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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9대서원 - 필암서원


 
작성일 : 12-09-14 16:28
동방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 약전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481  





동방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


1.동방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
김인후(金麟厚) 1510(중종 5)~1560(명종15)
조선의 문신. 유학자.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후에 정자(正字)·박사(博士)·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의 부양을 위해 옥과 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명종이 즉위하고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長城)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반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長城)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峰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제향(祭享), 시호는 문정(文正).
(하서 김인후 선생은 중종5년(1510년) 이곳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나 명종15년(1560년) 51세를 일기로 별세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유학자였다. 김인후는 8세에 조광조의 숙부(叔父)인 조원기가 전라감사로 있을 때 신동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뛰어난 자품을 타고났다. 10세에 전라감사로 부임한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경기도 이천으로 귀향을 가자 18세 때까지 독학으로 사서오경을 공부하였다. 그러나이 무렵 태극도설에 정통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와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기묘사화로 광주에 귀향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종26년(1531년) 22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 등과 교류하였는데 퇴계와는 매우 돈독한 친교를 맺었다. 후일 퇴계가 "함께 교유한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다. 중종35년(1540년) 31세 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되어 선망의대상이었던 호당(湖當)에 들어갔다. 호당에는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박형수, 정유길 등 희대의 명사들이 13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이때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하여 성리학 이론을 확립한 것이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긴것이다. 중종38년(1543년) 34세에는 홍문관박사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 되어 후에 인종(仁宗)이 되는 세자와깊은 사제(師弟)의 연을 맺게 된다.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도덕에 깊이 감복하여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주자대전 한 질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1543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여 기묘사림(己卯士林)들의 신원을호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향리로 내려갈 것을 청하였다. 12월 옥과현감을 제수받아 고향근처로 돌아왔다. 중종이 승하하고 제12대 인종이 즉위하자마자 불과 8개월만에 31세로 죽자 하서는 일체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인종의 기일이 되면 집 남쪽 산중에 들어가 종일토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평생을 한결같이 하였다. 하서는 순창 점암촌에 초당을 세우고 주자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48세 때에 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였으며, 일재 이항과 고봉 기대승 등과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놓고 논변을 하였다. 후에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때 고봉의 이론은 하서와의 논변을 통해 정립된 이론이라고 보고 있다.
하서의 학문은 성리의 정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하서는 또 시문에도 능해 당대의 유명한 면앙정 송순과 교유하였으며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1560년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종에 대한 절의의 표시로 임종 후에도 옥과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하서는 정조20년(1796년)에 문묘에 배향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겨진 곳으로 호남의 대표적 서원이다.)

2.道와 義로 일괄한 「士林의 큰별」[河西 金麟厚(김인후)]
河西 金麟厚 유교는 인간의 모든 이상을 인간 자신의 힘으로 현세 속에서 실현시키려는 인본적 현세간(現世間)주의다. 따라서 유교는 피안과 초월을 지향하는 종교들과 크게 다르다. 유교의 이상은 단순한 인간의 욕구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天)으로부터 품부받은 덕성을 잘 갈고 닦아 대인군자가 되어 천지만물과 함께 어우러져 도덕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므로 그 목표는 어느 종교보다도 높고 그 목표에 이르는 길 또한 어떤 언행보다도 무겁고 먼것이었다.
도불(道佛)은 현세간을 쉽게 부정하고 자기 세계나 경지로 홀가분하게 나아가는 길이 있지만 유교는 끝까지 현세간을 버리지 못하고 바로 그 현세간을 이상 세계로 교화해야 하므로 숙명적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게 마련이다. 유교의 정치사가 의외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격돌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조는 유교로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건국 과정부터 이상과 현실이 격돌하고 부모 형제가 의리와 인륜을 저버린 채 왕권을 놓고 상잔(相殘)하는 반유교적 작태를 드러냈다. 이는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되풀이되었으며 늘 이상과 원칙이 현실과 변칙 앞에 참담히 무너지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이렇게 이상과 현실이 갈등 격돌하는 정치현장에서 자기 소신을 펼치려다 희생된 인물로 정도전(鄭道傳)과 조광조(趙光祖)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성패에 대한 평가는 자못 대조적이다. 정도전은 분명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정치가다. 그는 한 나라를 설계 건설하여 이념에서 제도와 경영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각과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소신을 한껏 펼쳤다. 하지만 그는 5백년 동안 폄훼된 채 묻혀 지내야 했다. 반대로 조광조는 유교본위정치인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내세워 「군왕을 요순(堯舜)으로 만들고 백성을 당우삼대(唐虞三代)에 살게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비명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50년만에 복권되어 문묘에 배향되고 도학의 표상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현실과 변칙에 영합한 정치인은 성공해도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이상과 원칙을 고집한 정치가는 비록 실패했어도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실이 어지러울 때 지혜를 주고 앞날이 암담할 때 바른길로 인도하는 등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조광조를 그토록 추앙하던 사림은 지치주의를 계승하기보다는 그를 화근으로 보고 논변을 일삼아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세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이상 정치에 대한 신심(信心)을 잃고 좌절과 허탈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광조의 지치주의가 점점 빛을 잃어갈 때 한가닥 희망을 걸고 도학과 지치주의 노선을 내걸고 나선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다.

김인후가 당시 선비들이 화근시하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노선을 다시 밟은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그의 성정(性情)이 강개하고 학덕이 돈후한 데에도 기인하겠지만 그보다는 학맥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다. 그는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다.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김굉필은 바로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순의 조선 성리학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인물이므로 김인후는 도통의 직계이다. 그리고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조광조와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때문에 하서는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조광조를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희생자들의 신원(伸寃)을 주청한 것은 이러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가 세자 때 가르치고 인도하던 인종이 등극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신원되었으니 인종과 하서간의 묵계를 알만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종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김인후 학문과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다. 학문적으로 하서는 이기(理氣)를 포괄한 대심(大心)철학자다. 배타보다는 포괄, 분석보다는 회통을 중시했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차원에서 교감했다.
그의 학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심(心)은 일신만사(一身萬事)의 주재자다. 그러나 심만으로 주재가 되는 것은 아니고 심에 내재한 이(理)를 타야만 주재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심을 정위(正位)시켜야 하는데 이 공부가 구방심(救方心), 입대본(立大本)의 경(敬)이요, 밝혀진 대심(大心·至理)을 다시 밖으로 확충해나가는 과정과 추진력이 수도요 지성(至誠)이다. 이 지성으로 진기성(盡己性)―인성(人性)―물성(物性)해서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와 상삼(相參)함으로써 우주생명의 대역사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는 부모요 인간은 형제며 만물은 동포다. 어찌 이물(異物)로 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순수감정으로 교류하고 사랑할 뿐이다. 천지를 슬퍼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정반(正反) 시비(是非) 득실(得失) 호오(好惡)가 가려질 것이니 여기서 정치가 시작된다」.
하서가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도학자임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과정을 중시하는 김안국의 온건한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조광조의 과격과 급진 그리고 고집과 배타 등의 약점을 보완하기에 넉넉하다.
유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영의 중심무대인 정치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고 특히 군왕과 의합(意合)해야 한다.

