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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김려석(金礪石, 1445∼149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은경(殷卿). 할아버지는 원손(遠孫)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수(洙)이며, 어머니는 권항(權恒)의 딸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 겸 예문관검열(成均館學諭兼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으며, 뒤에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재행겸비자(才行兼備者)를 선발할 때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뽑혔으며, 1472년 병조정랑이 된 뒤 검상(檢詳)·사인(舍人)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1479년 성균관의 사예(司藝)로서 원수(元帥)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1481년 사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도승지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참의로 재직 중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탄핵되어, 1487년 충청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판결사(判決事)를 겸한 뒤 경상도·강원도의 관찰사, 호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91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예조참판을 거쳐 1493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관리가 되어서는 사람의 뜻을 살피기에 힘써 특별히 마을을 써서 대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사관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2)박희권(朴希權) 세조의 탈권(奪權)에 반항하고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은둔자정(隱遯自靖)한 의율제 박린(擬栗齊 朴麟)의 아들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1448년(세종 30) 동몽교관, 1453년(단종 1)에 사헌부감찰에 증직되었다. 단종이 손위(遜位)할 때 아버지 린은 진산군수(珍山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부자가 서로 울며 말하되 ‘영월로 가서 목숨을 바쳐 충성함이 의리에 당연하다’고 말하고 출발하려 했는데 직전에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 후원에 壇을 쌓고 매년 제향을 올려 절의를 지켰다. 그 고조부 힐(詰)도 함께 절의를 지켜 三世忠義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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