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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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연서원(龍淵書院)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박 인(朴 絪)
   1664년(현종 5)
   1691년(숙종 17)
   3월 3일, 9월 9일
    합천손목리영모록및 무민당집책판(陜川巽木里永慕錄 및 无悶堂集冊版)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70호(2008.01.10지정)
1580년에 용연사(龍淵祠)를 세워 영모재를 향사하였다. 그러다가 1688년에 용연서원(龍淵書院)을 건립하여 추모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때 훼철되었고, 본래 용연사의 유허지를 알리는 면암(勉菴) 최익현이 지은 유허비가 남아 있다. 그 후 1910년에 후손과 유림이 다시 뜻을 모아 용호정을 건립했다. 이어 용연사와 비각, 동재, 서재가 차례로 복원되어 1947년 용연서원으로 정비되었다.
1664년(현종 5)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인(朴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714년(숙종 40) 문동도(文東道)를 추가배향하였다. 1691년(숙종 17) ‘용연(龍淵)’이라고 사액되었다. 그 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박인(朴絪, 1583-1640)
1583년(선조 16) 현재 야로면 하림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백화(伯和)이며, 호는 임헌(臨軒)이라고 하였다가 인조 15년 삼전도의 국치 후 느낀바가 있어 무민당(无悶堂)으로 고쳤다. 부친 수종(壽宗)은 성균관 생원으로 임란 때 창의하였으며, 어머니는 정건(鄭健)의 따님이다. 3세 때 어머니를 잃고 재종조모 형씨(邢氏)의 보살핌으로 자랐으나 자질과 기량이 뛰어나, 10세 때는 능히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22세 때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는 않았다. 이후로 부모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는 했으나 급제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 정진에 뜻을 두었다. 25세 때 겨울에 용강(龍岡)촌에 살면서 서실을 잠실(潛室)이라 이름하였다. 이때 무민당은 새벽에 일어나서는 부모께 문안하고 물러 나와 잠실에 거처하였으며, 해가 저물도록 꿇어 앉아 글을 읽고 침잠하였다. 용강촌은 현재 용주면 손목리라고 한다.
27세 때 봄에 향시에 또 합격했다. 이때 무민당이 과거에 응시한 것은 어버이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명 선생의 “티끌 흙이 뱃속에 있으면, 지금 곧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씻으리라”는 욕천시 구절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부친에게 과거 폐하기를 청하였다. 부친이 허락하여 비로소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28세 때는 임헌(臨軒)이라고 스스로 호를 정했다. 이 호는 “주역 臨卦(임괘)”에 “대개 군자가 남들을 가르치는 생각은 무궁하여 백성을 보존함이 끝이 없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30세 때 가을에 덕천에 가서 남명선생 사우(祠宇)와 묘소를 배알하고 두류산에서 놀았다.
이듬해 당시 조정에서 전권을 휘두르고 있던 이이첨 일파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내암 정인홍에게 편지를 보내어 불가함을 주장했다. 무민당과 내암은 외척관계로 같은 고향 출신이며, 무민당이 일찍이 그의 문하에 출입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어지러운 정국에 바른 말을 하다가 결국 귀양을 가게 되는 동계 정온, 한사 강대수 등 어진 선비들과도 친분이 있어 이들을 위해 변호하기도 했다.
인조반정으로 스승인 내암이 처형을 당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는데 이때 무민당은 시비를 말하지 않고, “지난날 생각이 달랐다고 해서 지나간 허물을 비판하겠는가. 국법이 이미 정해졌는데 좇아서 미워하면 군자가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겨울에는 진주 고산정사(孤山精舍)에 가서 정훤, 하홍도 등과 학문을 토론했다.
42세 때 이윤우가 무민당을 조정에 천거했다. 우복 정경세도 무민당의 학덕을 듣고 조정에 천거하기도 했다. 46세 때 봄 덕산에서 남명 선생의 아들 조차마(曺次磨)가 남명선생의 ‘연보’와 ‘사우록’을 부탁했다. 49세 때 서애 유성룡의 셋째 아들인 유진(柳袗)이 합천 군수로 부임해 스스로 무민당을 찾아와서 친교를 맺고, 고을 다스리는 일을 자주 자문했다. 이듬해 7월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4세 때 혼신의 노력으로 ‘산해사우연원록’을 완성했다. 그 후에도 수정 작업이 계속되어, 훗날 간행에 이르기까지는 무민당 사후에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때 많은 서책을 본 무민당은 안질에다가 8~9년전부터 산증(疝症)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병세는 더욱 심각하여 작업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으며, 출입에도 부자유스러웠고 4년 뒤 세상을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 55세 때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는 삼전도의 국치를 당하자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무민당(无悶堂)이라고 고치고 문을 절호문(節戶門)이라고 하였다. 무민당이라는 말은 정묘·병자호란 끝에 정월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쳤고 ‘대개 나가지 아니하면 허물이 없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1640년 11월 10일 58세를 일기로 고산정사(孤山精舍) 세상을 떠났다. 무민당의 행장은 간송 조임도과 임곡 임진부가 지었다. 효종 10년(1658)에는 사림들이 유덕을 기려 용연서원(龍淵書院)을 창건하여 배향하였다.
 
