로 이런 전교를 내린 것이다.”
하였다.



연산 63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8월 20일(정묘) 6번째기사
어전에서 시비한 김인후와 강징을 처벌하게 하다

김인후(金麟厚) 와 강징(姜澂) 의 추안(推案)을 내리며 이르기를,

김인후(金麟厚) 와 성준(成俊) 이 서로 어전(御前)에서 시비를 하였는데, 성준 은 이미 죽음을 당했거늘 인후 만 홀로 현육(顯戮)을 면했으니, 다시 국문하여 아뢰라. 그리고 인후 의 공사(供辭)에 ‘그때 장순손(張順孫) 이 곁에 있다가 궁금(宮禁)의 일을 발설하였다.’ 하였는데, 큰 죄를 입지 아니하였으니 잡아다 제거할 것이다. 강징 이 아뢴 연굴사(演窟寺) 에 관한 일은 그때 위로 소혜 왕후(昭惠王后) 께서 계시므로 함부로 결단하지 못한 것인데, 강징 이 굳이 간하였으니 이는 자기 명예를 위한 것이다. 대체로 인군(人君)의 기상(氣象)이란 초년 중년 말년의 뜻이 차이가 있으니, 세종 께서 처음에는 불교를 배척하시다가 말년에 와서는 다시 숭상했었다. 이제 강징 이 내 마음의 처음과 끝을 알지도 못하고 굳이 계달(啓達)하였으니, 이런 뜻으로 다시 국문하라.”

하였다.



연산 63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8월 27일(갑술) 6번째기사
대간으로서 직책을 다하지 못한 김인후 등을 국문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 김인후(金麟厚) 는 직책이 대간(臺諫)이니 마땅히 성준(成俊) 을 힘써 배제하여 제거한 뒤에야 그만둘 일인데, 힘써 다루지 못하고 끝내 국가를 어지럽게 했으니 그를 다시 국문하고 장순손(張順孫) 도 아울러 잡아다가 또한 이로써 국문하라.”
하였다.





중종 3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5월 19일(신유) 3번째기사
유응룡·정광필·윤형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유응룡(柳應龍) 을 문원군(文原君) 으로, 정광필(鄭光弼) 을 이조 참판으로,【우승지로 특별 제수됨.】 윤형로(尹衡老) 를 한성부 우윤으로, 송천희(宋千禧) 를 황해도 관찰사로, 이세응(李世應) 을 병조 참지로, 황맹헌(黃孟獻) 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김인후(金麟厚) 를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이세인(李世仁) 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김준손 을 직제학으로, 김당(金塘) 을 사간원 사간으로 삼았다.



중종 14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9월 14일(신유) 1번째기사
대사간이 의성위 남치원·황형을 탄핵하고 동지사 남곤 등이 성희안을 탄핵하니 답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간이 이세인 ·지평 송호의 가 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 이 휴가를 가탁하여 함부로 역마를 탔으며 기정 역로로 다니지 않고 마구 다녔으니, 율에 의해 죄를 다스리소서. 황형(黃衡) 이 범한 죄는 중대하니, 온전히 풀어 줄 수 없습니다. 끝까지 국문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동지사(同知事) 남곤 이 아뢰기를,

“전일에 전경 문신(專經文臣)의 전강(殿講) 때에, 성희안 이 아뢰기를 ‘이즈음 아랫사람으로서 위를 능멸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는 무례한 행위이다.’고 하였는데, 신은 무엇 때문에 이 말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곧은 선비의 항언(抗言)을 가지고 ‘위를 능멸한다.’고 했다면 이는 대신의 뜻을 받들어 아첨하고 순종하게 함이니, 옛사람이 말한 ‘임금이 말을 내어 스스로 옳다고 하되, 경·대부가 감히 그 그름을 바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곧은 말 듣기를 싫어한다면, 국사가 그르쳐질 날을 손꼽아 알 수 있습니다. 폐조(廢朝) 때, 성준(成俊) 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김인후(金麟厚) 와 더불어 상 앞에서 힐난하다가 직계(直啓)하기를 ‘위로 능멸하는 풍조가 있다.’고 하여, 폐주(廢主)로 하여금 의심케 하고, 드디어 사림(士林)의 화를 빚었습니다. 이로부터 폐주 또한 대신이 임금을 능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성준(成俊)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항언과 직간(直諫)을 가지고 위를 능멸하는 것으로 삼는다면, 치도(治道)에 해로움이 있으니, 상께서는 짐작하여 들으소서.”