김인후는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춘 행운아였다. 성균관에서 퇴계(退溪)를 비롯한 많은 현능(賢能)들을 만났고 특히 스승의 배려로 세자 보덕(輔德·세자를 가르치던 벼슬)이 되어 다음 정권을 잡을 세자와 군신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서로 경애하고 의기 투합했다. 이는 김인후가 장차 정치이상을 펼치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요, 절대적인 보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만복(滿腹)의 열정과 경륜, 신심과 희망은 인종이 1년도 못되어 승하함으로써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무엇으로 감당하랴. 그후 그는 일찍이 모실 이를 잃어버린 청상(靑孀)으로 자처하며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의(道義)와 문장(文章)에다 절의(節義)가 더해진다. 그는 시와 술로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다 병들어 50세를 일기로 통한의 생을 마쳤다. 다음은 그가 인종을 애원(哀怨)한 나머지 단장의 피를 토하면서 쓴 사모곡이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에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질 않네
세상사 흐르는 물 잊혀지련만
젊은 시절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
눈 어둡고 머리 희고 이가 빠졌소
슬픔 속의 봄 가을 몇번이던가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있다오
백주는 옛대로 물가에 있고
고사리는 해마다 돋아납니다
오히려 부럽구려 주나라 왕비
생이별이야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현실의 좌절 詩로 승화
「남쪽에는 하서」. 16세기 도학의 거봉 하서 김인후를 일컫는 말이다.
나이 다섯살때, 누군가 「하늘 천(天)」을 주제로 글을 지어보라 했다. 주저없이 곧 읊기를 「형체는 둥글어라/하
크고 또 가물가물/넓고 넓고 비어 비어/지구 가를 둘렀도다/덮어주는 그 중간에/만물이 다 들었는데/이 땅 사람이 어찌하여/무너질까 걱정했지」.
이처럼 하서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남긴 작품만 무려 1천6백여편.
그러나 그의 시성(詩性)은 그저 개인적 천품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호남 강호가도(江湖歌道) 시단의 독특한 미적 정서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분을 함께 표출했기에 하서가 본격적으로 시에 몰두한 것은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속세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칩거하면서부터.인종 승하 이후 매년 인종의 기일이 돌아오면 고향집 뒷산에 올라 술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돌아와 시를 지었다.
「그대 나이 삼십이 되어가는데
내 나이는 서른이라 여섯이로세
새 즐거움 반도 다 못 누렸는데
한번 이별 활 시위에 화살 같아라
내 마음은 돌이라서 굴러갈건가
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
한창때 해로할 이 잃어버리고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 희었네」
인종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한 「생각한 바 있어(유소사·有所思)」의 한 대목.
인종이 떠나간 세상, 뒤틀린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 하서는 취흥으로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시종 격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현실의 좌절감을 흥취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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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 운암동 광주어린이대공원 중심부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 厚·1510∼1560)선생의 동상이 있다.
전남 장성 맥동에서 태어난 하서선생은 조선 중기 을유사화 등 4대 사 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학자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성리학의 한 줄기를 이룬 큰 스승. 선생을 가리켜 정조(正祖)는 “도학과 절의 문장 어느 하나라도 갖추지 않음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며 ‘문정’(文正)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좌우에 둔 높이 2.5m의 좌상은 유작을 새긴 6폭 석조병풍과 그 뒤에 늘어선 10여그루의 소나무와 어우러져 한눈에 선생의 높은 학식과 덕망을 느끼게 해 준다.
석조병풍에는 세자시절 인종(仁宗)의 스승으로 인종이 그린 그림에 시 를 지어 넣은 ‘묵죽도’와 도학사상을 집약도해한 ‘천명도’, 한시 ‘ 자연가’를 비롯한 작품 9점이 새겨져 있다.
이 동상건립사업은 91년 울산 김씨대종회와 하서기념회가 주축이 돼 동 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94년 작고)동아일보 사 명예회장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화했다.
광주시는 1백43평의 건립부지를 제공했으며 건립기금모금은 울산 김씨 종친회, 제작은 조각가 김영중(金泳仲)씨가 맡아 92년 10월30일 제막했다 . 제막식에서 일민선생은 “조선조 문민정치와 도덕적 규범이 선생을 필두로 한 시대의 명현들에 의해 이룩됐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東邦의 大儒學者 河西 金麟厚 略傳1부

-22世. 號:河西. 諱:인후(麟厚). 시호:문정(文正)
*1510년(조선 중종5년)에 출생.1560(명종15년)년에 더 없는 영광과 더 없는 의분과 더없는 생각으로 가득한 인생을 51세로 서거 하셨다.
字는 厚之,號는 河西,시호는 文正,慕齋 金安國을 마음에 두고 따른 성리학자이다.

이씨 왕조 전기의 후반(중종.인종.명종시대)에,호남에서는 하서 김인후.소재 노수신.고봉 기대승선생 들 세 분의 이름난 유학자가 계셨다.그런데 이 세 분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 곧 하서선생이시다
우리나라의 많은 인물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이 겸하여 탁월한 이는 그다지 찿아볼수가 없다.
이 세 가지중 어느 한 가지나,기껏해서 두가지 면에 우수한 재분과 빛나는 성과를 나타낸 분은 간혹 있었지만, 세면에 걸쳐서 모두 심오한 조예를 가지고 고매한 학론을 전개 시킨 분은 오직 하서 선생을 추숭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 당대의 정평 이었다.이 사실을 조금 후배인 우암 송시열 선생도 극구 논증한 기록이 있다.

*5세에 千子文(주홍사;중국 양나라 사람으로 무제때 천자문을 지었음)을 通達하시어 詩를 짓고 8세에 전라관찰사 (조원기:중종때의 相臣으로 趙 光祖의 삼촌) 와 시 문답을 하시는등 神童의 명성을 얻으셨습니다.

*10세에(중종14년) 慕齋 金安國 선생을 찾아가 小學을 배우시다
일찍이 모재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시 선생의 명성을 듣고 몸소 찿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긴 일이 있다. 그래서 선생이 모재를 찿아뵙고 주자의 소학 배우기를 간청하여 강론 토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모재가 거듭거듭 칭찬하여 마지 않으며 "이는 나의 어린 벗이니 참으로 三代(옛날 중국의 夏나라,殷나라,周나라)에나 있을 어진인물이다"라고 감탄 하셨다.
그런데,이해 12월에 서울 에서는 남곤, 심정, 홍 경주 등이 趙光祖, 金淨, 金湜들 젊은 선비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낸 끔찍한 己卯 士禍가 일어 났다.

*14세에(1523년 癸未) 군수 尹任衡의 따님이신 여흥尹氏에게 장가 드시고 그 다음 해에 아드님 從龍을 낳으시다.

