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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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반곡서원(泮谷書院)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수선리 반저동
   국 유(鞠 儒) 국 함(鞠 涵) 국 침(鞠 沈) 국 명(鞠 溟)
   1668년(현종 9)
   
   음력 2월, 8월 중정(中丁)
   
1613년(광해 5)에 국함(鞠涵)이 강당(講堂) 환성재(喚醒齋)와 정자(亭子) 화양정(華陽亭)을 건립(建立)하고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한 것이 시발(始發)이다. 1610년(광해 2)에 송영구(宋英耈)가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가서 공부자(孔夫子) 영정(影幀)을 가지고 왔다가 보관하기 어렵자 국함(鞠涵), 국침(鞠沈)에게 촉탁(囑託)하니 국렴(鞠濂)이 강당(講堂)뒤에 정궁(幀宮)을 지어 봉안(奉安)하고 마을 이름을 양곡리(楊谷里)에서 반저동(泮渚洞)으로 고쳤다. 1668년(현종 9) 문인(門人)들이 중심이 되어 정궁(幀宮) 앞에 사우(祠宇) 반곡사(泮谷祠)를 창건(創建)하고 국함(鞠涵), 국침(鞠沈)을 향사(享祠)하였다. 그 뒤 1968년(고종 5)조령으로 훼철(毁撤)되고 정궁(幀宮)만 남게 되어 1892년(고종 29) 고산향교 경내로 정궁(幀宮)을 이건(移建)하였다. 1904년(고종 41)에 설단(設壇)하여 향사(享祠)하다가 1937년 국유(鞠襦)를 제향(躋享)하고 1960년 국명(鞠溟)을 추향(追享)하였다. 1967년 정부보조금과 사림(士林)과 본손(本孫)의 협찬금으로 정궁(幀宮)의 유허(遺墟)에 사우(祠宇)를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국유(鞠襦)
고려말 의절인으로 자는 경덕(敬德), 호는 복애(伏崖), 본관은 담양 양(樑)의 아들로 1324년(충숙왕11)에 추성현(秋城縣) 원율리(原栗里)에서 출생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門人)이다. 벼슬은 호부상서겸판의금(戶部尙書兼判義禁)에 이르렀다. 전록생(田祿生)ㆍ정몽주(鄭夢周)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부통사(副統使)로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과 더불어 탐라(耽羅)를 정벌(征伐)하여 제주(濟州)라 했고, 그 공으로 호부상서겸 판의금부사(戶部尙書兼判義禁府事)가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자정(自靖)하니 태조(太祖)가 예조판서(禮曹判書)로 불렀으나 응(應)하지 않았다. 태조(太祖)가 진로(震怒)하여 그 여막(廬幕)에 불을 지르게 하니 피하지 않고 소신(燒身)하여 순절(殉節)하였다. 개성 표절사(表節祠)와 담양 귀산사(龜山祠), 장성 경현사(景賢祠), 담양 증암사(甑岩祠)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2)국함(鞠涵)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양원(養源)이고, 호는 환성(喚醒)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수성(守成)의 아들로 1573년(선조6) 출생하였으며. 정경세(鄭經世)의 문인(門人)이다. 송표옹(宋瓢翁), 정화곡(鄭禾谷), 심초정(沈草亭), 구죽유(具竹牖), 이서귀(李西歸)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여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았다. 문기(文氣)가 정한(精悍)하고 필세(筆勢)가 출중(出衆)하였다. 1613년(광해5)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혼조(昏朝)에 뜻을 두지 않고 두문자적(杜門自適)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하다 세상을 떠났다.
 
3)국침(鞠沈)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심원(深源)이고, 호는 송만(宋灣)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함(涵)의 아우로 1577년(선조 6) 출생하였으며, 정경세(鄭經世)의 문인(門人)이다. 송표옹(宋瓢翁)ㆍ정화곡(鄭禾谷)ㆍ심초정(沈草亭)ㆍ구죽유(具竹牖)ㆍ이서귀(李西歸)등과 종유(從遊)하였다. 부병(父病)에 열지주혈(裂指注血)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여묘(廬墓)를 3년하였다. 이 효행이 알려져1650년(효종1)에 정려(旌閭)와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1613년(광해5)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후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취련산(翠蓮山) 기슭에 집을 짓고 형제들과 더불어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餘生)을 마쳤다.
 
4)국명(鞠溟)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거원(巨源)이고, 호는 죽계(竹溪)며, 본관은 담양이다. 함(涵)의 아우로 1583년(선조16)에 출생하였으며,정우복(鄭愚伏)의 문인(門人)이다. 심초정(沈草亭)ㆍ구죽유(具竹牖)ㆍ구우교(具于郊)ㆍ이서귀(李西歸) 등과 종유(從遊)하였다.문장(文章)으로 이름 있었으나 혼조(昏朝)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죽계(竹溪) 옆에 집을 짓고 학문(學問)에 열중하여 크게 성취(成就)하였다. 이후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진력하다 일생(一生)을 마쳤다.
축문(祝文): 환성국선생(喚醒鞠先生) 송만국선생(松灣鞠先生) 죽계국선생(竹溪鞠先生) 복이(伏以) 일문효우(一門孝友) 병세문장(幷世文章) 유모재인(遺慕在人) 유엄시당(有儼是堂) 자용중정(玆用中丁) 식천두상(式薦豆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며 강당은 전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내.외삼문은 각 3칸이며 교직사는 일동(一棟)이다. 그 외 1995년에 세워진 비석 1기가 있다.
 