하고, 이세인(李世仁) 은 아뢰기를,

“ 성희안 이 이른바 ‘위를 능멸한다.’는 말은, 그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혹시 대간이 이극돈(李克墩) 의 일을 논한다고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폐조 때 성준 이 삼공(三公)으로 있으면서 자기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를 능멸한다.’는 말로써 아뢰어서 드디어 폐주로 하여금 대신이 임금을 능멸한다고 의심하게 하였으며, 제몸 또한 그 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성희안 이 직접 본 것인데도 감히 이런 말을 하니, 국사를 도모하는 대신의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 희안 이 이른바 ‘위를 능멸한다’는 것은 대간이 항언(抗言)하여 곧은 말로 간하고 대신의 잘못을 논하는 것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라, 필시 풍속(風俗)을 바루고자 한 말일 것이다.”

하였다.



중종 65권, 24년(1529 기축 / 명 가정(嘉靖) 8년) 5월 12일(병오) 6번째기사
헌부에서 고 참의 김인후의 아내 허씨의 상언에 대한 처리를 질책하다

간원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 전원이 아뢰기를,

“납곡(納穀)하고 댓가(代價)를 받은 일은 간원이 아뢴 말이 지당합니다. 신들이 이미 정지했다가 다시 아뢰는 것이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더 살피고 생각하여 성상의 덕에 누가 되지 않게 하소서. 신들이 당초에 이 일을 아뢰었을 적에 상께서 ‘다음에는 폐단이 없게 하겠다.’고 분부하시고, 즉각 판부(判付)를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비록 아뢴 일을 윤허받지는 못했지만 성상의 마음에 반드시 척연(惕然)한 생각이 발하시어 다음에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시리라 여겼었습니다.

근래 고(故) 참의(參議) 김인후(金麟厚) 의 아내 허씨(許氏) 가 덕산(德山) 의 간석지(干潟地)를 떼어 받겠다는 일로 상언(上言)하매, 성상께서는 해조(該曹)에게 가부를 물어 보지도 않고 즉각 법대로 떼어 줄 것을 명하셨고, 해조가 감사(監司)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방계(防啓)15405) 하면서 상언한 사람을 추문(推問)하기로 청했었지만 또한 추문하지 말고 분간(分揀)15406)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유독 허씨 의 일만이 아닌데 다시 전일의 실수를 답습하시니, 신들은 실망이 큽니다. 간석지를 이미 분간하도록 명하셨기에, 신들의 생각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납곡(納穀)에 관한 일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크니, 망설이지 마소서. 전일 해조가 아뢴 공사(公事)는 공사(公私) 모두가 편리한 일이니, 아뢴 대로 하소서.

옛날 송 태조(宋太祖) 15407) 가 ‘중문(中問)을 활짝 열어놓으니 바로 내 마음을 열어놓은 것 같다. 조금이라도 사곡(邪曲)한 짓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리라.’ 했습니다. 제왕(帝王)의 탕탕평평(蕩蕩平平)15408) 한 도리는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이니, 이 말을 특히 체념(體念)하소서. 정공필(鄭公弼) 의 죄도 전일에 이미 아뢰었으니, 속히 파직시키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 권적(權勣) 의 일 및 두 부인의 집 종과 부상(富商)들을 추문하여 죄를 다스리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김인후 의 아내 허씨 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대저 이 같은 일들은, 분간과 절급(折給)의 여부가 해조의 공사(公事)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당상인 조관(朝官)의 아내를 그 때문에 추문할 수 없기에, 추문하지 말고 분간하라고 판부(判付)한 것이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중종 90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4월 3일(경자) 7번째기사
장옥 등에게 《황화집》을 주어 제술관과 함께 차운하여 쓰일 것에 대비케 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들으니 천사가 시를 많이 짓는다고 합니다. 이미 제술관을 많이 차출하기는 했으나 전 사성(司成) 장옥(張玉) , 학관(學官) 심의(沈義) , 전 검열(檢閱) 남규년(南虬年) , 생원 신잠(申潛) , 진사 김인후(金麟厚) 는 혹은 한산(閑散)이기 때문에, 혹은 유생(儒生)이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문무루(文武樓)의 《황화집(皇華集)》 을 내주어 전에 차출한 제술관들과 함께 운(韻)에 따라 많이 차운하여 쓰일 것에 대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 94권, 36년(1541 신축 / 명 가정(嘉靖) 20년) 3월 20일(병오) 3번째기사
홍문록은 중대한 선임인데 이번에 19명이나 뽑으니 다시 선임할 것을 아뢰다