*18세(1527년 정해)때 신재 최공을 찿아가 학문을 강론하시다.
崔公의 이름은 山斗(중종때의 文官 號는 新齋 草界崔氏의 始祖)이니 己卯士禍로 東福에서 귀양살이(1533년에 풀림)를 하고 있었는데,학문이 깊기로 이름나 있었다.
그때 선생은 스무살도 않 되었는데 사서 오경과 수많은 학자들이 쓴 역사책을 익히어 깊이 꿰뚤지 않는 것이 없어, 그 가장 중요한 줄거리와 뜻을 깨달아, 정호(程顥). 정이(程이)(北宋의 學者 兄弟). 주희(朱熹:성리학을 대성한 南宋의 大 儒學者.號는 회암, 시호는 文公, 朱子라 불림)가 주장한 性理學(理,氣,心,情,慾의 상호 관계을 연구하는 학문)을 굳게 지켜 어긋남 이 없으며, 천문지리와 모든 기예에 이르기 까지,모든 학설에 정통하셔서 막힌데라곤 조금도 없으시면서도, 그래도 부족하다고 여기시고 더욱 힘써 스승을 삼을 만한 벗을 찿던중 崔山斗의 명성을 듣고 찿아가 학문을 연구하니,崔公이 매우 탄복하여 매양"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 같다"고 선생의 분명한 태도와 맑고 깨끗한 마음을 칭찬 하였다.

*19세(1528년 무자)때 성균관에 가시다.
이 해에 선생이 서울에 가시니 그때 용재 李 荇(중종때의 宰相 號:容齋)이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었고, 칠석날 수험생들이 성균관에 모여 시험을 쳤는데, 선생이 일등으로 합격하여 그 글장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니, 대제학인 용재가 선생의 그 글장이 혹시 남이 지어준 것이나 아닌가하고 퍽 의심하여, 거처를 성균관 근처에 제한해 놓고 , 일곱가지 제목으로 시험해보니, 선생이 그자리에서 답안을 척척써서 시험관에게 올리되, 글이 잘짜여 모자람이 하나도 없어서, 용재가 놀라 기이하게 여겼다. 그중 염부와 영허부라는 두 글장은 하서 본집에 함께 실려 있다.

*22세(1531년 신묘)進士試驗에 합격 성균관에 출입하며서 退溪 李滉 先生(조선 중기의 유학자. 호는 퇴계. 주자의 학설을 주로한 理氣 二元論을 주장함)과 학문을 연구 하시다.
성균관의 進士(소과 첫 시험에 합격한 사람)를 뽑는 시험에 합격 하시었다. 그 다음 해인 1532년(임진) 에는 할아버지 訓導(전의감, 관상감, 사역원 및 500호 이상의 큰 고을의 교육을 맡은 종 9품 벼슬)공이 돌아가셨다.
司馬試(生員과 進士과의 자격시험)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退溪와 친하게 사귀며 학문을 강론하고 이후 퇴계의 推重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는 기묘 사화를 겪고 난 14년 뒤라,선비들의 기가 죽어서 도학에 관해서는 모두들 쉬쉬하고, 옳은 말을 하지 못할 때인데, 선생이 퇴계를 만나서 둘이 서로 마음이 꽉 들어 맞아 학문을 강구하여 그칠 줄을 모르고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하기 한이 없다가 ,얼마 아니되어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니 선생이 시를 지어 주어 주며 떠나 보냈는데, 그 시에" 공자(퇴계를 가르킴)는 영남의 수재로 李白(당나라 때의 시인.字는 太白.號는 靑蓮), 두보의 문장과 왕희지, 조 맹부(元나라 초기의 시문, 서화가. 자:子昻)의 필치를 지녔도다"라는 뜻의 귀절이 있었다.

*26세(1535년 을미) 잠시 고향에 4월에 의정부에 불이나서 다 타버린일이 있었던 해인데, 선생은 잠시 쉴 겸 고향으로 내려 오셨다가,다음해(27세때) 여름에 다시 성균관에 가셔서 공부를 하시던 중, 신재 최 산 두공이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이 최공과 정의가 두터워 그의 소렴(小殮:시체를 옷과 이불로 쌈) 때 ,상복을 입고 수질(首질:상복을 입을때 머리에 두르는 테두리. 짚에 삼껍질을 감은것)을 둘렀으며, 그제 삿날에는 반듯이 제관이 되어 사흘동안 재계(齋戒:몸과 마음을 깨끗이하고 부정한일을 멀리하는 일)하셨다.

*31세(1540년 경자) 별시 문과에 합격
4년전 28살때에 아드님 從虎를 낳으시고 다음해 초여름 4월에 글을 지어 작고한 최 신재공의 제사를 지내셨는데 그제문은 문집에 실려있다.
경자년 겨울 시월에 베풀어진 임시 과거 문과에 합격하여,벼슬차례에 따라 承文院(외교문서를 맡은 관청) 副正字(正字의 다음 벼슬.종 9품)가 되셨다.

*32세(1541년 신축) 사가독서 4월 초여름에 임금이 휴가를 주어독서당에서 문학을 닦게 하셨다.
호당 수계록:선생이 독서당 즉 호당에서 함께 뽑힌 동료 열 두사람과 계를 짜셨는데,그때의 호당 수계록(湖堂修계錄)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간재 (艮齋) 최 연(崔演) 퇴계(退溪) 이황(李滉)
십성당(十省堂) 엄 흔(嚴昕)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추파(秋波) 송기수(宋麒壽) 우암(寓菴) 김수(金樹)
송재(宋齋) 나세찬(羅世纘) 상덕재(尙德齋) 정 유길(鄭惟吉)
국간(菊磵) 윤 현(尹鉉) 급고재(汲古齋) 이홍남(李洪男)
죽계(竹溪) 임 설(任說)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초겨울 10월에 홍문관 정자(正字:정 9품 벼슬)가 되셨는데 다음해 임인년에는 초가을 7월에 홍문관 저작(著作:정8품벼슬)으로 승진하셨다.