2)문동도(文東道, 1646-1699)
호(號)는 경암(敬庵), 본(本)은 남평(南平), 부(父)는 욱(頊), 거(居)는 합천(陜川)이다.
강상제(姜尙齋)가 찬(撰)한 행장을 보면공(公)은 13세(歲)에 김익견(金益堅)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공부(工夫)했으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부모(父母)의 명(命)에 순종(順從)하였다. 1691년(숙종 17) 도천(道薦)으로 후능참봉(厚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치 않았으며, 1699년에 다시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로 징소(徵召)되었으나 또 병(病)을 사표(辭表)를 올리고 이해 5월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겨우 54세였다. 많은 저서(著書)가 있고 1714년에 무민당(无悶堂) 박선생(朴先生)을 봉안(奉安)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사우인 용연사, 4칸의 조계정사(釣溪精舍), 3칸의 벽한정(壁寒亭), 정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박인과 문동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당인 조계정사는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던 곳으로 사용되어 왔다.

1)합천손목리영모록및무민당집책판(陜川巽木里永慕錄 및 无悶堂集冊版)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70호(2008.01.10지정)
 
①영모록 책판
이 책판은 영모록의 원집 17장과 습유 7장 등 도합 24장 12매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적인 크기는 가로 52.5cm, 세로 27cm, 두께 2cm이며, 광곽의 크기는 가로 32.5cm, 세로 20cm이다.
영모록은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 1583~1640)이 그 아버지 조계(釣溪) 박수종(朴壽宗, 1565~ 1619)의 유고와 부록 문자를 정리하여 1627년에 제작한 것이다. 24장에 불과하여 1책으로도 얇은 것인데다, 문집처럼 호를 내세우지 않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유고 4편이 앞에 실려 있고, 그 뒤에 만장 21편과 제문 7편 및 묘갈명이 차례대로 실려 있다. 이 부록에 실린 만장이나 제문의 작자와 그 내용을 살펴볼 때, 박수종이 내암 정인홍의 종매부로서 그 문인이 되어 여타 내암의 문인들과 교제가 매우 긴밀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책은 그 분량은 얼마 되지 않고, 그렇게 위대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인조반정 이후의 남명학파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아주 희귀한 자료이다.
 
②무민당선생문집 책판
정조 22년(1790) 정월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가 찬술한 서문과 갑술년(1814) 7월에 무민당의 5대손 박성림(朴聖林)이 찬술한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90년 무렵부터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여 1814년 무렵에 책판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판은 모두 279장 140매로, 별집 1·2장 1매를 제외하고 모두 보존되어 있으며,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것이 4장이다. 대체적인 크기는 가로 52.5cm, 세로 27cm, 두께 2cm이며, 광곽의 크기는 가로 32.5cm, 세로 20cm이다.
합천 야로 외가에서 태어나 내종숙(內從叔) 내암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평생 고거(故居) 조동(釣洞)에 칩거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동계 정온 및 겸재 하홍도와 함께 남명학파의 리더로서 학파를 내부적으로 결집케 하고, 남명 조식의 사우 연원록과 연보 작성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원집이 7권 4책이고 별집이 2권 1책이어서, 모두 9권 5책으로 되어 있다. 원집의 목록 앞에 서문과 세계·연보가 차례로 들어 있고, 1권에는 시(詩), 2·3권에는 서(書), 4권에는 서·기·설·잡저·제문·묘갈, 5권에는 남명선생언행총록·남명선생연보, 6·7권에는 부록으로 만장·제문·행장·묘갈·묘지·용연서원상량문·상향축문 등이 들어 있다. 별집 1권에는 제영·행록·소가 들어 있고, 2권에는 사우록과 책 전체의 발문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남명선생언행총록과 남명선생연보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 내에서 그의 위상이 어떠한가를 대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상가정서(上家庭書)」는 출처관에 대한 표현이나 과거를 보는 관점 등이 내암 정인홍의 작품 「문답(問答)」과 흡사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가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학문 태도에 얼마나 깊이 유염되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한다.

참고-합천군사, 1997.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