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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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반곡서원(盤谷書院)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 210
   윤 황(尹 煌) 이영선(李榮先) 서필원(徐必遠)
   1777년(정조 1)
   
   2월 말정(末丁)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1호(1984.04.01지정)
1777년(정조 1) 지방유림들이 윤황(尹煌), 이영선(李榮先), 서필원(徐必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98년 유허지에 강당을 세우고 학도를 모아 교육을 해왔으며, 그 뒤 제단을 마련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1938년에 복원하고 1950년대 이후 네 차례의 보수를 하였다.

1)주벽-윤황(尹煌, 1571∼16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 충청병마절도사 선지(先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돈(暾)이고, 아버지는 창세(昌世)이며, 어머니는 부제학(副提學) 경혼(慶渾)의 딸이다. 전(烇)의 형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임명되었다. 1599년 주서로 입시한 뒤 군자감첨정·성균관전적을 거쳐, 1601년에 감찰이 되었으며 곧 정언으로 옮겼다. 이 때 홍문관은 중요한 부서이므로 은상(恩賞)으로 사사로이 임명할 수 없다는 것과, 척신의 직을 파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후 병조·예조의 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북청판관으로 나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혼인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시골에 은거하였다. 1626년(인조 4) 사간·보덕 등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主和)를 반대해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 주화론자의 유배를 청하고, 항장(降將)은 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주화는 항복이라고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되어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의 구원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다시 사간이 되었고 길주목사·안변부사·사성·승지·대사성 등을 거쳐 1635년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 때 전란으로 어려워진 백성의 구급책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며, 이 후 이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집의 채유후(蔡裕後),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았다. 특히 전식이 쓸데없는 논의로 나라를 그르친 죄를 청하자, 인조 또한 “부박(浮薄)한 풍습은 통렬히 징계해 다스리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죄를 정한다.”하여,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 나와 죽었다.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팔송봉사 八松封事≫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이영선(李榮先)
이영선은 문원공(文元公) 김사계(金沙溪)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서필원(徐必遠)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3)서필원(徐必遠, 1614∼167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운검총제 익(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용갑(龍甲)이고,아버지는 운기(雲驥)이다. 어머니는 이택민(李澤民)의 딸이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김집(金集)과 정홍명(鄭弘溟)에게 수학하였다. 1643년(인조 21)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사옹원봉사가 되었으며, 164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관을 거쳐 예문관검열과 설서(說書)를 역임하고 1654년(효종 5)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뒤 사간원헌납·이조좌랑·평안도어사를 거쳤다.
1656년 수찬을 비롯,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이조정랑 등을 지내다 충청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서원의 폐단을 보고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1658년 대사간과 승지를 거쳐 전남도감사가 되었을 때, 대동법(大同法) 시행에 찬동하여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하였다. 또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왕대비의 삭선(朔膳)을 감할 것을 청했다가 추고되었다.
1659년 진휼을 위해 속미(贖米)를 받고 중죄인을 석방했다가 파직당하였다. 현종 초년 병조참의·승지·대사성·예조참의·이조참의 등을 거쳐, 1663년(현종 4) 대사간·승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목면 재배를 권장하고 구휼 사업에 힘쓰기도 하였다. 특히 육진혁막제조(六鎭革瘼諸條)를 올려 그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는 데 앞장섰다.
1665년에 강화유수가 되었고 그 뒤 형조참판,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그 해 죽었다.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많이 하였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나서 그 시대 이상진(李尙眞) 등과 함께 오직(五直)이라 불렸다. 저서로 ≪육곡유고≫가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앙지문(仰止門), 3칸의 모현당(慕賢堂), 경행문(景行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윤황, 이영선, 서필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당인 모현당은 중앙의 마루와 좌우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앙지문은 내신문(內神門), 경행문은 외신문(外神門)이며, 외신문의 양쪽에 있는 협실은 서원 관리자가 사용하고 있다. 매년 2월 말정(末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6변(籩) 6두(豆)이다.


참고-전주시사198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라북도문화재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