*34세(1543년 계묘)봄에 모재 김안국 선생이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들으시다.
선생이 모재 선생과 맺은 정의가 매우 두터워서 상제가 되어 수질을 두르고,제삿날에는 제주가 되어사흘동안 마음과 몸을 깨끗이하고 ,부정한일을 멀리 하였으며,그의 죽음을 슬퍼하는글(挽詞)가 있으니 문집에 실려 있다.
초여름 4월에 홍문관 博士(박사:교학을 맡아보는 벼슬.지금의교수.정7품벼슬)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조선시대 왕세자에게 경사를 강론하고,옳은 도리로서 잘못을 고치도록 타이르는일을 맡은 관청) 설서(說書:정7품벼슬)를 맡으시고 왕세자가 손수 손수 먹으로 그려서 보내주신 대나무 그림을 받으시다. 그때, 세자("인종대왕"이 될분)가 왕세자로서의 덕을 쌓고 계시니,중종대왕께서 그 세자를 도와서 인도하는 임무를 오로지 선생에게만 맡기셨고,세자도 선생의 학문과 도덕이 넓고 옳음을 잘 아셔서 성심껏 공경하고 예로서 대하여,불러 마주앉아 의논할때마다 정중하고 정성스러우셨다. 선생도, 세자가 임금이 되기 전에 닦으시는 덕이 천고에 뛰어나서, 후일에 임금이 되어 요,순처럼 선정을 베풀기를 바랄수 있도록 지성으로 길을 열어 드리니 신임이 날로 두터워, 선생의 거처까지 세자가 오셔서, 조용한 가운데 장시간 어려운 문제를 묻기도 하셨다.
세자가 본디 제주가 뛰어 나시되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면서도 오직 선생에게만 손수 먹으로 대나무 그림 한 폭을 그려 주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선생에게"그 화촉에 맞춰 시를 지으라" 하시니
선생이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뿌리 가지 마디 잎이 정밀도 하여 根枝節葉盡精微
단단히 맺어진 마음 그 안에 있네 石友精神在範圍
성신의 조화 같음 비로소 알아 始覺성神우造化
한 무리 하늘과 땅 어길 수 없네. 一團天地不能違
유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종6품 벼슬)으로 승진하시고,나라일에 관하여 임금께 글을 올리면서 기묘사화로 희생당한 여러 선비들의 억울함을 극렬하게 논란하시다. 그때 세자궁에 불이 나서 선생이 임금께 글을 올리게되어 , 분개한 마음으로"수양하고 반성하는 길"을 진술했는데,대략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임금은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며,선비의 풍습을 바룸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옵니다.
어진 인재을 가까이 하며, 임금을 도와 백성을 감화시킬수 있을 것이오, 선비의 풍습을 바루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도리가 밝혀져, 풍속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 이옵니다.
지난 번의 기묘사화 같은 것은, 전국 선비 사회에서 그 무고한 죄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면서도 ,그들이 지금까지 본심을 털어 놓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죄가 아님을 밝히고 ,위로는 전하께옵서 의심 하옵시는 모든 생각을 푸옵시고, 아래로는 억울한 여러 신하들이 저승에서나마 원한을 씻게 하옵심이 가한 줄로 아옵니다.
어떤 사람이 바른 말을 하여 바로 잡으려 하오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배척하오니, 선비들의 풍습이 바루어지지 아니하옴이 이 때문이옵나이다. 바라옵건데,전하께 옵서는 현명하옵신 단안을 내려 허심 탄회하게 정사 숙고 하여 반성 하옵시고, 사실을 두루 살피사 정확하게 알아 보옵시되, 학문을 닦는 데에
있어서 미진한한 곳은 낱낱이 찿아 밝혀 정성껏 도리를 살피옵나니, 재앙의 근원을 깊이 헤아리사 스스로 통절히 힐책하옵실 것이며, 날로 두려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근본부터 맑히옵시고, 겉과 속이 충실하여 추호의 사심도 없도록 하옵셔,모두가 옳고 그름의 뒤석임을 두렵게 알도록 하사,시비를 잘 가려서 볼품 없이된 선비의 풍습을 일으키옵시고 ,해이해진 사회기강을 진작 하옵셔,임금의 교화가 시들어 가고,사회 풍습이 문란해지는 따위의 근심이 없도록 하옵소서."
그 때는 기묘사화가 있은지 24년이 지났건만는, 전국 선비들이 아직도 말하기조차 꺼리고싫어하며, 두려워서 잔뜩 위축되어 감히 그 때 일 을 입 밖에 내고자 하지 아니한 때인데도 불구하고,선생이 홀로 분개하여 이 상소와 같이 의견을 털어 놓으시니,그 말이 아주 바르고 마땅한지라, 중종이 비록 즉석에서 허락 하지는 않았으나, 그로부터 여러 신하의 원한을 깊이 깨달아 자주 뉘우치는 빛을 보였다고 한다.
*34세(1543년 계묘)에 한가을 8월에 휴가를 얻어 어버이 뵙는다고 귀향하시다.
선생이 어려서 부터 세상을 다스려 보려는 마음이있어 첫 벼슬할 때에 김안로(金安老:조선 중종때의 權臣으로 영의정 까지 지냄)를 멀리 하셨고 김 문경(文敬:김안국의시호)과 이 문원(文元:李彦迪의시호: 조선 중종때의 賢臣으로 성리학자이며 인종때는 우정부 우찬성을 지냄)같은 당세의 문장가요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분들에게 조금씩 따라 붇는 사람들이 있어 ,어지러운 세상이 바로잡아지려는 낌세가 보이기도 하므로, 세태가 흡사 왕일초(汪一初명나라 시인 호:陽復)가 조금씩 세력을 펴 나아가듯 하는것 같은점이 있기는 했으나 임금의 친척들이 서로 마음이 안맞아 티격태격 하는지라 세상일이 마음이 않 놓이고 근심이 되어,선생이 항상 홀로 깊이 생각하셔 세상 실정을 밣히 꿰뚤어 보시고 ,마침내 어버이의 나이가 많으셔서 고향으로 돌아가 돌보아 드려야겠다고 간절히 빌어 고
향으로 떠나시게 되었는데,이때 퇴계 이 황선생이 시를 지어 보내왔다.
겨울 섣달에 옥과 현감으로 임명되고, 그 직함은 그대로 가지고,현감만 가지고는 격이 낮으니까 격을 높이기 위하여 춘추(春秋:당세의 정치에 관한 기록을 맡는 벼슬)라는 벼슬 이름 까지 붙이게 되셨다.

*36세(1545년 을사)
지난해 동짓달에 중종 대왕이 승하 하셨기 때문에,이해 초 여름 4월에 인종께서 제술관(製술官: 숭문원의 벼슬. 왕실의 의식에 관한 글을 지어 바치는 임시벼슬)으로 부르셔서 가셨다가, 근무처인 지방 관청(옥과현청)으로 돌아 오시다. 중국 사신 張 承憲이 와서중종 대왕의 초상을 조문하니, 정부에서 선생으로 제술관을 삼고자 임금께 아뢰어 ,그 결정에 따라 마침내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제술관으로 나아가 큰일을 치르신 것이다.
이때 인종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시니, 조정과 민간에서 나라가 태평할 것을 기대하여, 모두 선생이 서울에 머물러서 임금께 경서를 강론하고, 보살펴 드렸으면 하고 바랐으나, 선생은 벌써부터 세상 돌아가는 기미를 알아 차려서,아무 생각이 없어 머무르고자 하지 않으실새, 마침내 인종 대왕께서 때로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시고 편하게 지낼수가 없으셔서,선생이 한자리에 나아가 약쓰실 것을 의논하려 하면내시원(內侍院:조선시대 내시들이 근무 하는곳) 사람들이 "맡은 직책이 아니라"고 가로 막곤 하므로, 그만 어버이가 병이 위중 하다는 핑계로 굳이 청하여 임지로 돌아 오신것이다.
초가을 7월에 인종 대왕께서 승하 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몸이 성하지 않다고 벼슬을 그만 두시고 집으로 돌아와 들어 앉으시다.선생이 인종 승하 소식을 들으시고,몹시 슬퍼서 가슴을 치고 울부 짖으시며, 살고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이 가슴 아파 못견디시며, 숨이 끊어졌다 겨우되 살아났다 하셔,마침내 병들어 근무를 할수 없다고 집으로 돌아 오셔서, 세상일을 다 물리쳐 버리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기로 굳게 다짐 하셨다.
이무렵에 지은 듯한 백구가가 하서 전집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갈꽃 핀곳에 저녁 놀 비껴 띠고 蘆花發處落霞橫帶
삼삼 오오 섞여 노는 저 백구야 三三五五雜遊之彼白鷗
우리도 강호 구맹을 찿아 볼까 하노라. 我輩江湖舊盟將굴
*江湖舊盟:자연속의 옛날 약속

