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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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계산서원(溪山書院)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 400
   김지대(金之岱) 김응용(金應龍) 김몽룡(金夢龍) 김희방(金希邦) 김수성(金秀聲)
   1704년(숙종 30)
   
   음력 3월 8일
   
계산서원은 상하면 검산리에 있는 청도김씨 김지대(金之岱), 김응용(金應龍), 김몽룡(金夢龍), 김희방(金希邦)을 모신 사우이다. 김지대는 1704년(숙종 30) 청도의 남계서원에 모시었는데 고종 때 훼철되고 지난 1982년 유론으로 이곳 스무재(卄齋)에 이전하여 설향(設享)하면서 김응룡, 김몽룡, 김희방을 추배했다. 1993년 김수성(金秀聲)을 추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8일 향사한다.

1)주벽-김지대(金之岱, 1200∼1266)
청도김씨의 시조. 벼슬은 태부중서시랑평장사. 시호는 영헌(英憲). 고려 신종 3년에 청도군 하남면 대성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풍채가 특출하고 총명하기 신과 같아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했다. 시서와 6예의 글을 통하여 훌륭한 인격을 엿보였다. 고려 고종5년(1218)에 거란병이 쳐들어왔다. 그 당시는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종군하게 되어있어 김지대는 아버지가 징병하게 됨을 보고 나이 많은 부모님을 대신하여 입대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종군하게 되었다. 종군할 때 모든 군사들은 무서운 짐승의 모양을 그려 방패를 만들어서 과시하는데 오직 김지대만은 방패 머리에 1절의 시를 지어 방패를 만들었다. <國患臣之患親憂子所憂代親如報國忠孝司雙修> “나라의 걱정은 신하의 걱정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아들의 근심이라.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함은, 충과 효의 두가지를 닦음이라.” 하였다. 그때 원수 조문정공 충이 군사를 점검하다가 그의 시를 보고 기특히 여겨 중요한 보직을 주어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게 하였다. 이듬해에 강동에서 거란족을 크게 무찌르고 나라는 평정을 보게 되었다. 그 뒤 벼슬길에 올라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쳤으며, 나라에는 충성이요 부모에게는 효도하는 정신을 온 백성들에게 몸소 보였다. 선생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있을 때 몽고병이 북변을 침범하여 서북의 여러 성을 잃었다. 병마사 홍회가 주색에 빠져 군무를 돌보지 아니한 결과였다. 임금께서는 홍회를 대신하여 출진케 하니 이에 서북 40여 성이 안정되었다. 임금께서는 공을 표하여 오산군을 봉하고 태부중서시랑 평장사를 배하였다. 이 분이 청도김씨 시조이며 묘소는 경북 청도군에 있다. 고려 때의 경북청도는 밀양군의 땅이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밀양군 청도면 두곡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그의 시호는 영헌(英憲)인데, 바른 덕은 화평함에 응하므로 영(英)이며, 착한 행실은 법과 같으므로 헌(憲)이라 하였다. 후손들이 사는 청도면 두곡리에 그의 위패를 모시는 쌍수당(雙修堂)이 있으며, 쌍수당은 충성과 효도 두 가지를 닦은 뜻이라 한다.
 
2)김응룡(金應龍, 1547~1592)
임진왜란 때 창의한 선비. 자(字)는 린서(麟瑞), 호(號)는 남강(南岡), 김지대의 13세손이다. 1547년(明宗 2) 고창군 상하면 검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총명한 자질에 체력이 뛰어났다. 가세가 빈한했으나 의식을 개의치 아니하고 을사명현인 4종조 병산 란상(缾山 鸞祥)에게 배우고 퇴계문하에 왕래하여 성리학의 요결을 터득했다. 임진란을 당하여 ‘적세가 만천하고 조야가 진동하니 분연히 말하기를 어찌 국가위난에 안연히 있겠는가’ 하고 아우 응구 응본 그리고 재종제 몽룡, 사위 김진과 함께 궐기하여 권율원수에게 달려가 많은 공을 세우고 군량미 책임을 받아 무장 동백호에 수송하고 행주전투에서 순절하였다. 또한 동생인 응구가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적진에 돌진했으나 또한 순절하였다. 그리하여 선무 원종훈에 책록되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3)김몽룡(金夢龍, 1558~ )
자(字)는 여신(汝神) 호(號)는 식암(息巖) 김응용의 재종제(再從弟)이다. 1558년(명종 13) 고창 공음면 두암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지절이 있고 효우가 지극했다.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군량을 내어 현성을 지켰고 재종형 응룡과 함께 권율을 도와 이현과 신주에서 전공을 세우고 권율의 천거로 훈련원 판관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뒤에 선무삼등훈(宣武三等勳)에 책록되었다. 금곡사(금산)에도 향사되었다.
 
4)김희방(金希邦, 1568~ )
자(字)는 성보(聖輔) 호(號)는 모헌(慕軒), 김몽룡의 재종질(再從姪)이다. 1568년(선조 1) 고창 해리면 임해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효로 알려지고 강개하여 대절이 있었다. 임진왜란에 유팽노(柳彭老), 김덕홍(金德弘), 김세근(金世斤) 등과 함께 창의하여 의주 행재로 달려갔고 또 고경명의 금산싸움에 참여하여 선봉에서 전공을 세워 훈련원 주부가 되었다. 뒤에 선무일등훈(宣武一等勳)에 올랐다.
 
5)김수성(金秀聲, 1840~ )
조선 말기 학자. 자(字)는 경덕(敬德) 호(號)는 하석(霞石), 김응용의 10대손. 1840년(憲宗 6) 고창군 상하면 검산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명민(明敏)하여 가학(家學)을 이어 일찍 학문을 이루었다. 1877년(고종 14) 문과에 올라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정언을 지내고 1884년(고종 21) 무장현감이 되었으나 부모봉양을 이유로 나기지 않았다. 뒤에 헌납 지평 장령을 지내고 모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와 아버지를 봉양하며 위기의 학에 전념하고 후생을 계도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인 상충사(尙忠祠)와 4칸의 강당인 경의당(景義堂), 5칸의 유생실인 감모재(感慕齋), 신문(神門)·외삼문(外三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지대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응룡·김몽룡·김희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전북향교원우대관1994
도서문화연구원 http://islands.mokpo.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