간원이 아뢰기를,

“홍문록(弘文錄)은 국가의 중대한 선임(選任)이므로, 반드시 사림(士林)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장차 학사(學士)의 직임에 임명하기 때문에 정밀하게 선택하려고 하며 많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가려 뽑은 사람이 19명에 이르렀는데,【 김진종(金振宗) · 이여(李畬) · 오겸(吳謙) · 김저(金䃴) · 윤희성(尹希聖) · 권물(權勿) · 이천계(李天啓) · 김개(金鎧) · 김인후(金麟厚) · 박세후(朴世煦) · 이현당(李賢讜) · 백인걸(白仁傑) · 이중열(李中悅) · 민기문(閔起文) · 허백기(許伯琦) · 유지선(柳智善) · 이사필(李士弼) · 이담(李湛) .】 전에는 이렇게 지나치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난잡하다는 비난이 없지 않으니 다시 고쳐서 뽑도록 하명(下命)하여 그 선임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 97권, 37년(1542 임인 / 명 가정(嘉靖) 21년) 3월 25일(을사) 1번째기사
올바른 정사를 보도록 검토관 윤희성·특진관 황헌이 건의하다

석강에 나아갔다. 검토관 윤희성(尹希聖) 이 아뢰기를,

“ 동평왕 창(東平王蒼) 20184) 은 ‘선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여 고금의 미담이 되었는데, 당시에 명제(明帝) 가 선을 좋아하여 이 말을 듣기를 즐거워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순(舜)임금 과 우(禹)임금 의 고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야 없지만 우임금 은 선한 말을 들으면 절을 했고, 순임금 은 남에게서 선을 취하여 자신이 그 선을 행했다고 하였으니, 선을 좋아하는 마음은 한 가지입니다. 예로부터 남의 임금이 된 이가 엄숙하고 공순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안일에 빠지지 않는다면 마침내 부와 영화를 누리고 종묘와 자손이 길이 보존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도를 따르면 길(吉)하다.’는 것입니다. 안일에 빠진 임금은 능히 선을 할 수 없으며 궁실과 음식, 사냥놀이와 뱃놀이에 빠져 극도로 즐기며 오만하고 나태해지면 마침내는 망하는 근심이 생기게 되니, 이것이 곧 ‘악을 따르면 흉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선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는 말은 확실한 말입니다. 선을 행하고 마음에 느끼면 마음이 지극히 즐거운 법이니, 공자 의 제자 중에 안회(顔回) 는 도시락 밥과 표주박 물을 먹고도, 남들이 견디지 못하는 근심인데 그 즐거움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선을 하는 즐거움입니다.

공자 가 말하기를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구부려 베개 삼아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은, 나물 먹고 물 마시는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선을 하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나라 성왕(成王) 이 말하기를, ‘덕을 행하면 마음이 편안하여 날마다 즐겁고 거짓을 행하면 마음이 고달파서 날마다 괴롭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속으로 반성해도 가책됨이 없고 마음이 태연하며, 위로 하늘을 쳐다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 사람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어서 일신이 안락한 것입니다.

《대학(大學)》 에 ‘마음이 너그러워 몸이 살찐다.[心廣體胖]’는 말은 ‘선은 미색을 좋아하듯 좋아하고 악은 악취를 싫어하듯 싫어하라. 스스로를 속이지 말 것이요, 반드시 홀로 있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말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대체로 선을 좋아하기를 진실로 마음으로 좋아하여 미색을 좋아하듯 한다면 끝내 그 즐거움을 잃지 않을 것이며 일신이 자족할 것입니다.”

하고, 특진관 황헌(黃憲) 이 아뢰기를,

“근래에 4∼5년 동안 조정에 죄를 입은 사람이 없어서 사람들은 모두 안정하여 시끄럽지 않으니 누군들 서로 경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곧 망하지, 곧 망하지 해야만 나라가 튼튼하다.20185) ’고 한 것은, 예로부터 어지럽고 위태한 환란은 어지럽고 위태로운 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스려지고 편안한 때 생긴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국가가 그런 대로 편안하지만 편안하다고 하여 기뻐하지 않고, 어지럽고 위태한 환란이 멀지 않아 닥친다고 생각하여 늘 근심한다면 나라가 오래도록 다스려지고 편안할 것입니다.

신은 근래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외방에 있은 탓으로 조정의 일을 잘 모르기는 합니다마는, 시골에서 복을 입는 동안 어찌 하루인들 나라를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요즈음 보건대, 인심이 어지럽고 각박하며 뜬 소문이 많이 떠돌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