*37세(1546년 병오) 明宗 첫해
늦여름 유월에 효경간오(孝經刊誤:효도에 관한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을 주 희가 개편한책)의 발문(跋文:책 끝에 본문의 대강을 간단하게 적은 글)을 지으시다.
선생이 옥과 현감으로 계실 때,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조선시대 중기의 문관)이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 가며서, 옥과를 지나가는 길에 문공 주희의 "효경 간오"라는 책을 가지고 가다가 보여 주므로,선생이 매우 기뻐 하시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끝에다가 발문을 써서 그 뜻을 자세히 밝혀찿아오는 제자들에게 일러 주셨다. 그 발문은 문집에 실려 있다.
선생이집에 돌아오신 때 부터, 오로지 학문을 강론 하시는 데에만 힘쓰시니, 학도가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지라, 그들을 다정 스럽게 타일러 가르치시되, 반듯이 먼저 "소학"을 읽고 난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시어, 한결 같이 문공 주희의 학문을 본밭게 하시며,두아드님을 가르치시는데에도 ,역시 "소학"을 십년토록 이나 익히고 다른책은 거들떠 보지도 못하게 하셨다.
인종이 그리워 시를 짓다.
을사년에 인종께서 승하하신 이후,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때가 되면,책도 덮어 두시고 사람도 만나지 아니하시고, 근심에 가득차서 즐거워 하지 않으시고 문밖 출입도 하지 않으시다가, 7월 초하루 효릉(인종)(孝陵: 서삼릉의 하나 조선 12대 인종 대왕과 인성왕후의 능)젯날에는 제수를 장만하여 가지고 마을 남쪽산에 등러가, 마시며 울며 하루종일 목을 놓아 통곡하시다가 저녁에야 돌아 오시기를 평생 한결 같이 하셔,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으셨다. 또, 느낀 바를 시로 지어 나타 내셨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 님 서른 한 살 *참고
내 나이 서른 여섯, 1545년 을사년에 인종31살,선생36살 때,인종이 즉위한지 8개월만에 기껍다 말았어라 승하하고 뒤를 이어 명종이 등극하자,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이 문정활 떠난 화살일레, 왕후를 업고 인종의 외숙 윤임 일파를 몰아낸 사화가 있었는데,
내 마음 변할손가 인종은 중종의 둘째부인 장경왕후의 아들이며,명종은 중종의 셋째
세상 일 동류수라 부인 문정 왕후의 아들로서,인종이 배다른 형이다.
한창 때 헤어져서
눈 어둬 머리 희끗,
미련한 몇 봄가을
아직도 죽지 못해,
잣배는 물 가운데
남산엔 고비 없어,
부럽다 태임.태사
괴로운 도꼬마리.
_____ 벼슬 사양___________

*38세(1547년 정미)
봄에 성균관의 전적(典籍:성균관 도서를 맡은벼슬 정6품)에 임명 되었으나취임하지 않으셨고 가을에 공조정랑(工曺正郞:상공부 정5품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으셨다.
그무렵에 시를지어서 제자들에게 보이시다.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하늘 아래 두 사람 공자와 주자일레
마음을 가다듬어 옆길일랑 엿지 마라
이토록 이즈러진 몸 어루만져 주누나
선생이 글에 뜻을 두신 이후로, 성인들이 도덕의 표준을 세웠다가 시들해져, 공자가 없으면 성인들의 도를 전하지 못하고, 공자 가신 후에 賢人들이 그 뒤를 이었으나 흐지브지 되어,주자가 없은즉 공자의 도가 어두우니,공자와 주자가 두분이서 이루어 놓으신 훌륭한 공적이 온 세상에 높이 빛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현들이 이를 숭상하지 아니하메, 그 것을 말끗 마다 글귀마다에 나타내시어 후배들을 이끄시니,선생의 그 대강의 뜻을 이 시에서 엿 볼수 있으며, 시를 지어 제자 李至男에게 보내신 것이다.
이해에, 문관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들이, 과거에 윤씨 일파의 비위를 거스른 일로, 정미사화 (정미사화=벽서의 옥)에 관련되어 억울하게 죽자,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으셨다.
엊그제 벤 나무 백척 장송 아니런가
적은덧 두엇던들 동량재 되리러니
이 뒤에 명당 기 울면 어느 나무 받치리.

*39세때(1548년 무진)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둔전리 점암 마을에서 사시다(지금은 여기에 유허비와 훈몽재(訓蒙齋:하서 선생이 제자를 기른 서당. 여기서 정철, 조희문,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들이 났다) 터가 있음)
초당을 지어 어린 아이들과 초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시고, 날마다 여러 선비들과학문을 강론하고 쉬시면서, 모든 것 훨훨 떨어 버리고,띠끌 세상을 벗어나시려는 생각 뿐이셨다.
시월에 퇴계 이 황이 풍기 군수가 되었다.

*.40세때(1549년 기유)
봄 2월에 "대학 강의"발문을 지으시다.
선생이 주자 대전중에서 대학의 뜻 풀이를 보시고, 그말의 뜻이 명백하고 조리가 환하게 밝으니, 임금 앞에 나아가 강론하여도 임금이 감동하여 분발할 만 하다고 생각 하시고,그것을 유별나게 드러내어 대학강의 끝에 발문을 붙이 셨다. 그 발문은 문집에 실려 있다.
여름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가을에 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으셨다.
초겨울 시월에 아버님 참봉공이 돌아가시다.
선생이 아버님 돌아 가심이 너무 슬프셔 몸이 야윌데로 야위시고,고달프셔서 몸을 가누기가 힘드실 지경이었으나, 모든 장례 절차를 빠짐 없이 몸소 돌보셔 섣달에 집의 서쪽 원당동에 장사 지내셨다.
그리고서,3년동안 돌아가신 아버님 참봉공의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거처하시는데,그방에"湛齎(담재)" 라고 쓴 자그마한 액자를 걸어 놓으시고 선생의 아호를 삼으시니,언재부터 그 雅號를 쓰셨는지 모두들 잘 몰랐다.

*.42살때(1551년 신해)
어머님 조씨부인이 돌아가시다.
슬프신 가운데,모든 예절과 의식을 다하고 있는 아버님 거상중에 어머님 마져 돌아가시니,9월에 아버님 참봉공 무덤의 왼쪽에 나란히 장사 자내 셨다.