泮谷祠 重建事業 記念碑(文)
이곳 산정리(山亭里) 반곡(泮谷)은 전한(前韓) 선조시(宣祖時)에 담양국공(潭陽鞠公) 환성(喚醒) 위 함(涵)과 송만(松灣) 위 침과 송동(松洞) 위 홍(洪)과 죽계(竹溪) 위 명(溟)과 율동(栗洞) 위 염 오형제분(五兄弟分)이 생장(生長) 수학(修學)하신 곳이요 본사(本祠)는 현종(顯宗) 무신(戊申) 一六六八年에 환성(喚醒) 송만이선생(松灣二先生)을 위(爲)하여 창건(創建)하였다.
후(後) 一七九二年에 중수(重修)하였으나 불행(不幸)이 무신(戊申) 一八0八年에 화재(火災)로 인(因)하여 설단(設壇) 행사(行祀)하여 오다가 고종(高宗) 무신(戊申) 一八六八年에 조령(朝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
신미(辛未 一八七一年에 부설(復設)하고 이어 강당(講堂)을 신축(新築)하고 화모제(華募齊)라 불렀다. 순종후(純宗後) 정축(丁丑) 一九三七年에 복애선생(伏崖先生) 위 유(孺)를 제형하고 경자(庚子) 一九六0年에 죽계선생(竹溪先生)을 추배(追配)하였다. 사우(祠宇)가 퇴락(頹落)하여 一九七一年에 국고보조(國庫補助)를 받아 보수(補修)하였는데 一九九四年에 완주군(完州郡) 비지정(非指定) 문화재(文化財)로 지정(指定)을 받아 보조금(補助金) 삼천만(參千萬)원과 본사(本祠) 중건추진회장(重建推進會長) 국동현(鞠東炫) 및 대종회장(大宗會長) 국승학(鞠承學) 특별성금(特別誠金)과 사림제현(士林諸賢) 및 본손제공(本孫諸公) 성금(誠金) 총계팔천여만(總計八千餘萬)원으로 본사우(本祠宇)와 내삼문(內三門) 및 일부원장공사(一不垣墻工事)를 완공(完工)하였다. 우사선생(右四先生)을 제사(祭祀)함에 소목(昭穆)에 따라 복애선생(伏崖先生)을 수위(首位)로 모셨으니 사형제(四兄弟)의 약사(略史)는 다음과 같다. 복애선생(伏崖先生)의 자(字)는 경덕(敬德)으로 이익제문하(李益齊門下)에 수학(修學)하여 정포은(鄭圃隱) 이목은(李牧隱) 전야은(田野隱)과 교유(交遊)하였고 공민조(恭愍朝)에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 겸(兼) 판의금 현재무장관(判義禁 現財務長官)에 이르고 부통사(副統使)로 최영장군(崔塋蔣軍)과 합모(合謀)하여 탐라(眈羅)에서 목호난(牧胡亂)을 평정(平定)하였다.
고려(高麗)가 망(亡)하고 태조(太祖)가 조선(朝鮮)을 세우고 예조판서(禮組判書)로 불렀으나 무송도시(撫松圖詩)를 지어 불복(不服)의 뜻을 보이니 태조대노(太祖大怒)하여 려막(廬幕)에 불을 질러 순절(殉節)하시니 두문동칠십이현중(杜門洞七十二賢中) 한분으로 표절(表節). 구산(龜山)[담양(潭陽)]. 경현(景賢)[광주(光州)]ㆍ증암사(甑岩祠)[담양(潭陽)]에서
철형하여왔고 환성선생(喚醒先生) 자(字)는 양원(養源)이니 우복(愚伏) 정문장공(鄭文莊公) 문인(門人)으로 문장(文章)과 필세(筆勢)가 탁월(卓越)하여 상상(上庠)[진사(進士)]에 올랐고, 송만선생(松灣先生)의 자(字)는 침원(沈源)으로 백공(伯公)과 동문수학(同門修學)하셨고 부상(父喪)에 시모종제(侍暮終制)하심으로 생시(生時)에 명정(命旌)하였다. 죽계선생(竹溪先生)의 자(字)는 거원(巨源)이요 우복문인(愚伏門人)으로 광해조(光海朝)에 오현종향(五賢從享)을 위(爲)하여 소문( 文)을 올렸다.
오호(嗚呼)라 복애선생(伏崖先生)의 충절(忠節)이 찬연함은 세인(世人)의 소공지(所共知)요 환성(喚醒) 송만(松灣) 죽계(竹溪) 삼선생(三先生)은 일문효우(一門孝友)요 병세문장(幷世文章)으로 후인(後人)이 숭앙(崇仰)하여 온지 오래다.
모현사상(慕賢思想)과 숭조정신(崇祖精神)은 만세불멸(萬世不滅)인 것이다. 이러므로 본사우(本祠宇)가 이와같이 화려(華麗)하고 장엄(莊儼)하게 세워진 것이다. 서원장(書院長) 김회식(金熙式)이 낙성(落成)에 임(臨)하여 정민(貞珉)을 세워 그 사실(事實)을 후세(後世)에 전(傳)하고자 석배(石背)에 실을 글을 청(請)하기로 우(右)와여(如)히 서술(敍述)하는 바이다.
단기(檀紀) 四三二八年 을해(乙亥) 一九九五年 三月十六日
선 능성(綾城) 구연건(具然建) 서(書) 국승권(鞠承權)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