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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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강서원(龍岡書院)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 251-1
   양팽손(梁彭孫) 양신용(梁信容)
   1821(순조 21)
   
   (음력) 2월, 8월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21호(1985.02.25지정)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과 장춘 양신용(長春 梁信容)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821(순조 21)에 창건, 처음에는 순천 용두면 중흥리(현 해룡면 증흥리)에 사우를 창건하였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헐린 뒤 1970년 현 소재지인 금곡동으로 이건·복설하면서 용강서원이라 이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양팽손(梁彭孫, 1488∼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綾城) 출신. 직장 사위(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담(湛)이고, 아버지는 이하(以河)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독서당을 고쳐 부른 이름)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이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해에 58세로 죽었다.
13세 때 송흠(宋欽)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630년(인조 8)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2)양신용(梁信容)
양팽손의 증손으로 자는 경중(景仲), 호는 장춘(長春)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신이 노쇠하여 참전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아들을 의병으로 보내고 자신은 해룡면 앵무산에 망성암(望聖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국권회복을 기원하였다.

용강서원이 들어선 자리는 비교적 고준한 경사의 산 중턱에 있는데 사당을 비롯하여 6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외삼문인 ‘지춘문’을 들어서면 ‘용강서원’이라 현액한 강당이 있고, 강당과 나란히 좌우로 서재와 동재를 두었다. 그 뒤로 1.5m의 지반 차를 두고 별도의 담장으로 두른 제향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정면 3칸, 후면 1칸 반의 규모로 전면의 툇칸을 개방한 맞배지붕의 낙천사가 있다.

참고-순천시사
전라남도·호남문화연구소 엮음,