*.44살때(1553년 계축)
7월에 대왕대비(문정왕후)가 수렴 청정을 거두고,명종이 정치를 넘겨 받고나서,선생이 늦가을 9월에 홍문관 校理(홍문관의 정 5품벼슬)에 임명되시어, 부임하러 서울로 가시다가, 도중에 병이 났다고 임금께 글을 올리고 되돌아오셨다.
임금(명종)께서 그 글을 받아 보시고,"편지 내용은 지극히 간절 하나, 그러나 병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도 또한 소중한 것이니, 몸조섭 잘하고 이치를 잘 분별하여 올라오라"고 하교 하셨다.
선생이 또 병이 위중하여 견디기 어려운 실정을 간절하게 아뢰고, 끝내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으셨다.임금께 올린 글은 문집에 실려 있다.

*.45살때(1554년 갑인)
늣가을 구월에 성균관 직강(直講: 성균관 4명중 정5품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셨다.
임금께서 선생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잊히지 않아,"병이 있다하고 오지 아니하니,내 빈 마음 한없이 서운하도다."하셨다.
초겨울 시월에 먹을거리를 보내 주신다는 지시를 받고글을 올려 사양 하시다.그때, 임금께서 본도 (전라도)지사에게 특명을 내리어 먹을거리(지금의 연금 같은것)을 보내라고 한것을,선생이 글을 올려 사양하셨는데,"마음을 편안히 하고,몸 조심 잘하여,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나의 뜻을 받들라."하시는 임금의 분부를 받으셨다. 임금께 올린글은 문집에 실려 있다.
임금은 그렇더라도,선생은 아무 뜻이 없어 모든것을 버리고 체념하여,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선생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자연가는 다음과 같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저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난 몸이라 늙기도 절로절로
靑山 自然自然 綠水 自然自然
山自然 水自然 山水間 我亦自然
사이哉 自然生來 人生將 自然自然老
-----------오로지 학문만-------

47살때(1556년 병진)
화담 *서경덕의 "주역을 읽고"에 붙여 시를 지으시다.<周易:중국 상고시대 복희씨가 그린 괘에대하여 周나라 文王이 통털어 설명하고,그의 아들 周公(주공:무왕의 동생)이 그 六爻앞서 에 대하여 자세히 풀이하고,공자가 여기에심오한 원리를 붙인것)>
앞서 서화담이 심학(心學:마음의 본체를 확인하여 몸을 닦는학문.陸象山,王 陽明이제창한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여 으뜸을 이루엇는데, 주역을 읽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팔괘라 그 속에는 만물 근본 지녀 있어
세상에 작용하여 온갖 이치 전하도다.
복희씨 지은 팔괘 참된 형상 본 을 뜨고
주나라 역경에서 하늘 이치 풀었도다.
만물을 추구하여 모든 조화 알게 되고
우주의 근원 찿아 오묘한 것 깨치도다.
글에서 말 다 못 함 말 밖에 뜻 있기 때문
공자님 아니라도 가죽 책끈 끊기도다.
_위편삼절(韋編三絶):공자가 주역을 애독하여 가죽으로 맨 책끈이세번이나 끊어 졌다하여 "위편삼절" 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이 시를 선생이 보시고,"성인의 말씀은 곧 하늘과 땅의 도리이니,보탤것이 없다"고 하시고서,그시의 운을 따서다음 과 같은 시를 지으시다.

우주의 온갖 것이 *무극으로 근본 삼아
큰 덕화 고루고루 *품물 함께 정하도다.
복희씨 지응 팔괘 차차 변해 밝아지고
주역은 사람 하는증험하여 밝히 도다.
글 공부 다 하면 묘한 이치 알게 되고
깊 도록 겪고 나면 다시 하늘 깨닫도다.
본뜨고 풀이한 말 품으신 뜻 다하여서
일찍이 성인들의 끊긴 책끈 생각도다.
그리고,또 시 한 수
사람들 하는 공부 앞뒤 차례 있을지니
*증자의 가르침을 뉘라 먼저 전할 건가
참으로 안다는 건 실지 행동 그 아니랴
배우기 시작하면 하늘까지 닿아야지
성인들 하신 말씀 밝고 밝지 아니한가
마음껏 배운 이들 깊은 경지 깨달았네
본원을 찿는 길은 깊이는 데 있다던데
싫다면 책읽기를 그만둠과 같지 않나.
*면학 기풍 고취
서화담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차근 차근 공부하기를 우습게 여겨,외기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쉽게만 깨달으
려 하므로, 선생이 염려 하시고 앞 시의 운에 맞춰서 시를 지어 그 풍토를 바로 잡으려한 것이다.
----*徐敬德:조선시대 초기의 성리학자.도학자.號:花潭
----*無極:우주에 앞서 존재한 원시의 근본을 이루는것.
----*品物:형체를 갖춘 온갖 물건
----*曾子:노나라 사상가.공자의 제자.효도를 역설 하였다.

*48세때(1557년 정사)
"주역 관상편"과 "서명 사천도"를 지으시다.
선생이 *태극도설과*서명 들의 글을 오랜 세월에 완전히 풀어 익히시되,읽기를 천 번이나 하기에 이르셔서, 그림을 그리고 글로 써서 배우는 이들에게 보이 시기를 "*주 돈이의 태극 도설은 도리가 아주 자세하여 글이 간결 하면서 뜻이 풍부하고, *장 재의 글은 규모가 넓고 틔었으면서 뜨지도 빠지지도 않으니,만일에 천품이 학문에 밝으면 먼저 태극 공부에 힘쓰고, 그렇지 않으면 서명의 이치를 깨달아 알아 내어 태극에이르도록 하라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오,서명은 학문의 근본이니,요컨데 어디 까지나 치우치거나 버리거나 할 수 없느니라.
---*太極圖說:송나라 周 敦이가 지은 性理學冊. 태극에서부터 음양 오행의 원리,곧 우주및 인류 만물의 나고 자라는 원리와 발전과정을 그림 풀이로 설명 하였음.
---*西銘:宋 나라 張載가 지은,어진 도리의 원리를 밝힌 글귀.서재의 서쪽창에 걸어 두었 음
---*周 敦이:北宋의 학자.(宋學_중국 宋나라때의 유학.사람과 우주와의 관계 등 만물의 이치를 밝히려는 학문.훈고학을 배척함)의 시조.그의 고향 이름데로 號를 廉溪한다
---* 張 載:북송 학자.號:子厚 지은책:東銘.西銘.正蒙.易設등

*.49살때(1558년 무 오)
겨울에 고봉 *기대승과 태극도설을 강론 하시다. 때에,고봉 기 대승이 일재 *이 항을 찿아보고 태극도설을 강론할새, 이항은 태극 음양을 하나라 하고,기 대승은 그렇지 않다하여, 종일 토론 하다가 의견이 하나로 돌아 가지 않으니, 기 대승이 와서 선생을 뵙고, 이 항과의 토론 결과를 보고 했다.선생은 기 고봉의 주장이 옳다 하시고 날이 맟도록 강론 하셨다.
---*高峯 奇大昇:조선 선조 때의 문신.성리학자.지은책:論思錄
---*이항(李恒):조선 명종때의 문신.성리학자. 號:일재(一齋).理氣 一元論을 발전시킴.

*.50살때(1559년 기미)
일재 이항에게 글을 보내어,태극 음양은 하나라함은 잘못 이라고 타이르시다.
일 재 이항이 고봉 기 대승의 의견에 반대하여,태극 음양이 하나라고 극론하는글을 선생에게 보내어,고봉 기대승에게 전해달라고 하므로 선생이 그 글을 보시고,일 재 이 항에게 간단한 편지를 보냈는데,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기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논하고자하지 아니하나,우주를 이루는 근본의 理인 태극과,그것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음양의 氣가 섞이여,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그것으로 부터 나오지 아니한것이
없으며,저마다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태극이 음양에서 떠난다고 할수는 없으나,理와 氣의 분별은 한계가 없을 수 없은즉,태극과 음양은 하나라고 할 수 없는지라,周子가 "태극이 음양을 탐은 사람이 말을 탐과 같은데,결코 사람을 말이라고 할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겨울에 고봉 기대승과 *"사단 칠정의학설"을 강론 하시다.
그때,기대승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있었는데, 매양 선생을 뵙고 의리에 관한 토론을 하여,퇴계 이황과 사단 칠정의 理와 氣가 서로 피어 난다고 주장하는 학설에 깊이 의심을 품고,선생께와서 질문하니,선생이 이를 아주 정밀하게 분석해서 사리를 뚫어지게 환하게 알고 그 옳고 그름을 밝히시니,기 대승이 선생에게서 배워 얻은바가 이러 하였으므로, 선생이 돌아가신뒤에 그가 이황과 더불어 사단 칠정의 理와 氣가 서로 피어난다는 학설이 옳지 않음을 강론할새, 선생의 의견을 많이 들어서 이를 밝히니 거의 수만 말이나 되었다.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퇴계와 고봉의 사단 칠정에 관한 왕복문서'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나 정암의 인심 도심설을 논하시다.
정암의 성명은*나 흠순이니,그가 지은 곤지기(困知記)란 책에 '道心은 사람.만물의 본 바탕이오,人心은 사람.만물에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인데,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아주 깨끗한 것을 볼 수 없으므로 희미하고,변화 무쌍한 기미를 헤아릴수 없으므로 위태롭다.' 고 하셨다.
蘇齋*노수신이 그 학설을 내세워 "생각컨데,도심은 아주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인심은 신령에 감응되어 모든 일에 통한다." 하니,선생이 매우 나무라며, "성인들이 말하는 인심, 도심은 움직이는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셨다.
선생이 돌아 가신 뒤에 퇴계와 고봉이 함께 선생의 말씀을 따라 노 수신의 주장을 공박했다.
---*四端 七情의 之說=송나라 주자학의 四端과 七情을 연구하는 학설.퇴계 이황은 理氣 二元論을 주장하고, 그의 제자 고봉 기대승은 理氣 一元的 二元論을 주장하였다.
---*四端(사단):유교에서 말하는,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가지 마음씨.곧,仁:측은히 여기는 마음.義:부끄러워 하는 마음.禮:사양하는 마음.智:시비를 가리는 마음.
---*七情:사람의 일곱가지 심리 작용. 곧,기뿜,노여움,슬품,즐거움,사랑,미움,욕심.
---*羅欽順:명나라 유학자.호:整庵. 宋나라 程顥,程이,朱熹 계통의 학설을 기본으로 독자적인 一元氣說을 주장했음.
---*道心:도덕 의식에서 우러 나오는 마음.사욕에 더럽히지 않는 깨끗한 마음.
---*盧守愼:조선 선조때의 문신. 학자.號:蘇齋. 영의저을 지냄.기대승과 사단 칠정노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

*.51세때(1560년 경신)
퇴계 이황이 고향인 禮安에 陶山 書堂을 세운 해다.
정월 16일 *정침에서 임종하시다.
사흘 전에 선생이 심기가 편찮으셔서 약을 드렸더니,집안 사람에게"내가 보름날에 삼가 제물을 갖추어 자식들에게 사당에 제사 지내도록 하라."하시고,보름날 선생이 병환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나셔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당부하시되,"내가 죽은 뒤에 을사년 이후의 관작(벼슬과 작위)은 일 체 쓰지 말라"
하시고, 다음날(16일)병환이 위증하여, 자리를 바로 하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선생이 아이 때에 눌재 *박 상이 보고 사람들에게"예로부터 약고 재주가 많은 아이는 제 명데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일이 없는 법인데, 오직 이 아이만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가리라." 한 일이 있었다.과연, 그 말이 그대로 실현 되었다.
이 해 3월에 장성현 대 맥동의 원당산*자좌오향 벌에 장사 지 냈다.
---*正寢:제사를 지내는 몸체의 방.또는 거처하지는 않고 일 할때에 쓰는 몸채의 방.
---*朴 祥:조선 중종때의 문신. 號:訥齋. 청백리 문장가로 이름 남.
---*子坐午向:북쪽을 등지고 정 남쪽을 향함.
------河西의 家族(정리)-----
*고조 達源(달원) 忠佐衛中領司正(충좌위중령사정)
*증조 義剛(의강) 司 署直長同正(사온서직장동정)
*할아버지 丸(환) 從仕郞(종사랑)으로 金溝 訓導였고
*아버지 齡(령) 義陵參奉 제수하였으나 벼슬하지 아니하였고
*어머니 玉川趙氏 (父 訓導 勤)
*河西-配 貞敬夫人 驪興尹氏 (父:縣監 任衡의 딸) 사이에 二男四女를 두었다.
*장남 從龍
*長男配 星山李氏 父:一齋 先生 李恒
*河西는 一齋의 모든 학문적 관심과 삶의 태도를 존경한 나머지 서로 교우하고
자기의 아들이며 一齋의 사위인 從龍을 通하여 교우를 두터이 하며서 학문적
논변:(理氣 一元論 太極說)을 論하였으며 一齋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다.
*次男 從虎:(字:季義) 自如察訪
*次男配 南原晉氏 父:承旨壁
*장녀
*큰사위 咸安人 趙希文(조희문).號:月溪(월계)
*차녀 일찍 죽었다.
*二사위 濟州人 梁子 (양자징):號 巖(고암)--瀟灑園(소쇄원)梁山甫(양산보)의 아들
*양산보 와의 문학적 교유 소쇄원48영을 짓다.
*삼녀
*삼사위 善山人 柳景濂(유경렴): ------號 眉巖 柳希春의 아들
*玉果縣에 있을 때 眉巖 柳希春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주고 간 孝經刊誤
모사 하고 跋文을 쓰다.
*柳希春이 귀양길에 오르자 그전에 하서가 병들었을 때 돌봐준 의리를 잊지
않고 그의 아들을 사위로 맞았다.
*막내딸 結婚前 夭切

*河西의 학문적 先後배

* 하서의 學脈
*慕齋 金安國(1478--1543)
중종12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지방에 小學과 鄕約보급에 앞장선 인물로 어린 시절 소학을 배움. 그 해에 己卯士禍로 趙 光朝 등 대부분의 私林派가 賜死 내지는 流配되었고 慕齋 도 禍를 면하기는 하였으나 利川으로 歸鄕.

*新齋 崔山斗(1483--?)
慕齋가 歸鄕後 홀로 四書五經을 공부하였으나 당시 己卯士禍로 인해 同福에서 유배 생활하던 新齋 崔山斗에게 사사,

*訥齋 朴祥(1474--1530)
이웃 광주에 돌아와 있던 訥齋 朴祥에게 찿아가 뵈옵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 仰亭 宋純(1493-1583)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仰亭 宋純의 門下에도 출입하였다.

*河西의 交友(성균관)
22세때 성균관 司馬試에 합격 進士가 되었는데 徐敬德,成運,白仁傑,鄭惟吉등이 同榜이었다.
이때 退溪 李滉등 깊은 친교를 맺고 학문을 연마 하였는 데 두분 사이의 돈독한 우의는 退溪가 돌아갈때에 贈別詩를 써서 "夫子는 영남의 수재로다. 문장은 李 白. 杜 甫요. 글씨는 王羲之.趙孟兆로구료"라고 한것이나,후일 퇴계가
후일 "함께 교우한 사람은 오직 河西 한사람 뿐이었다"--퇴계전서 언행록 권 一.

*別試 文科 丙科에 급제하여 賜暇讀書의 恩典으로 湖堂에 오랐다.
이때 함께 공부한 13인의 湖堂 修계록을 보면 평생 교우한 퇴계 이황,(1501--1570),임형수(금호1504--1547),유
아길(임당1515--1588),등 거의가 희대의명사들로서 서로 학문적 교류가 각별했다.

* 하서는 一齋와 학문적 탐구
梁山甫와의 문학적 교우
仰(면앙 宋純)과의 학문적 師承으로 삼고
鄭撤(정철)을 文人으로 두었으며
이때 交遊한 문인들로서는 林億齡,梁山甫,高敬命,鄭澈,金成遠,奇大昇,梁應鼎등
많은 名士들이 河西와 함께 師弟로서 友人으로서 從遊하였다.
東邦의 大儒學者 河西 金麟厚 略傳 3部
-----------------------------------가신 뒤------
*.선생 가신 지 4년(1564년 갑자)
영귀정 짓다.선생이 돌아가신 다음해인 신유년에 선생의 제자 양 자징(梁子澂)이 家壯을 짓더니, 갑자년에는 옥과 선비들이 선생의 남기신 사랑을 잊지 못하여'영귀정(詠歸亭)'이라는 *사당을 지었다.
영귀정에는 선생과 임진란 때의 의병장이며 이조 참의(지금의 내무부 관리관)벼슬을 받은 유 팽로 사간(司諫:사간원의 종 3품 벼슬) 李興淳,辛 二剛들의 신주를 모신다.
---*家狀:집안의 조상의 (行狀:사람이 죽은 뒤에 평생 지낸 일을 적은 글)
---*祠堂: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집.

*.가신 지11년(1570년 경오)선조 3년
2월에 기 대승이 나주로 돌아가고, 12월에는 퇴계 이 황이 세상을 떠났다.
순창 선비들이 '화산사華山祠'라는 사당을 짓다. '화산'은 선생이 머무르시던 곳이다.
화산사에는 선생과 *大司諫 신 미주(신숙주),충암*김정,제봉 *고경명,건재*김 천일 들의 신주를 모신다.그리고 후에 어암사(어암사)를 지었다.
---*大司諫=司諫院:임금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말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의 으뜸 정3품벼슬.
---*金 淨:조선 중종때의 정치가.문장가. 號;沖庵.
---*高敬命: 임진왜란때 의병장 號:齊峯.
---*金千鎰:임진왜란때 의병장.號:健齋. 임진 3장의 한사람.

*가신 지 31년(1590년 경인)
4월에 노 수신이 죽고, 11월에 통신사 黃 允吉등이 일본에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난 해다.
제자 卞 成溫 들이 장성군 서쪽 십리 밖 岐山里에 *서원을 세웠다.
---*書院: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뛰어난 학자나 충신을 제사 지내는곳.

*.가신 지 98년(1658년 무술) 효종 9년
전라도 *유생들이 임금께 글을 올려 장성 서원에 이름을 지어 주시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儒生: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배워 받드는 선비.

*.가신 지102년(1662년 임인) 현종 3년
나중(1675년)에 선생의 묘표(墓表: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를 지을 *김 수항이 4월에 대제학이 되었다. 임금이 서원이름을 '필암 서원(筆岩 書院)'이라 하시고,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 주셨다.
---*金 壽恒:조선 현종때의 相臣.號:文谷.영의정을 지냄.

*가신 지 108년 (1668년 무신) 현종 9년
경연에 관계하는 *이 단하가 임금께 글을 올려 선생께 벼슬을 내려 주시라고 청하여, 봄에
'*자헌 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사,*지의금부사,*지춘추관지사,*지성균관관사,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 *오위 도총부*도총관, *세자 좌빈객'이라는 벼슬을 받으셨다.
---*李 端夏:조선 중기의 문관.호:畏齋.이조참의,좌의정을 지냄.
---*資憲大夫:조선시대 정2품 문무관의 벼슬등급.
---*吏曺判書:지금의 내무부 장관.
---*知經筵事:임금앞에서 經籍의 강론을 하는일을 맡은 관청인 經筵廳의 우두머리.정 2품벼슬.
---*知義禁府事: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죄인을 다스리는 관청인 義禁府의 우두머리.정2품.
---*知春秋館事: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관한 기록을 맡은 관청인 춘추관의 우두머리.정2품.
---*知成均館事:성균관의 우두머리.정2품.
---*五衛:조선시대 군대 편제.중위,좌위,우위,전위,후위의 다섯衛.
---*五衛 都摠府:조선시대 5위를 통솔 통솔 지휘 감독하던 관청.
---*都摠菅:조선시대 오위도총부의 軍務를 총괄하는 최고 장관.정2품.
---*世子左賓客=조선시대 世子 侍講院:왕세자에게 경서와 사기를 강론하고 도의를 지키도록 훈도하는 일을 맡은관청. 정2품벼슬.

*.가신 지 109년(1669년 기유)
한가을 8월에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시다.
문정의 문(文)은 도덕가로서 학문이 넓고 깊음이오,정(靖)은 사람이 그의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남이다.
---*諡號:재상이나 어진 선비들이 죽은 뒤에,그들을 기리어,임금이 내려주는 이름.

*.가신 지 112년(1672년 임자)
현석 *박 세채가 행장을 지었다.
---*朴 世采:숙종때의 상신. 성리학자. 호:玄石.

*.가신 지 115년(1675년 을 묘) 숙종 1년.
정월에 송 시열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